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75화
“민…민준 씨!!”
“…연주 씨?”
차에서 기다리니까, 연주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연주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옷…옷 사신 거에요? 그…너, 너무 잘 어울려요!! 멋져요!!”
“…?”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연주는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차로 걸어오면 될 텐데, 대체 왜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소리를 지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였다. 진짜 이상한 건 연주의 옷차림이었다.
연주는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손에는 겨울에나 낄 법한 두꺼운 벙어리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파파라치를 의식하는 톱스타도 아니고, 옷가지로 온몸을 미라처럼 둘둘 감싸고 있는 게 영 수상했다.
“연주 씨. 이리로 와봐요. 저한테 가까이!”
나는 연주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연주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아으…그!! 그…그으…못 가요!! 민준 씨!! 다리가 아파요!!”
“그래요?! 그럼 제가 갈게요!”
“아으…!! 아…아니…!!”
운전석에서 내려서 연주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자, 연주는 대문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한 채 발을 동동 굴러댔다.
“으아…흐으…”
“연주 씨. 모자 벗어봐요.”
“네?! 모모모모, 모자요? 왜…왜요? 안…안 벗으면 안 될까요?”
연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으로 모자를 푹 눌러 내렸다. 모자를 벗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연주가 부탁하면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연주에게 무척이나 약했다. 평소에도 그랬고, 이번에는 더욱 그랬다.
벙어리장갑이 끼워진 양손으로 모자를 푹 누르고 있는 연주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으니까.
하지만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대체 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교주의 세뇌를 발동시키고 연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입고 있는 옷…아니, 일단 차로 따라와.”
“…”
턱-.
세뇌에 당한 연주는 멍하니 걸음을 옮겨서 차에 올라탔다. 나 역시 연주를 따라서 차에 올라탔다.
“어…? 민, 민준 씨?”
차에 올라탄 연주가 깜짝 놀랐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연주에게 다시 세뇌를 걸었다.
“입고 있는 옷 전부 벗어. 하나도 빼놓지 말고.”
“…”
연주는 세뇌를 받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했다.
꽈악-.
조금씩 드러나는 연주의 나신을 바라보다가, 나는 치밀어오는 분노 때문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화가 났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는 심각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네. 민준 씨.”
화가 났지만, 꾹꾹 눌러 내리고 연주를 심문했다.
화는 언제든지 낼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왜 연주가 이렇게 됐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머리는 왜 산발이지? 눈은 왜 그렇게 퉁퉁 부어있고.”
“집에서 계속 울었어요. 민준 씨 가고 지금까지 울기만 했어요. 펑펑 울면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어요.”
“…손톱도 스스로 물어뜯은 건가? 팔뚝에 나 있는 자국도 혼자서 쥐어뜯은 거고?”
“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민준 씨가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니까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뭐…? 왜,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난 너한테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민준 씨가 저를 싫어한다고. 이미 저한테 정떨어졌다고…죽고 싶었어요. 민준 씨가 먼저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으면 정말로…”
“나한테 전화해서 엄마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봤으면 됐잖아! 하다못해 엄마의 말을 믿지 말라고 변명이라도 하던가.”
“그러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민준 씨랑 통화하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로 민준 씨가 저를 싫어할까 봐. 민준 씨한테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올까 봐. 그래서 전화 못 했어요.”
빠아아앙—!!!
듣다 듣다 화가 나서 핸들을 강하게 내리쳤다. 빵빵거리는 소리를 싫어했지만,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
“후우…”
한 번 힘을 쏟아내고 나니까 정신이 좀 맑아졌다. 안에 있는 화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옷 다시 입고, 안전 밸트 매. 그리고 내가 깨울 때까지 한숨 자고 있어.”
“네. 민준 씨.”
연주는 내가 시킨 대로 다시 옷을 입고 안전 벨트를 매더니, 꾸벅꾸벅 졸다가 곧장 잠들었다. 계속 울기만 했다는 연주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꾸욱-.
나는 악셀을 밝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시원하게 도로 위를 달렸지만,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연주가 멍청하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연주는 내 예상보다 더 멍청했다. 그리고 순진했다.
유리 멘탈이라는 것 따위 연주를 보는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깨지지 않도록 따듯하게 보듬어 줬다.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연주가 좋아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해줬고, 좋아한다고 대놓고 티를 냈다. 그렇게 해서 연주를 손에 넣었다.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잠시 관심을 놓은 사이에 한설영의 가벼운 이간질에 홀라당 넘어가서, 연주는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다. 나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만약 소름 돋는 예감에 연주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연주는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저런 뻔한 속임수에…후우.’
내 입장에서야 눈에 뻔히 보이는 이간질이었지만, 연주는 바보였다.
계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나한테 먼저 전화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방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하는 바보.
‘울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인데…아휴, 씨발.’
나는 조금 전에 봤던 연주의 나신을 떠올려보다가 머리를 털어냈다.
머리는 얼마나 헝클었는지 완전히 산발이었다. 손톱은 하도 깨물어서 전부 다 깨져 있었다.
그리고 울면서 팔뚝까지 쥐어뜯었는지, 팔뚝에 보기 싫은 상처들이 가득 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처들보다도 더욱 보기 싫었던 건, 피골이 상접해진 연주의 몰골이었다.
아침에 연주를 집에다가 데려다주고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만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연주의 몰골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정말 온종일 울기만 했는지, 젖살이 남아있던 귀여운 볼은 홀쭉해져 있었고, 생기가 가득했던 눈동자는 무척이나 흐릿해져 있었다.
“하,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어쩔 수 없네. 이제부터는 내가 데리고 살아야겠다.”
귀염둥이 연주가 피폐해지는 꼴은 두 번 다시 보기 싫었다.
세뇌를 통해서 연주의 멘탈을 강화해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연주를 이대로 납치해서 새로 산 집에서 같이 살기로 결정했다.
연주의 의사는 아직 몰랐지만,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다.
끼익-.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이 많이 정리돼서 그런지, 끓어오르던 속도 많이 진정이 되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차고에 차를 주차해놓고, 연주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연주 씨, 다 왔어요. 일어나 봐요.”
“아웅…에…? 민, 민준 씨! 여…여기 어디에요?”
“저희 집이에요.”
“민…민준 씨 집이요?!”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비몽사몽 하던 연주가, 내 집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휙휙 돌렸다.
“가요. 연주 씨. 집 구경시켜줄게요.”
“네, 네에. 민준 씨.”
나는 차에서 내려, 차고를 열심히 둘러보던 연주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했다.
두꺼운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연주는 여전히 내 손을 잡는 걸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다.
띠잉-.
차고에는 집 안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연주에게 간단하게 집 구경을 시켜주었다. 연주는 미술관에 데이트라도 온 것처럼 내 옆에 딱 붙어서 관심 있게 집을 둘러봤다.
뭐, 앞으로 연주가 살게 될 집이었으니, 알아놔서 나쁠 건 없었다.
‘미현 누나는 아직 기절해 있나 보네. 다행이다.’
집구경을 시켜주면서 미현 누나가 기절해있는 방을 몰래 살펴봤는데, 미현 누나는 그대로 기절해 있었다.
내일 점심쯤에나 일어날 것처럼 완전히 뻗어있어서, 연주와 무슨 짓을 벌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연주 씨. 그런데 있잖아요.”
“네?! 왜, 왜왜왜요? 민…민준 씨?!”
현재 연주와 나는, 안방에 딸린 드레스룸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연주는 장롱을 슬쩍 열어보고 있었는데, 무슨 응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대답을 하는 모습이 꽤 당황스러워 보였다.
“지금 저녁이잖아요.”
“네, 저…저녁이에요.”
“그리고 실내에 있는데, 선글라스는 안 벗을 거에요?”
“아응…으으…그…그게…”
“장갑이랑 모자도 쓸 필요 없는 거 아닌가?”
“그…그렇긴 한데요. 민준 씨…그…그게 있잖아요…”
집 구경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슬슬 연주를 압박했다.
세뇌를 하면 순식간에 나신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세뇌를 당한 게 아닌 일반적인 상태에서의 연주의 반응이 궁금했다.
나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지, 아니면 숨기고 또 숨길지.
“저한테 얼굴 보여주기 싫은 거에요?”
“아으…!! 아, 아니요!! 이건…그러니까…제가 너무 못생겨서… 지금, 지금 완전 무례해요. 얼굴이…실례라서 민준 씨한테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오…”
나의 압박에도 연주의 태도는 꽤 고집스러웠다.
연주의 완강한 방어를 뚫기 위해, 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발동시켰다.
“얼굴 보고 싶은데 정말로 안 보여 줄 거에요?”
“아으… 우으…”
“연주 씨, 저는 제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해요. 알고 있어요?”
“벗, 벗을게요!! 민, 민준 씨!!”
말을 잘 듣는 걸 좋아한다는 한마디에, 끈질기게 버티던 연주는 곧바로 선글라스 등을 벗어서 바닥 한 쪽에 내려놨다.
나는 굳은 얼굴로 연주의 민낯을 쳐다봤다.
“눈이 왜 그렇게 통통 부었어요? 머리는 왜 그렇게 헝클어졌는데요?”
“우으으…”
“손톱은 또 뭐야? 왜 다 깨져있지?”
“그, 그게요. 민준 씨…”
내 분위기가 무척이나 살벌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연주는 온몸이 잔뜩 움츠린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후우…전부 다 벗어. 속옷까지 전부.”
“아응…민, 민준씨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하으…네에…”
연주는 잠시 망설이더니, 옷을 전부 벗어서 다시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몸을 움츠리고 양팔을 교차시켜서, 상처가 나 있는 팔뚝을 가리려고 애를 썼다.
상처가 잔뜩 나있는 가녀린 몸으로 그러고 있으니까, 학대받은 성노예같아 보였다.
“…”
나는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연주의 나신을 가만히 쳐다봤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으니까, 내 눈빛을 받고 오들오들 떨고 있던 연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민, 민준 씨…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그…그게… 민, 민준 씨가 저 때문에 많이 화…화난 것 같아서어…”
연주는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다가 연주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말해.”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그냥 사고였어요. 죄, 죄송해요. 민준 씨. 제…제가 다 잘 못 했어요. 잘, 잘 못 했어요. 민준 씨.”
이렇게까지 압박했는데도 끝까지 숨기려 드는 연주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교주의 세뇌를 쓰고 연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평점심을 잃고 마구 흔들리던 연주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차라리 그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왜 나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거지?”
“……민준 씨가 엄마를 싫어할까 봐요. 민준 씨랑 엄마랑 나눈 얘기를 제가 민준 씨한테 해버리면, 엄마가 곤란해질까 봐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연주는 한설영은 배려하고 있었다.
호구 같은 것도 정도가 있었다.
“엄마 때문에 그렇게 된건데도, 엄마를 배려한다고? 매일매일 엄마가 너를 괴롭힌다고 하지 않았나?”
“엄마니까요. 저한테는 민준 씨랑 가족밖에 없어요. 너무 소중해요. 민준 씨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지만, 그래도 부모님도 소중해요.”
“…으휴, 씨발.”
답답해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게 연주의 매력이긴 하지만, 적당히 손볼 필요는 있어 보였다.
이렇게 내버려두다가는, 독사 같은 한설영에게 이간질당해서 언젠가 심하게 자해를 해버릴지도 몰랐다.
“절대 자해 하지 마. 평생, 무슨 일이 있어도.”
“…”
“그리고 무조건 나를 신뢰해. 나 이외의 어떤 사람보다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해.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면, 너는 의심할 필요 없이 믿는 거야. 알겠지?”
“…”
[86] -> [31]
[세뇌를 적용하시겠습니까?]
평생 적용되는 세뇌라서 그런지 코스트가 상당했다.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힐링버튼이자 SSS급 교인인 연주였다. 이 정도 케어는 당연히 해줄 수 있었다.
“아으…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민준 씨.”
세뇌가 끝났는지, 연주가 다시 연신 사죄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연주에게 다가가서 연주를 왈칵 끌어안았다.
“읏…!”
“저는 연주 씨가 좋아요. 알고 있죠?”
“흐윽…!! 네에! 알고 있어요. 저, 저도 민준 씨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요. 그럼 됐어요.”
“네. 끄읍, 흐윽…민준 씨…고마워요…끕, 끄윽……고마워요. 민준 씨.”
연주는 내 품에 안겨서 또 눈물을 흘렸다. 집에서 하루종일 울었다면서, 눈물샘이 마르지도 않는지 내 옷이 다 젖을 만큼 펑펑.
입으로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내뱉었는데, 뭐가 그렇게 고마운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감히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나는 연주가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교주의 오오라를 키고, 연주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크게 들썩이던 연주의 어깨가 점차 잠잠해져 갔다.
“끄읍…흐아…민, 민준 씨. 죄송해요. 옷, 옷이 다 젖었어요.”
“이제 좀 괜찮아요?”
“네에…민, 민준 씨 품에 안겨 있으니까…괜찮아요.”
“좋네요. 연주 씨, 일단 우리 좀 씻어요. 씻고 연고 발라줄게요.”
“민…민준 씨가요?!”
“네, 제가요. 제가 직접 발라줄게요.”
“아으…아우으으…민, 민준 씨가…직접…헤응…”
연고를 발라준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연주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졌다.
이제야 진짜, 연주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