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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쓰는 밤의 황제-83화 (83/270)

〈 83화 〉 83화

“민준 씨는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일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자연스레 호텔 카페로 향했다. 식사 후 카페라는 정석 중의 정석 코스였다.

하지만 평범한 코스라고 해서 그 안에서 나눴던 우리의 대화까지 평범했던 건 아니었다.

-유나 씨는 취미가 어떻게 돼요?

조금 전 내가 던진 질문이었다. 인재 등용을 꼭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할 필요는 없었다. 내 전문 분야는 침대 위였고, 유나를 침대까지 데려가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취미를 아는 것이었다. 사실 굳이 취미가 아니어도 괜찮았지만, 누군가를 알아가는데 취미를 캐묻는 것만큼 만만한 게 없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뭘 하면서 살아왔는지 알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이란 게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동물이다 보니까 관심사는 대부분 비슷하기 마련이었고, 설령 겹치는 취미가 있지 않더라도 아는 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애초에 대부분의 취미활동이란 게 어떤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유나가 가진 취미란 하나같이 내가 생각하고 들어왔던 취미의 세계, 그 너머에 있었다.

-취미요? 요즘에는 일이 바빠서 즐길 시간이 없긴 한데, 저는 클레이 사격이나 승마를 좋아해요.

-아…. 굉장히 활동적인 편이시네요?

-그쵸? 그래서 부모님께 욕도 많이 들었어요. 미술관이나 가고 악기 연주나 하면 됐지 여자가 무슨 그렇게 험한 걸 하느냐고. 그래도 저는 몸을 쓰는 게 재밌더라고요. 아!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가끔 요트 세일링도 하곤 했는데, 그때도 참 재밌었던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 라는 대답이 정말 멋대가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사격이야 군대 가면 하긴 하겠지만, 여자 앞에서 군대 얘기를 꺼내는 건 나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요트는커녕 말조차 실물로는 한 두 번 봤을 뿐인 내가 어떻게 승마와 요트 세일링에 대해서 논하겠는가. 그저 당황한 티를 안내는 게 고작이었다.

유나와 이렇게 대화해 보면서 느낄 수 있던 건, 유나가 나를 자신과 동류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나를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약 유나가 나를 자신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유나는 나의 입장을 배려해서 자신의 취미마저 적당히 둘러댔을 것이다. 뭐, 미술관 구경이나 독서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개인 계좌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는 유나는 서슴없이 진짜 상류층만의 취미를 나에게 공개했고, 덕분에 알고 보면 졸부에 불과한 나는 유나의 뼈대 깊숙이 베여있는 유서 깊은 고급스러움에 억눌리는 중이었다.

“저, 민준 씨?”

“아. 취미요? 하하, 저도 요즘에는 바빠서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는데….”

상대방에게 취미를 물어봤으면 나의 취미도 공개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런 당연한 수순에 따라서 나온 유나의 질문에, 나는 마땅히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음…. 쓰릅-.”

나는 시켜놓은 커피 한 모금 느릿느릿 마시면서 시간을 10초 정도 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턱없이 시간이 부족했다.

‘취미…. 유나에게 말할만한 취미….’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게임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결코 부끄러운 취미는 아니었지만, 승마나 요트 세일링에 비하면 무게감이 너무 떨어졌다. 먼지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섹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건 그냥 미친놈이었다.

그런데 게임과 섹스를 빼면 나는 시체였다. 시체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고민하고 고민하던 나는 뻔뻔해지기로 결정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대게 그러하듯이.

“음…. 다양한 사람 만나는 게 취미라면 취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비어 있는 시간에는 꼭 사람들과 만나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특히나 유나 씨처럼 유능하신 분이랑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요.”

이게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이었다.

저렴한 취미는 꺼내놓기 부끄러웠다. 그러나 괜히 해보지도 않은 고급스러운 취미, 가령 승마나 골프 같은 걸 취미라고 했다가 유나와 말이 길게 이어지는 건 더 최악이었다.

견식이 대단하고 인생이 고급 그 자체인 유나라면, 내 뻥카쯤이야 대화 몇 합 나눠보면 금방 간파할 테니까.

차라리 어쩌다 벼락부자가 됐다고 먼저 스스럼없이 밝히는 게 낫지, 괜히 있는 척했다가 거짓말이 탄로 나면 그것만큼 볼썽사나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둘러댔다. 일단 사람을 만나는 걸 취미라고 할 수 있는지 자체가 굉장히 애매했다. 하지만 유나의 성격상 그런 걸 따지고 들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취미를 소개하는 척 유나의 유능함을 한 번 더 강조해 주었다. 유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높아 보였으니까. 사람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것만큼 좋은 아부는 없었다. 그것도 호감 가는 이성에게 받는 아부라면 더욱 그렇겠지.

“흠흠. 취미를 여쭤봤는데 제 칭찬으로 돌아오니까 조금 부끄럽네요. 민준 씨.”

“부끄럽긴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어떻게 해서든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정도로 유나 씨가 탐난다고. 저는 빈말 절대 안 해요.”

“아…….”

나는 이미 ‘선지자의 목소리’를 켜놓은 상태였다. 다영이에게 실험했을 때도 그렇고, 이 선지자의 목소리라는 스킬은 쓰면 쓸수록 그 진가가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스킬 설명에는 단지 나의 말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 라고만 적혀 있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스킬을 써볼수록 사람들이 나에게 현혹되는 원리를 조금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가령 지금 내가 유나에게 내뱉은 ‘빈말은 절대 안 한다.’라는 말도, 사실 증명할 수 없는 공갈 립서비스 느낌이 강했다.

설령 내가 실제로 빈말을 안 한다고 해도 그건 유나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본다면 이런 립서비스는 걸러서 듣는 게 백번 옳았다.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온 유나가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었고.

하지만 유나는 지금 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세월의 파편과 단단한 이성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경계를 단숨에 꿰뚫고,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곧바로 내 말이 꽂혀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쉽게 현혹된다는 건 과연 이런 뜻이었다.

“정말…. 그런가 봐요. 민준 씨.”

“뭐가요?”

“민준 씨가 그런 말을 해주니까 하나도 빈말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데…. 단지 제 능력 때문인가요?”

“...네?”

“단지 제가 유능해서 그런 제의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셨던 건지……. 아, 아니에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내 사람’이라는 단어에 유독 꽂혔는지, 유나는 그 단어를 내뱉을 때 전에 없던 귀여운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꼭 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지 나에게 매달려오다가, 체면을 생각해서 뒤늦게 한 발을 빼는 그 모습은 치명적으로 귀여웠고, 또 고결했다.

유나가 원하는 답은 뭘까. 나는 생각했다.

내 사람이라는 긍정. 나에게 받는 인정. 그리고 여자로서의 호감을 받고 있다는 확인까지.

‘그래, 이 느낌이지.’

이쪽 분야로 오니까, 이제야 유나가 제대로 보였다. 유나의 겉부터 속 끝까지 모든 게 다 훤했다.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해야 뭐든 제대로 해내는 법이었다.

“음...그럼 유나 씨도 실언했으니까, 저도 하나 할게요. 괜찮죠?”

“네…?”

“귀엽네요. 유나 씨. 일 잘하고 외모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여운 모습까지 봐버리니까 더 놓치기 싫어졌어요.”

나는 유나가 듣기에 달콤한 말만 골라서 뱉어줬다.

뭐, 조금은 어설프고 오그라들지 몰라도 상관은 없었다. 부족한 부분은 내 사기적인 목소리가 알아서 채워줄 테니까.

“아.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제가 훨씬 연상인데…. 귀엽다고 하시는 건 조금…. 너무….”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실언이라고.”

“그런 건 실언이라고 하는 게….”

“너무 빡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요. 유나 씨. 저 이래 봬도 VVIP 고객인데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잖아요.”

“...이, 이럴 때 고객이라는 입장을 들먹이시는 건 좀 치사하네요. 김민준 고객님.”

“네? 그럼 지금 우리가 왜 만나고 있는 건데요? 이유나 뱅커님?”

“그거야…. 고객과 직원으로….”

“바로 그거네요.”

쓰릅-.

나는 말을 마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유나 앞에서 차마 평소 취향대로 이가 섞어버릴 정도로 달달한 음료를 시킬 수 없어서, 고민 끝에 골랐던 쓰디쓴 커피였다. 하지만 지금 내 혀에 감도는 커피의 향이 그리 쓰게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은 향기로웠다.

말싸움에 진 게 분한지 나를 묘하게 흘기고 있는 유나를 보고 있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나는 한참이나 진하게 웃음 지으며 유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장난스레 나를 흘기던 유나의 눈빛 역시 계속된 아이 컨택에 이미 촉촉해진 뒤였다.

“저는요. 유나 씨 모든 게 마음에 들어요. 아, 집안 문제는 빼고요. 솔직히 좀 골치 아프네요.”

“...어째서요?”

“어떻게든 유나 씨를 빼 와서 제 곁에 둬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미래의 장인어른께 찍힐 수도 있잖아요.”

“...못 지킬 말을 그렇게 쉽게 하면 나중에 벌 받을 걸요. 민준 씨.”

유나는 내 말을 가벼운 말장난으로 생각하는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하지만 내가 내뱉는 말 중에 가벼운 말 따위는 단 한 구절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선지자의 목소리를 켜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유나 씨,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뭐를요?”

“빈말 절대 안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절대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

나는 말을 마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유나와 다시 한 번 시선을 마주쳤다.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교주의 오오라까지 켜서 눈에다가 집중시키고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최고 출력의 눈빛으로 유나를 쳐다봤다.

내 뜨거운 시선에 유나가 단번에 녹아버릴 수 있도록, 숨이 잘 쉬어지질 않을 만큼의 열기를 눈빛을 통해 유나에게 전달했다.

“흐아….”

서로의 끈적한 시선이 끊어지지 않고 실타래처럼 엉켜 들었다. 우리는 눈빛만으로 진한 교감을 나누었다.

대화보다 더 확실했고, 육체적인 접촉보다 훨씬 농밀했다.

티끌도 남김없이 완전히 녹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유나와 시선을 계속 마주치며, 슬며시 입술을 움직였다.

말을 하되 하지 않는 것처럼. 끈적한 이 분위기에 아스라이 태워서 부드러운 음성을 유나에게 나려 보냈다.

“내 사람 되라는 말. 그거 실언 맞아요. 유나 씨.”

“네? 왜요…?”

“괜히 모호하게 말해서 유나 씨가 헷갈려 하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말할게요. 유나 씨-.”

“...”

나는 유나를 불러 놓고 한 템포를 끊었다.

이 간격. 말과 말이 잠시 쉬어가면서도 이어지는 이 미묘한 간격 안에서, 유나는 어떤 기분이 되어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유나에게 물었다.

이제는 유나의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유나 씨. 내 사람 말고, 내 여자 하는 건 어때요?”

“아, 아아...”

유나는 삼류 로맨스 드라마에 나올법한 구린 멘트에도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부끄러운지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깨닫는 거지만 유나를 포함해서 내가 사랑한 여자들을 하나같이 보살들이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고백받았다면 오그라든다고 뺨이라도 쳤을 텐데.

삼류라는 걸 인지하고는 있지만 멘트를 치는 실력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느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그 대신 침대에서는 일류니까 그럭저럭 반반은 하는 느낌이랄까.

“아, 으응...”

안 되겠다. 너무 오그라들어서 달라붙었는지, 유나의 입술이 영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아무래도 약간의 완급조절이 필요할 것 같았다.

“대답은 안 하시면 수락하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그냥 VVIP 고객이 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대답하기 부끄러울 테니까 제가 넘어갈 기회를 드릴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걸 묵시적 동의로 넘길 수 있는데요!”

“그럼 유나 씨가 명시적으로 표현해 주시던가요. 유나 씨, 내 여자 할래요?”

“아니….”

“싫어요?”

“아니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 좋아요?”

“...”

“봐봐. 유나 씨는 워낙 곱게 자라서 아마 이런 말 하기 무척이나 부끄러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할게요! 민준 씨 여자 하면 되잖아요!!”

“바로 그거네요.”

“으윽…!”

쓰륵-.

나는 얼떨결에 고백해 놓고 분해하는 유나를 보면서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여전히 커피는 향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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