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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쓰는 밤의 황제-101화 (101/270)

〈 101화 〉 101화

내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피식 웃고는 식사를 마치고 상을 대충 정리한 다음 안방으로 향했다. 새벽에 씻고 잠들었었기 때문에 대충 적당히 씻고 나와서 드레스룸에서 옷을 골라 입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유나의 비명이 들려왔다.

“꺅-!”

‘허허. 비명도 참 유나답네.’

실컷 늦잠을 잔 뒤 내지르는 비명마저 교양 넘치는 게 딱 유나다웠다. 나는 탄탄한 상체 몸매를 뽐내면서도 봄 날씨에 맞게 가볍게 걸치고 다닐 수 있는 얇은 가디건에다가 시계까지 차고 나와서,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고 있는 유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어났어요?”

“민, 민준 씨! 잠시만요! 저 출근해야 해서…!”

“뭘 그렇게 서둘러요. 어차피 오늘 사표 낼 건데.”

“아……”

내 말에 스턴을 먹었는지 분주히 옷을 입던 유나의 움직임이 딱 멈춰버렸다.

“왜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까 아쉬워요?”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뭔가 믿기지가 않아서……저, 그보다 민준 씨…”

“네?”

“잠, 잠시만 뒤돌아 계실래요? 저는 아직 옷을 다 못 입어서……”

“아-. 알겠어요.”

나는 유나의 부탁대로 유나가 옷을 갖춰 입을 때까지 뒤를 돌아주었다.

솔직히 어제 볼 거 다 보고 함께 쓰리 썸까지 조진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알몸을 보여주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게 이해해가진 않았지만, 이런 게 또 곱게 자란 유나의 매력이었으니 나는 적당히 맞춰주었다.

“이, 이제 됐어요.”

“네. 유나 씨……아, 속옷 같은 거 필요하면 옷장에 새것 많으니까 아무거나 입어도 돼요.”

“……연주 씨 옷인가요?”

“뭐, 그렇죠.”

“그럼-. 저는…안 입을래요.”

“씁-.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니까요?”

“알겠어요. 민준 씨.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유나의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나는 유나에게 다가가서 유나의 몸을 꼭 감싸 안아 주었다.

“저 지금 백화점 갈 건데, 가서 유나 씨 옷도 잔뜩 사서 옷장에다가 넣어 놓을게요.”

“정말요…?”

“네, 정말요.”

“히히-. 고마워요. 민준 씨.”

나는 그렇게 유나의 등을 토닥여주고 안방에서 나왔다. 유나는 이왕 늦은 거 씻고 가야겠다며 욕실로 향했는데, 연주처럼 자신의 옷도 이 집에 구비해 둔다고 한 뒤로 유나의 텐션은 엄청나게 높아져 있었다.

‘살 게 많겠네.’

나는 머릿속으로 살 것들을 정리하며 거실로 향했다. 일단 연주와 내가 쓸 컴퓨터가 두 대 필요했고, 유나를 위한 옷가지도 사야 했다. 거기다가 미현 누나가 사달라는 것들까지 사야 했으니 오늘 쇼핑은 강행군……이 아니라 어차피 백화점 직원들이 다 알아서 가져와 주겠구나. 역시 이래서 어디를 가든 일단 VIP부터 달고 봐야 했다.

“또 그러고 온 거예요? 무슨 홀복도 아니고.”

“미안해…이런 옷밖에 없어서…”

나는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미현 누나를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나는 옷이 정말 홀복밖에 없는지, 또 딱 달라붙는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특유의 초거유 때문에 반팔만 입어도 야해 보이는 사람이 야시시한 옷까지 입고 있으니까 농염해도 너무 농염했다. 집안에서는 상관없었지만, 저런 모습을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기는 싫었다.

그래도 기껏 준비하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옷이 너무 야하다고 집에 두고 가면 진심으로 상처받을 게 뻔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미현 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쯧. 가면 누나 옷부터 사야겠네.”

“으, 응. 고마워, 민준아.”

“됐어요. 내가 꼴 보기 싫어서 사주는 거니까.”

나는 어정쩡하게 내밀고 있는 누나의 손을 덥석 붙잡고 곧장 차고로 향했다. 누나를 보조석에 태워주고 운전석에 올라타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백화점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 것 같았다.

꽈아아앙-.

오랜만에 뻥 뚫린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었지만, 뚜껑은 열지 못했다. 누나의 초거유는 주위 남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강력한 블랙홀이나 다름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철통 보안을 유지하며 미현 누나와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백화점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차를 VIP 주차장을 향해 몰았다. 여느 때와 같이 수발을 들러 직원들이 다가왔고, 우리는 차를 맡기고 곧장 VIP 라운지로 향했다.

라운지로 가는 길에 지나치는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미현 누나의 미드로 향하는 시선을 참는 게 느껴졌는데, 전부 여자라서 딱히 거슬리는 건 없었다.

‘이거 내가 잘 못 생각했네.’

나는 미현 누나에게 내린 섣부른 평가를 고쳐야만 했다. 누나의 미드는 비단 남자뿐이 아니라, 남녀 상관없이 모든 시선을 끌어당기는 초대형 블랙홀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VVIP 라운지에 들어가자 대낮부터 팔자 좋게 쇼핑하러 온 사모님 무리가 두 팀 정도 보였다.

유독 젊은 나와 미현 누나에게 사모님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는데,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느냐면.

-어머 저 앙큼한 년 봐라? 저 음탕한 젖으로 금수저 총각을 꼬셨나 보네?

-패션 꼬라지 하고는. 어디 업소년이 이런 곳을 오지? 수준 떨어져!

이런 느낌이었다. 단지 시선에서 전해지는 느낌일 뿐이었지만, 워낙 시선이 강렬해서 그 안에 담긴 뜻을 읽어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꽈악-.

미현 누나 역시 돈 많은 사모님들 특유의 경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그 비 맞은 생쥐 같은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울컥거리는 게 올라왔다.

‘하-. 쓰벌. 해보자 이거지?’

젊고 아름다운 미현 누나가 늙은 괴물들에게 역겨운 시선을 받고 기가 죽어야 할 이유는, 오로지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 때문이었다. 싸 보이는 업소녀 패션 때문에 저런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억울했지만 여기서 왜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냐며 난리를 쳤다간 나만 미친놈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누나는 실제로 업소녀 출신이었으니 사실 할 말은 없었다. 그러니 말 대신, 돈으로 보여주면 될 뿐이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나는 라운지에 입장하면 기본적으로 나오는 음료나 다과도 거절한 채, 곧바로 쇼핑에 들어갔다. 기가 팍 죽어있는 누나를 쇼핑룸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던 쇼퍼에게 단단하게 일렀다.

“이 사람 입힐 건데 이 백화점에서 제일 비싼 명품들만 보여주세요. 시계나 주얼리 같은 것도 전부요. 아, 대신 가슴 사이즈는 주의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나의 주문에 쇼핑룸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미현 누나는 내 발언에 깜짝 놀라 내 팔뚝을 부여 붙잡으며 나를 말렸지만, 누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건 누나가 아니라, 나와 밖에 있는 늙고 추악한 괴물들의 경제력 싸움이었다.

‘각오하쇼. 아지매들.’

명품을 둘둘 두른다고 무조건 귀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이 있었다. 어정쩡하게 돈을 쓰면 명품 도배였지만, 돈을 쏟아부으면 걸어 다니는 명품관이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천만 원 선에서 온몸을 명품으로 도배한다면, 오히려 싼 티가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만 원이 아니라 억 단위로 액수가 늘어나면 도저히 귀티가 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지갑에는 사실상 한도가 없었다. 내 자존심 값이라면 10억, 100억도 아깝지 않았다.

“지금 제일 비싼 것들로만 갖고 오시는 거 맞죠?”

“네, 그럼요. 고객님!”

“그럼 그냥 대충 입혀보고 몸에 맞는 건 다 주세요. 제일 예쁜 옷만 입고 갈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배송해주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폭풍 같은 쇼핑이었다. 나는 돈으로 윽박지르며 직원들이 빠릿빠릿 일할 수 있도록 채찍질했다. 일꾼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쇼핑룸을 넘어 라운지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대량구매를 해버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잘 어울리는 옷들과 액세서리만 골라 누나에게 입혔고, 미현 누나의 착장은 업소녀에서 공장 부인 느낌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누나, 이제 살만큼 샀으니까 라운지에서 커피나 마시고 오자.”

“잠시만…민, 민준아-!”

나는 어색해하는 누나의 손목을 끌고 다시 라운지로 향했다. 시간을 최대한 땅겨서 쇼핑한 보람이 있는지, 추악한 사모님 무리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위풍당당해진 미현 누나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머, 저거 이번 신상인데…?”

“저거 그거 아니야? 잡지에서 나왔던 한정판?”

“남자가 완전 금수저인가 보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게 다 얼마야…?”

“와…저년은 무슨 재주로……”

“딱 보면 몰라? 가슴이겠지, 뭐.”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였지만, 귀가 좋아서 너무나 잘 들렸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테이블에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였다.

늙고 추악한 무리들은 미현 누나를 질겅질겅 씹어댔지만, 그 안에는 분명 예쁜 데다가 남자까지 잘 물어버린 미현 누나에 대한 질투가 깊이 베여 있었다. 아까 홀복을 입고 있을 때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멸시하는 시선만을 보내왔던 거에 비하면 반응이 천지 차이였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민준아! 이거 너무 과해. 빨리 다 환불하라니까? 나한테 무슨 명품이야. 이런 거 부담스러워서 입지도 못해.”

“됐어. 누나가 우리 집에서 고생해서 사주는 선물이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그냥 입어.”

“……흑-.”

사실은 그냥 빡쳐서, 일명 ‘씨발 소비’를 한 느낌이 강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너무 멋이 없으니까 대충 둘러댔다. 그런데 이 멘트가 제대로 먹혔는지 미현 누나가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뭐야. 누나 울어? 뭐 이런 거로 울어. 울지 마. 뚝-.”

“아니-. 나 집에 이런 거 하나도 없단 말이야. 다 팔아서…다 팔아서 이제 하나도 없는 데에-. 흑…흐아아앙-.”

“아유. 진짜 궁상맞게.”

나는 재빨리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누나를 감싸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약하게 교주의 오오라까지 사용하니, 꺼이꺼이 울던 미현 누나가 이내 눈물을 그쳤다.

“끄읍-. 하아-. 고마워, 고마워. 민준아. 잘 입을게.”

“그래. 앞으로는 내가 사준 옷만 입고 다녀. 알겠지.”

“알게써어-…흑…”

“아니, 울지 좀 말고. 우리 아직 쇼핑 더 해야 해.”

“응. 미안. 누나…완전 궁상맞아서 미안해.”

“알면 됐고. 얼굴 나 봐봐. 눈물 자국 좀 닦게.”

나는 테이블에 있던 티슈를 고이 접어서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누나의 눈물 자국을 지워주었다. 자연스레 누나와 나의 몸이 밀착되었고, 미현 누나의 얼굴이 유독 벌겋게 물들었다.

‘어우. 역시 작업 치는데 선물 공세만 한 게 없지.’

최근에는 제대로 욕구도 풀어주지 않고 틈만 나면 수치스럽게 만들면서 계속 밀어내는 중이었는데, 명품 폭격을 통해 한 번에 쫙 당겨버리니까 미현 누나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열이 올라서 머리가 빙빙 돌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누나가 귀여워서, 나는 참지 못하고 누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먹여주었다.

몇억짜리 키스라서 그런지, 과연 달콤했다.

“츕-.”

“읍…! 으읍…! 민, 민준아…!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다들 쳐다보시잖아-.”

누나가 좋으면서도 괜히 틱틱대길레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쩔거야. VVIP인데.”

“야…!”

“자, 이제 다시 쇼핑하러 가자.”

“또…? 아직 다 안 샀어?”

“아직 한참 남았지. 가자.”

그렇게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 사야 할 게 꽤 많았지만 대부분 VIP층에서 해결할 수 있어서 그리 오래 걸리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아 참. 누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됐어. 옷을 그렇게 샀는데 여기서 뭘 더 사.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

“씁! 말대꾸하지 말고 사라고 하면 그냥 사세요. 아주머니.”

“아, 진짜! 아주머니라고 하지 말라고~!”

“으즈므니 르그 하즈믈르그~”

“야…!!”

짜악-!

깝죽거리다가 등짝을 한 대 맞긴 했지만, 결국 미현 누나가 사고 싶었던 것들까지 사고 난 뒤에야 쇼핑이 끝났다.

아주머니라고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미현 누나였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었는지, 누나는 식기류와 주방용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온갖 식기류와 주방용품을 쓸어 담았다. 사고 싶은 게 고작 예쁜 그릇 세트나 스테인리스 팬이라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행복해하는 미현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쇼핑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미현 누나를 먼저 내려주었다. 워낙 산 게 많았기 때문에, 배달오면 그대로 놔뒀다가 나중에 같이 정리하자고 말해놓긴 했지만 아마 미현 누나 성격상 어떻게든 알아서 다 정리해 놓을 것 같았다.

‘정말 현모양처 그 자체인데…남의 집 와이프라 문제지.’

슬슬 미현 누나를 본격적으로 집으로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남편과 통화하는 걸 엿들어보면, 지금도 그리 사이가 원만하진 않은 것 같았으니 그리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자, 이제 집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본격적으로 비지니스를 시작해볼까?’

나는 핸드폰을 들고 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밖에 있었는지, 유나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네. 민준 씨!

“퇴직한 거예요?”

-네. 인수인계 금방 끝내고 곧장 짐 정리하고 나왔어요!

모든 직장인의 꿈이 퇴직이라더니, 꿈을 이룬 유나의 목소리는 유독 활기차 보였다.

하지만 퇴직을 했음에도 유나는 쉴 수 없었다. 아니, 이제부터 더 열심히 일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능한 교주라서 교단을 키우려면 유능한 교인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는 무능하지만, 욕심은 가득했다. 세계 최대의 종교가 기독교가 아닌 무한금욕교가 되는 날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물론, 나는 시키기만 하고 일은 유나가 다 하겠지만.

‘뭐, 어쩌겠어. 그러니까 사이비지.’

나는 단지 속으로만, 유나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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