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91화
좋은 직장을 다니면 장점이 많겠지만, 꼭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근본 있는 대기업의 경우 서울 한복판에 본사가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골라서 건물을 세울 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치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교통체증은 좀 너무하지 싶었다.
퇴근 시간에 숭례문 광장을 지나가는 경험.
서울을 관통하는 수백 수천 대의 버스와, 온갖 자가용이 한데 뭉쳐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광란의 현장.
그 현장에 나왔있는 기분은 어떤가요. 특파원.
네 개좆같습니다. 제 앞에 있는 모든 차주에게 꺼지라고 단체 세뇌를 걸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신 나갈 것 같아. 정신 나갈 것 같아.’
정신이 혼미했다. 왜 모든 회사의 퇴근 시간은 비슷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업종별로 세분화를 한다든가 요일제를 시행하면 교통체증이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여자가 서울 시장이 된다면, 교인으로 만들어 세뇌를 시켜볼까…
‘후아. 후아-.’
공회전하는 엔진만큼이나 달궈진 내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의 카오스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고통에도 언젠가 끝은 있는 법. 나는 마침내 길을 뚫어내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계를 바라봤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왔구나.’
얼마 기다리지 않아 주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화려한 미녀가 람보 앞에 나타났다.
설영이 고풍스러운 동양화라면, 유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화 같은 그림체를 갖고 있었다.
화려하고 압도적인 미모로 사람들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여신 스타일이랄까.
하긴 귀하게 자란 공주님이었으니, 저런 여신 포스를 내뿜는 게 어색한 일을 아니었다.
“여기요. 유나 씨.”
나는 차에서 내려 유나를 맞이했다.
나를 발견하자, 하이힐을 신고 도도하게 걸어오던 유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꽃이 피는 순간, 서울 도심의 한 골목 전체가 환하게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저게 꽃이지, 저게 꽃이야.’
나는 넋 놓고 유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미모 클라스가 확실히 남달랐다.
사실 SSS급 인재를 대우해주기 위해서, 오는 길에 꽃을 한 송이 사온 상태였다. 그 꽃은 현재 뒤로 숨긴 내 왼쪽 손에 들려있었고.
유나야 워낙 귀하게 자랐으니 괜히 비싼 걸로 승부하지 말고, 전통적이면서도 임팩트 있는 꽃 선물을 해주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고른 꽃집에서 가장 예쁜 꽃보다 유나가 더 아름다웠다. 그래서 조금 주기가 망설여졌다.
-하. 이런 하찮은 것도 선물이라고. 제 얼굴이 더 예쁘거든요?
뭐, 아무리 실망해도 유나가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겠지만, 유나가 너무 예쁘니까 예쁜 걸 줘도 감흥이 있을까 싶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에게 5,000원짜리 문화 상품권을 지급하는 기분이랄까.
“…민준 씨?”
“아, 유나 씨.”
내가 또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유나가 내 앞에 바싹 다가왔다.
유나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뒤로 빼놓은 내 왼쪽 팔을 쳐다봤다.
“뭐 숨기고 있는 거에요?”
“아, 이거 꽃이요.”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말없이 꽃을 내밀어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정직하게 대답을 해버렸다. 덕분에 하나의 변수로서 작용할 수 있었던 서프라이즈 이벤트의 이점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꽃’이라는 단어를 들은 유나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네? 꽃이요? 제거에요?”
유나가 손가락을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나 씨 줄려고 사왔죠.”
“…근데 왜 안주세요?”
“유나 씨가 너무 예뻐서요.”
“네?”
“유나 씨가 꽃보다 훨씬 예뻐서 주기가 망설여지네요. 빌 게이츠한테 5,000원 짜리 문화 상품권을 주는 느낌이 든다고요. 아시겠어요?”
“읏……민준 씨이-.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런 말을 그렇게 크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부끄럽잖아요…”
의외였다.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으로 속마음을 뱉어버렸더니 유나는 오히려 좋아했다. 볼을 심하게 붉히며 몸을 베베 꼬았다.
‘오호라-.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뭐랄까, 깨달음을 하나 얻은 심정이었다. 갈고 닦은 멘트보다 이렇게 속마음을 뭉텅이처럼 툭툭 던지는 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는 거구나.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이런 거야 자신 있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대신 생각이 무척이나 많은 타입이었다.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걸 즐기고 하나의 사건만으로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을 추측해 보는 것도 취미라면 취미였다.
여하튼, 생각이 많아서 뇌에서 필터를 빼고 말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달까.
“지금도 줄까 말까 망설여지네요. 이런 허접한 꽃이 유나 씨한테 어울릴까 걱정돼서요. 받고 나서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절대요! 그럴 리는 없지만, 꽃이 아무리 못생겼어도 저는 엄청나게 기쁠 거예요. 왜냐면 민준 씨한테 받는 첫 선물이잖아요.”
“유나 씨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오히려 더 주기가 부담되네요. 그래도 드릴게요. 자-. 갑니다.”
스윽-.
나는 등 뒤에 숨겨놨던 꽃을 서서히 꺼내서, 유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나에게서 꽃을 받아드는 유나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환하게 웃는 유나에게서 뿜어지는 아우라가 내가 준 꽃의 존재감을 말끔히 씻어냈다. 내 눈에는 유나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꽃 네 이놈. 아름다움의 대명사 주제에 인간에게 비주얼로 완패하다니.
꽃도 유나도,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응~ 향도 좋다. 민준 씨 이거 너무 예뻐요. 그리고 아주 기뻐요. 저 태어나서 남자한테 꽃 선물 받은 거 처음이에요.”
“그래요? 하긴 유나 씨는 곱게 자라서…”
“아니! 곱게 자란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리고 저 나름 곱게 자란 아이들 중에서는 험하게 자란 편이거든요?”
“미안해요. 너무 로맨틱한 분위기가 되면 숨이 막히는 병이 있어서. 생각보다 유나 씨 반응이 좋아서 흥분하는 바람에 제가 실언을 했네요.”
“…아닛!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면…”
유나는 또 볼을 가득 붉히고, 동공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뭘까. 이건. 정말로 내 생각을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유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존잘남이 되어서 더욱 버프를 받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분명히 나는 말빨로 유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이쯤 되니 여자가 이런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유나가 특이한 취향이 아닌가 싶었다.
너무 교양있게만 자라서, 오히려 뇌 빼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던가. 음, 확실히 가능성이 있군.
“유나 씨. 이제 차에 타요.”
“네, 민준 씨.”
한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한 우리는 사이좋게 차에 올라탔다.
유나 같은 미녀를 대동한 채 최고급 스포츠카에 올라타는 느낌이란, 언제 느껴도 괜찮았다.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열망과 질투의 시선이 대단히 달콤했다.
“이게 내비게이션 맞죠? 제가 식당 주소 찍을게요. 민준 씨.”
유나는 차에 타기 전에 신발을 툭툭 털더니 부드럽게 문을 여닫고 보조석에 앉은 다음 능숙하게 안전 벨트를 매었다. 그다음 센터패시아에 달려있는 내비게이션에 척척 주소를 찍기 시작했다.
역시 운전을 해오던 유나라 그런지 시작부터 운전자를 배려하는 수준이 남달랐다. 보조석에 탄 사람의 표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벨트는 내가 매주고 싶었는데…’
구태여 보조석에 탄 여자친구 벨트 매어주는 것만큼 낯간지러운 행위가 없었다.
유나의 유능함은 물론 훌륭했지만, 때때로 낯간지러움을 즐기는 고상한 취미가 있는 나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었다.
나이는 꽤 있는 유나였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유학 다녀온 뒤에 곧장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이성 교제와 스킨쉽 부분에 있어서는 맹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벨트를 매어줬다면 아마 좋은 반응을 보여줬을 텐데. 아쉽다, 벨트.
“…저, 출발 안 해요. 민준 씨?”
“크흠. 아, 네. 출발해야죠.”
벨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나의 정신을 유나가 일깨웠다.
나는 민망한 상상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벨트를 메어주는 건 아슬아슬하게 매너 축에 들 정도로 나름 신사다운 행동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 반응이 좀 야시꾸리 해졌다.
“민준 씨.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야한 생각 안 했습니다. 가슴 훔쳐본 거 아니에요.”
“으음-. 그렇구나아-.”
깔끔한 해명에도 유나는 누가 봐도 미심쩍어하는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어렵지 않게 무시할 수 있었다. 이런 게 또 운전자의 특권 중 하나였다.
나는 운전자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전방을 주시하며 수시로 교통 상황을 체크했고, 덕분에 유나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오늘은 차가 많이 막히네요. 유나 씨.”
“아무래도 퇴근 시간이다 보니까…그나저나 정말 가슴 훔쳐본 거 아니죠?”
“네, 아닙니다.”
“치-.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네? 뭐라고요?”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의심스러운 성격인 줄 몰랐건만, 유나는 굳이 한 번 더 내가 던졌던 시선에 대해 물어왔다.
어림도 없지.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잡아뗐고,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대처에 유나는 궁시렁댈 뿐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지. 왜 삐진 느낌이지.’
분명히 완벽한 딜교였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런데 궁시렁대던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이는 유나에게서 어째서인지 살짝 삐진 느낌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행동의 이유를 따져보기보다는 지금 당장 유나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줄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남사스럽겠지만, 그 정도로 유나의 기분이 풀린다면 엄청난 이득이었다.
“사실은 아까 벨트 보고 있었어요. 유나 씨.”
“네? 벨트요?”
“네. 제가 유나 씨한테 매주고 싶었는데 유나 씨가 너무 능숙하게 매버려서 아쉽더라고요.”
“아…프하-. 흣…”
“왜 그러시죠?”
“프흐-. 흠. 흠. 그냥요. 민준 씨가 이런 귀여운 면도 있구나 싶어서요. 이럴 때는 또 스무 살 같네요.”
“이럴 때만? 다를 때는 어떤데요?”
“저보다 훨씬 어른 같아요.”
“…”
조금 충격적이었다. 유나는 곧 있으면 서른이었다. 대체 유나에게 나는 어떤 식으로 보이고 있는 걸까.
꼰대? 틀딱?
“아, 그만큼 믿음직하다는 거니까 절대 오해하시면 안 돼요?”
“휴-. 그러면 다행이고요.”
“푸흐흐. 민준 씨 오늘 좀…많이 귀여우시네요.”
“…’
나는 말문이 또 턱 막혀버렸다.
여자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는 게 부끄러운 거야 둘째치고, 이런 취급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다들 내 자지를 보고 괴물처럼 바라보기만 했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귀엽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너무 신선해서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도 애매했다. 다만, 유나가 내 자지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부우웅-.
우리는 소담 소담 얘기를 나누며 식당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었지만 아까 숭례문 쪽에서 지옥의 교통 체증을 겪어서 그런지, 길이 살짝 막혀도 여유로웠다. 어쩌면 옆에서 말을 받아주고 있는 유나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건 확실히 재밌는 일이었다. 손님으로서뿐만 아니라 남자친구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에게 배려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그녀였다. 뼛속 깊이 매너와 교양이 스며들어 가 있는 진정한 이 시대의 엘리트인 그녀가 매너와 교양 따위는 집어치우고 침대 위에서 거칠게 뒹굴 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궁금했다.
변태 같은 생각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남자는 다 변태였다. 그렇다면 성공한 변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었다.
끼이익-.
빌딩 숲 사이를 뚫고 들어가 주차장에 차를 파킹했다.
나는 유나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한강이 바로 앞에서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 창을 통해 바라보니, 지나다닐 때는 원수 같던 차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훌륭한 경치에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은은한 재즈 음악까지 더해지니 분위기가 확실히 대단했다. 여기서는 방귀를 뀌어도 로맨틱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무수한 커플들이 괜히 돈을 쏟아부어 가면서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는 이유가 있었다.
“분위기 좋네요.”
“그쵸? 저도 저번에 와봤을 때 너무 마음에 들어서…애인이 생기면 꼭 와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우야.”
갑자기 훅 들어온 유나의 사랑스러운 멘트에 내 볼이 다 빨개졌다.
분위기를 타서 그런가 반듯반듯한 유나 역시 어딘가 훨씬 몽글몽글해진 느낌이었다.
러블리 큐티. 뭐, 그런 느낌.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아. 네.”
숨 막히는 로맨틱 분위기에 쉼표를 찍어주는 건 언제나 웨이터였다.
나는 유나를 따라 적당히 식사 메뉴를 시켰다.
운전을 해야 했기에 술은 걸러야 했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이제 나에게 술이란 그저 기호 식품일 뿐이었다. 경험도 자신감도 충분히 쌓여서 취기의 도움을 받아 여자를 꼬셔야 할 만큼 부족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교주의 오오라나 선지자의 목소리에 비교하면 알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민준 씨. 이거 한 번 보시겠어요?”
“네?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