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59화
“연주 씨가 제게…거짓말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사실은 연주가 아니라, 어머니가 연주 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계셨다니…"
그녀의 검고 역겨운 속내가 훤히 보였지만, 짐짓 그녀의 얘기에 충격 받은 척을 하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받아쳤다.
“연주의 입장에서는 거짓말…이 아닐지도 몰라. 연주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거든. 내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아빠를 뺏어간…창녀라고. 그러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연주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겠지.”
“허어…”
그녀는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 그 자체였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는데, 백미 터쯤 떨어져서 봐도 아픔과 서러움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분위기는 절절했다.
‘장모님은 연기자를 했어야겠는데?’
비주얼에 연기력까지 완벽했다.
그녀의 농익은 표현력에는 감탄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흐윽…끄윽…”
“아…이런…어머니…”
연주 얘기를 힘겹게 털어놓던 그녀는 기어이 울기 시작했다.
완전히 목 놓아 우는 게 아니고 꾹꾹 참아내려 노력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기했다. 생김새답게 감정선마저 세련되고 우아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찬스인가?’
그녀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건, 단지 내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연기로 꺼내오는 서러움마저 진심으로 달래줄 수 있었다.
그녀의 검고 간악한 속마음마저, 나는 달래줄 수 있었다.
‘장모님, 사위 손이 얼마나 따듯한지 한 번 느껴보시죠.’
나는 우는 여자를 옆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부자연스럽게 한쪽 팔을 들었다.
그리고는 신의 손을 키고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녀에게 따듯한 감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토닥. 토닥.
“흐윽…끄흑, 흡…”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손놀림은 아니었다. 어정쩡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이러든 저러든 신의 손이었다. 그녀의 등을 살포시 두드려줄 때마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하아…후우…미…미안해요. 민준 군. 내가 못난 모습을 보여서…”
“…어머니가 연주 씨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셔서…제가 다 혼란스럽네요. 연주 씨가 그런 사람일 줄 전혀 몰랐거든요…제가 어떻게 해야할지…뭘 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 얘기를 한 건…연주와 헤어지라거나…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단지 연주가 민준 군한테 과하게 집착하고 주변을 힘들게 할까 봐 미리 알려 주려고 한 거지. 그리고 민준 군이 연주를 더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도와줬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한 거에요. 그게 전부야.”
“네에…”
나는 일부러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얘기를 듣고도 변함없이 처음처럼 연주를 보듬어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먄약 내가 설영의 검은 속내를 몰랐다면 말이다.
설영은 굳어진 내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나는 설영의 시선을 무시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긴 척을 하다가, 문득 설영을 바라봤다.
“아…제가 좀 딴생각을…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니에요. 생각이 많겠지. 비록 엄마지만, 연주의 그런 모습까지 사랑해 달라고는…못하겠네요. 그건 민준 군의 선택일 뿐이야.”
“…”
“어쨌든…처음 보는 아줌마 얘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요. 등 두드려 준 것도…손 되게 따듯하더라…아,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민준 군. 아줌마, 주책이었지?”
그녀는 능숙했다.
의도적으로 뱉은 맨트를 실수로 위장하는 솜씨가 미친 듯이 완벽했다. 속마음을 꺼내서 약간은 당황한 듯 붉어진 볼과 어리숙해진 말투까지. 노련하기 그지없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용기 내서 연주 씨에 대해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등은 함부로 두드려서 죄송합니다. 너무 서럽게 우시기에…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몸을 돌려서 그녀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녀가 받아줄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기다렸더니,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유난히 차갑고,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간질거렸다.
-쓰윽. 쓰윽.
“예의 발라서 좋네…됐으니까 일어나요.”
“아…아. 네에.”
나는 붉어진 얼굴로 숙였던 고개를 일으켰다.
이번엔 일부러 붉힌 게 아니라 진짜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사려 깊은 장모님 포지션을 취한 채 나에게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오는 설영이 움직임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든지 더 능동적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능숙한 연극에 호흡만 잘 맞춰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먼저 나에게 다가올 생각이 가득했으니까.
이런 가증스러운 여자에게 작업 당해보는 건 처음이라서 무척이나 재밌었다.
“나…이제 내릴게요. 민준 군.”
“아…잠시만요.”
나는 얼른 내려서, 설영이 내릴 수 있도록 차 문을 열어주었다. 잡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줄까 했지만, 벌써부터 손을 주기엔 조금 아까웠다.
설영이라는 여자는 워낙 맛있어서 아껴 먹고 싶었다.
턱-.
차에서 내려선 설영이 나를 묘하게 쳐다봤다. 나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조금 피하면서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머니.”
“…그래요. 민준 군도 조심히 가요. 아, 다음에 내가 하는 카페에 들러요. 연주 남자친구한테는 잘해줄 수 있으니까.”
끼익-.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차에 타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설영과의 줄다리기는 생각할 게 상당히 많았다.
행동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그녀의 입맛에 맞춰주는 건, 어렵다기 보다는 조금 피곤했다.
“뭐, 그만큼 재밌긴 하지만.”
단지 따먹기만 할 거였다면 신의 손으로 발정 나게 해서 따먹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젊은 새엄마와 딸래미 남자친구라는 오묘한 관계에서 오는 느낌과 꼴림 포인트를 놓칠 수 없었다.
“아, 은행 가야지.”
설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다가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지금 가면 예약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한설영. 피아니스트. 35살. 주부. 청담동 카페 사장. 회장 사모님.
그녀를 정의하는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녀를 만족시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탄탄대로를 달렸다. 탐나는 건 모두 가졌다.
피아니스트로서 빛나는 커리어를 쌓다가, 손가락이 굳을 때쯤 나이는 좀 많지만, 적당히 자상하고 돈이 대단히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이었지만 마음은 공허했다. 왜 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뭐…할 말 있니?”
민준을 보내고 집 안으로 들어온 설영이, 거실 쇼파에 앉아있는 연주를 보며 말했다.
한참 전에 먼저 집에 들어가 놓고, 아직까지 거실에 앉아 있는 거로 봐서는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민…민준 씨한테 무…무슨 말 했어요?”
연주는 두려워하면서도 설영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런 연주를 보고 있는 설영의 입매가 뒤틀렸다.
“남자 친구 좀 생겼다고 엄마한테 바로 대드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운 거니? 돌아간 네 친모가 알려주고 떠난 거야?”
“말…말 돌리지 마요. 친엄마 얘기도…하…하지 마세요. 저…저는 민준 씨한테 무슨 말 하셨는지 묻…묻고 있는 거예요.”
설영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평소의 연주는 이러지 않았다. 독한 말로 조금 쏘아주면 아파서 울먹거릴 뿐이었다.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눈물이나 뚝뚝 흘릴 뿐이었다.
연주는 모자란 년이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고작 남편한테 사랑을 못 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동정하는 모자라고 하찮은 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에다 팔아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죽여버리고 싶었다. 단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저 괴롭히는 것 정도로 봐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멍청한 년이,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렸다.
“내가 너한테 왜 그런 말을 해줘야 하지?”
설영은 가라앉은 목소리와 눈빛으로 자신의 분노를 감춤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연주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설영에게 맞섰다.
자기 자신보다 중요한 게 생긴 사람은 강해지는 법이었다.
“어…엄마가 저에 대해서 안…안 좋게 얘기하고 다니는 거 다…다 알아요. 그…그래도 아빠한테 얘기 안 했어요. 엄…엄마가 불쌍하니까!”
설영은 깜짝 놀랐다. 이 모자란 년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가증스러웠다.
“불쌍? 나중에 나를 협박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이 가증스러운 년. 착한 척은 혼자 다하면서 속은 더럽기 짝이 없구나. 정말.”
“아…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어…어쨌든 민준 씨한테만은 안…안 돼요! 민…민준 씨는 안 돼요! 제…제발요. 다른 사람은 다 괜찮아요. 그…그래도 민준 씨한테는 안 좋은 얘기 하지 말…말아 주세요. 끄읍…제발요…”
명령조로 얘기하던 연주가 설영에게 빌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설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연주 또한 알고 있었다.
연주는 설영에게 꾸준히 괴롭힘을 당하면서 철저한 무기력함에 빠져버린 지 오래였다.
엄마만 나타나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으니까.
그나마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욕을 뱉으며 떠나갔으니까.
소심한 성격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을 사귀기는 게 어려웠다.
그러니 사람을 잃은 뒤에 마음이, 더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연주는 혼자서 지내고 있었다. 외로웠지만, 잃는 게 더 무서웠다. 잃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혼자 지낼 수밖에 없어서, 혼자 지냈다.
그런데 그때 자신에게 기적처럼 불쑥 다가와 준 사람이 바로 김민준이었다.
카페에서 해줬던 칭찬들, 앞을 막아줬던 믿음직한 등,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따스한 손까지.
연주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대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엄마한테 당당하게 맞서는 그 모습까지도.
민준과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행복했다.
민준은 자신의 모든 걸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마저 잃으면 진짜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엄마한테 대든 건, 용기가 나서가 아니었다. 간절해서였다.
“어쩌지? 이미 그 남자한테 네년 시커먼 속을 전부 다 알려줬는데…놀라서 굳어지는 얼굴을 보니까 좀 안쓰럽더라.”
“아으……아…아니야아….”
간절함에마저 배신당한 연주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민준을 믿었지만, 자신은 믿지 못했다. 지금까지 엄마에게 맞서서 지켜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지 뺏기고 망가졌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떨어진다고 하더라. 그런 여자인 줄 몰랐다고.”
“거…거짓말…거…거짓말이야…”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네 남자친구랑 만나서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니? 나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구나.”
“거…거짓말!!! 거짓말!!!!!!!!”
“허. 미친 년.”
설영은 연주가 알아서 무너지도록 놔두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건방진 년…감히 누구한테 대들어?”
방에 들어와서도 그녀의 분노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남편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건 그래도 참을만했다. 자신도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동정받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연주처럼 덜떨어진 년한테 동정을 받을 때면, 찬란하게 빛나던 자신의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닥 말고 지하가 또 있었다.
연주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남자는 잘 홀리는 년이었다. 그런 화냥년이 어디서 제대로 된 남자를 물어 와서 기세등등하게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미니까 기분이 완전 최악이었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한테 그 잘난 남자 친구 뺏긴 다음에도 그렇게 대들 수 있는지 궁금하네.”
설영은 잠시 화장대에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 아직 괜찮은 미모였다.
젊은 남자한테도 충분히 먹힐만했다. 자화자찬이 아니었다.
차 안에서 자신이 조금만 터치하고 다가가도, 민준은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단순히 여자친구 어머니라서 어려워하는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그 젊은 남자는, 잘난 수컷은, 분명 자신을 `여자`로써 의식하고 있었다.
“하아…”
젊고 잘생겼다. 그리고 성격도, 능력도 좋았다. 맞춤옷처럼 자신의 입맛에 딱 맞았다.
어렸지만, 자신의 나이에서 생각하면 거의 핏덩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멋진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자신을 여자로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암컷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족히 몇 년 동안은 식어있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스윽-.
설영은 손을 뒤로 돌려서 민준이 두드려주었던 등허리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젊은 남자의 손길은 깜짝 놀랄 정도로 특별했다.
`엄청…따듯했어…그 남자의 손…`
가지고 싶었다.
그 젊은 남자를 가지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 연주같은 년한테는 아까워. 차라리…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