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67화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죄송은 니미~ 닥치고 물어내. 사장 부르든 네 시급에서 까 든 물어내라고. 이 개 같은 년아!”
개저씨는 걸쭉한 욕을 쉬지 않고 뱉어댔고, 알바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흐미, 오늘 스트레스 특집인가? 말로만 듣던 개저씨를 하필 이 타이밍에 만나네.’
백화점까지 힘들게 도착해서, 잠깐 카페에 들렀다가 인터넷 진상 썰에서나 볼법한 개저씨를 직관하게 될 줄이야. 이런 게 인생의 묘미였다. 엿 같은 일은 약속이라도 한 듯 꼭 한 번에 몰려왔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그거 음료수 뜨거워요?”
개저씨를 직관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여자 손님한테 다가가서 말을 걸었고,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개저씨를 직관에 열중하고 있던 손님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네? 왜…왜요? 방금 나온 거라 뜨겁긴 한데…”
“좋네요. 그거 저한테 파세요. 10만 원 드릴게요.”
“…?”
여자 손님 웬 또라이를 다 보겠다는 듯 쳐다봤다.
나는 말없이 지갑에서 오만 원 짜리 두 장을 꺼내 들어서 테이블에 올려놨다. 여자 손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헤엑?”
“됐죠. 이거 제가 산 겁니다.”
“아, 네. 네.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가 물리기라도 할까 봐 급하게 감사인사까지 전했다.
나는 손님에게서 구매한 커피를 한 잔 들고, 여유롭게 개저씨가 알바생을 쥐 잡듯이 잡고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모든 손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으로 제 발로 걸어가는 게, 마치 로마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는 검투사가 된 기분이었다.
턱-.
일단 사건 현장에 난입해서 테이블에 턱. 하고 커피를 내려놨다.
갑자기 걸어온 나를 경계하던 개저씨가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넌 또 뭐야? 알바년 애인이야?!”
“아저씨. 가디건 백만 원 주고 샀다고 그랬죠?”
“그래!! 방금 명품관에서 사 온 백만 원짜리 가디건이라고!! 그래서 뭐!! 네가 저년 대신 물어줄 거야?”
“그래요. 제가 물어드릴게요. 대신 진상 그만 부리고 카페에서 당장 꺼지는 걸로. 콜?”
“…뭐? 진상? 허…”
기가 차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는 개저씨였지만, 그래도 물어준다니 일단 얌전해졌다.
나는 개저씨를 뻔히 보다가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세한 은행 본점에 들렀을 때 혹시 몰라 지갑에다가 몇 장 챙겨 놨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다.
“…”
내 지갑에서 진짜 백만 원이 나오자,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아저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아니, 얌전한 걸 넘어서 훤해졌다.
마치 횡재라도 한 것처럼 기뻐 보이는 걸 보면, 백만 원이라던 가디건이 사실은 몇십만 원짜리인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정가가 백만 원이고 할인을 왕창 받아서 샀다던가.
하지만 나는 굳이 티 내지 않고 테이블 위에다 아저씨가 가져가기 좋게 수표를 얌전히 내려놨다.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나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스트레스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정도 돈이야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자. 가져가세요. 그리고 빨리 꺼지세요.”
“크흠. 꺼지다니. 젊은이가 입이 좀 걸걸하구먼. 허허. 그래도 물어줬으니 내 넘어감세.”
“엠병하네…”
“크흠…”
돈을 꺼내놨더니 말투가 더 역겹게 바뀌는 개저씨를 보고, 순간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개저씨는 분명 내 욕설을 듣고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수표를 향해 손만 뻗어왔다.
알바생한테는 그렇게 지랄을 하더니 수표 앞에서는 상당히 조신한 타입이었다.
스으윽-. 턱.
자칭 백만 원짜리 가디건이 걸쳐진 개저씨의 팔이 뱀처럼 요사스럽게 테이블을 향해 기어오더니 수표를 턱. 하고 잡아챘다.
나는 때를 기다리다가, 여자 손님에게서 사 왔던 커피 컵을 툭 하고 밀어버렸다.
컵이 쓰러지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던 뜨거운 커피가 수표를 잡으러 온 아저씨의 손을 향해 쏟아졌다.
백만 원짜리 수표와 함께, 아저씨의 손이 커피로 푹 젖어버렸다.
“아아악!!!!”
“헤엑-. 아, 아아…!”
나는 가만히 있었고, 아저씨는 뜨거운 커피에 데인 자기 손을 잡고 요란을 피워댔으며, 알바생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수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침음성을 흘렸다.
“크윽!! 야이 새끼야!!! 너 뭐하는 거야!!! 일부러 쏟았지 이 개새끼야!!”
“그런 거 아닌데요? 커피 마시려다가…제가 수전증이 좀 있어서. 아저씨가 잘 좀 피하지 그랬어요. 어유, 손 빨간 거 봐. 아프겠네. 허허.”
“이 씨발 새끼야!!!”
쉬이이익-.
허공을 가르는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해서 아저씨를 똑바로 바라봤다. 내 훌륭한 넉살에 환장해버린 아저씨가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오고 있었다.
‘드디어 첫 실전인가?’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원래라면 무서웠겠지만, 솔직히 신체 강화를 하고 나서부터는 언젠가 꼭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왜냐고? 비록 평생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지 않았다고 해도, 도저히 질 자신이 없었으니까. 몸이 가벼워서 얼마든지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몇백억을 쏟아부은 피지컬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턱-.
나는 날아오는 아저씨의 주먹을 가볍게 붙잡았다. 동작이 너무 느려서 어렵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케치볼 수준이었다.
우지끈.
“아아아악!! 아악!!!!!”
호두를 으깨듯 힘을 줘서 아저씨의 주먹을 으깨버렸다.
아저씨는 날려도 하필 커피 때문에 살가죽이 붉어져 있는 쪽의 주먹을 날려서 더욱더 아파했다.
턱. 턱.
아저씨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가 머그컵을 깨트린 바로 그 자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뾰족한 컵 조각이 정강이에 박힌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알바생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도 나름대로 대걸레질을 해놔서 그런지, 아직 닦지 못한 음료 말고는 크게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아아악!!!!”
나는 아쉬운 마음에 아저씨의 주먹을 더 쎄게 으깼다.
바지가 젖는 수준이 아니라, 큰 거 한 방을 노렸었는데 아쉽게도 불발이 나버렸다.
“거기!!! 그만두세요!!! 더 이상 움직이시면 지금 당장 경찰 부르겠습니다!!”
우르르르.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리더니,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 한 명과 백화점 보안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진상 손님을 보고 누가 신고를 했나본데, 타이밍이 영 안 좋았다.
그들은 나를 강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개저씨가 아니라 내가 진상 손님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분 손 놓으세요. 손 놓고 가만히 계세요. 안 그러면 일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니는 시키는 대로 손을 놓았다. 일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나도 없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았다.
“크윽!! 왜 이제 와!! 나 여기 VIP야!!! VIP 고객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데 왜 이제야 오냐고!!!”
“죄송합니다. 손님. 자세한 사정은 따로 자리를 옮겨서 듣겠습니다.”
“들을 게 뭐가 있어!! 이 개새끼가 나 폭행했다고!!!”
개저씨가 고삐 풀린 치와와처럼 방방 날뛰었다.
“아…아니에요!! 저 아저씨가 먼저 진상 부렸어요!! 이 손님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네…?”
“저 여기 알바생이에요. 저 아저씨가 저한테 욕도 엄청 하고, 아저씨가 손님분한테 주먹도 먼저 휘둘렀어요! CCTV 돌려보시면 다 나올 거에요!”
일이 흥미롭게 돌아갔다. 알바생이 중요한 타이밍에 나를 커버 치러 들어와 준 덕분에 사내들의 난입으로 얼어붙었던 카페 안의 분위기가 풀려버렸고, 손님들의 증언도 속속들이 터져 나왔다.
백화점 안에 있는 카페라 그런지 아줌마 손님들이 많았는데, 한 번 기세를 탄 아줌마들의 지원 사격은 상당히 든든했다.
“CCTV 볼 거 없어요. 제가 동영상으로 다 찍어 놨으니까!”
“아저씨!! 진상 부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피해자래!!!”
“저 잘생긴 총각은 잘 못 하나도 없어! 나도 동영상 찍어놨으니까 한 번 봐봐요!!”
모두가 나를 옹호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백화점 관계자들의 눈빛에서 점점 나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졌고, 그 경계심과 적대심은 고스란히 진상 아저씨에게 이어졌다.
“이…이것들이! 뭘 그렇게 쳐다봐!! 나는 피해자야!! 나 여기 VIP야!!”
“손님, 가서 얘기하시죠. 정말로 피해자가 맞으시다면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를 보면서 얘기를 하던 양복 사내가 나를 돌아봤다.
“그쪽 손님께서도 동석해주시겠습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뭐, 그러죠.”
귀찮았지만 안 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 협조 안 하면 바로 경찰을 부를 텐데, 그러면 더 귀찮았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나설 때부터 이 정도 귀찮음은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
‘아저씨 주먹도 아작내고, 가디건부터 바지까지 쫄딱 젖게 만들었는데, 적어도 백화점에 협조는 해줘야지.’
****
양복 사내에 약속대로, 사건 조사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CCTV부터 휴대폰 동영상까지, 명확한 증거가 너무 많았다. 끝까지 진상을 부리던 아저씨는 보안팀에 끌려갔다.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고 나를 고객 대기실 같은 곳에 데려와 앉힌 양복 사내가,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양복 사내는 자신을 카페가 있던 층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플로어 매니저라고 소개했는데, 일 처리가 시원시원한 게 꽤 높은 자리인 것 같았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뭘요. 그 진상 아저씨는 어떻게 될까요?”
“네. 백화점 법무팀에 사건을 인계하여 적절한 법적 처벌을 받게끔 할 예정입니다.”
“좋네요.”
“손님,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인적 사항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소정의 상품권과 함께 저희 백화점 VIP로 등록해 드리려고 합니다.”
풀로어 매니저가 정중하게 물어왔다. 나는 순순히 내 인적사항을 불러줬다.
상품권하고 VIP 대우가 탐나지는 않았지만, 너무 정중하게 물어와서 거절하기도 좀 애매했다.
“어?! 손님, 실례지만 혹시 세한 프리미어 더 블랙 에디션 카드를 소유하고 계시는지요?”
컴퓨터에다가 손수 내가 불러주는 정보를 받아 적고 있던 풀로어 매니저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물어왔다.
“네. 갖고 있는데요.”
“허어…혹시 카드를 발급받으시고 저희 백화점에 처음 들리시는 건가요?’
“네. 그런데요?”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장 VVIP 담당자를 불러오겠습니다.”
플로어 매니저가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태까지 차분하던 사내의 분위기가, 카드 얘기가 나올 때부터는 꽤나 호들갑스러웠다.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인가?’
세한 프리이머 더 블랙 에디션 카드.
이름도 더럽게 긴 이 카드는, 세한은행 본점에 들렀을 때 발급받았던 카드였다.
내가 발급을 원한 게 아니라, 내 전담 프라이빗 뱅커가 VVIP면 받는 거라고 건네줬었다.
카드를 건네받을 때 뱅커가 카드 혜택에 대해서 설명을 줄줄이 해줬지만, 제대로 듣지는 않았다. 어차피 찾아다니면서 카드 헤택 받을 시간에 섹스를 한판이라도 더 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카드를 들고 백화점에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끼익-.
문이 열리더니 또 멀끔한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중년 남성은 90도로 인사하는 플로어 매니저의 인사를 대충 받더니,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고객님, 당장 트리니티 라운지로 모시겠습니다.”
“트리니티요?”
“아, 저희 백화점에서 VVIP 고객님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저희 백화점에서는 연간 매출 상위 500명의 고객님들과 특별한 심사에 따라 트리니티로 선정된 고객님들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한 블랙 카드 소유하고 계신 고객님께서는 저희 백화점 트리니티 등급 VVIP이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 남성을 따라갔다.
같이 걷는 동안 중년 남성은 트리니티 등급의 혜택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전용 라운지부터, 퍼스널 쇼퍼가 붙어서 1대1로 쇼핑을 도와주고, 백화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직원들이 직접 차로 옮겨주며, 기념일에는 선물 증정 등등.
설명은 쉬웠지만, 워낙 뭐가 많아서 다 기억하기는 힘들었다. 뭐, 결론은 VVIP, 그 중에서도 트리니티 등급이 되면 엄청나게 좋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터넷이 낫지 않을까?’
혜택이 많다는 건 잘 알아들었다. 그러나 결국 백화점에 직접 와야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백화점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집에 누워서 하는 인터넷 쇼핑이 더 쾌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띠딕-.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백화점 최상층으로 올라가니 트리니티 계급만 쓸 수 있다는 트리니티 라운지가 보였다.
시키는 대로 지갑에서 블랙 카드를 꺼내서 보안 시스템에다가 대니까 거대한 자동문이 양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허허…존나 럭셔리하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