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플쓰는 밤의 황제-58화 (58/270)

〈 58화 〉 58화

설영의 앞에서 펼쳐진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연주가 새된 소리를 내뱉으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잠시 연주를 보다가 다시 설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연주 씨도 저랑 같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해하고요. 저는 연주 씨한테 돈도 사랑도 행복도 전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시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니.”

나는 설영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가 일으켰다. 그리고는 설영을 보면서 시원하게 웃어줬다.

긴장감 넘쳤던 우리 사이의 공기가, 내가 먼저 한 발 빼니까 조금씩 가벼워졌다.

젊은이의 패기부터, 먼저 양보할 줄 아는 노련함까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다해서 완벽함을 연기했다.

예비 장모님한테 하는 것치고는 좀 많이 패기롭긴 했지만, 일반적인 장모님이 아니라 나중에 나와 함께할 여자에게라면 이 정도가 적당했다.

처음부터 너무 지고 들어가면 나중에 나를 휘두르려 할지도 몰랐다.

‘이런 게 거리 조절이거든.’

설영의 앞에서 연주를 과할 정도로 아끼면서 질투를 유발하되, 싸가지는 좀 없지만 그래서 한 번쯤은 가져보고 싶은 젊은 남자의 패기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이의 풋풋한 모습이 유부녀의 식어버린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설영이 연주에게 더 극심한 질투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성공이었다.

설영은 묘한 표정으로 내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서 내게 안겨있는 연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연주를 바라보는 설영의 표정은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연주야. 먼저 들어가렴. 아무래도 네 애인하고 조금 더 대화를 나눠야겠구나.”

“시…시시….싫어요오….”

“…뭐?”

“민, 민준 씨랑 같이 있을래요.”

“하.”

연주에 반항에 단지 차갑기만 하던 설영의 표정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그럴만하지. 지금까지 연주는 자기 앞에서 쪽도 못쓰는 순한 강아지였을 텐데…낑낑대는 것도 힘들어하던 강아지가 자기편 생겼다고 곧장 이빨을 들이미는 꼴인데, 나라도 화나지.’

화 날만 하다고 해서 연주에게 화를 내는 게 정당하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설영이 화를 내는 것 자체는 나에게 좋은 신호였다.

화가 가라앉으면 왜 화가 났었는지 생각하게 될 테고, 그러면서 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떠올릴 테니까.

‘내가 문제의 핵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나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설영이 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돈으로 접근하기에는 내가 돈이 너무 많았다.

예비 장모님이라는 직위로 찍어누른다고 눌리는 놈이 아니라는 건 이미 보여줬다.

‘그럼 뻔하지 뭐.’

그녀에게 남은 방법은 연주를 행복하게 놔두던가, 아니면 연주와 나 둘 중의 하나를 죽이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녹슬지 않은 유부녀의 몸으로 나를 꼬시는 것밖에는 없었다.

정말 극단적이었지만 파고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그것 세 가지뿐이었다.

‘놔두거나, 죽이거나, 꼬시거나.’

나는 설영의 선택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엿보기 위해서, 여기서는 연주가 자리를 피해줘야 했다.

“연주 씨, 우선 어머니 말씀 들어요. 어차피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잖아요.”

“아으…아응…시…시러요! 민…민준 씨 먼저 가면 들어갈래요. 조…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요…안…안 돼요?”

또 연주의 필살기가 나왔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부탁하는 연주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서 정말 웬만하면 연주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혹시 네 새 엄마가 눈깔 돌아서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건 확인해야지.

“그럼 그렇게 해요. 대신 지금 들어가면 뽀뽀해 줄게요.”

“…뽀…뽀뽀…”

“네. 볼에다가 말고 입술에다가.”

“아으…흐응…입…입술 뽀뽀…해…해주세요.”

“집으로 들어갈 거죠?”

“우으…네…네에…그럴게요오…”

쪼오오옥-.

연주의 입술에 뽀뽀를 길게 박아주었다.

뽀뽀치고는 꽤 진했는데, 당연히 앞에서 보고 있는 설영을 저격한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스러운 연출이었다.

“…”

질투. 질투로 이글이글 거리는 그녀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입술 근처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작전이 먹혀들자 흥이 났다. 나는 기분이다 하고 뽀뽀를 하다 말고, 바로 키스를 박아버렸다.

쪼옥-. 춥. 쭈웁-.

“으음…! 흡…!”

아무리 그래도 엄마 앞에서 키스를 하는 건 남사스러웠는지, 연주는 내가 입술을 강하게 빨자 놀라서 나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내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키스를 갈기자, 곧 내 입술에 취해버렸는지 연주의 혀가 내 입술을 향해 먼저 넘어오기 시작했다.

쭈웁--. 쭈우웁--. 츕--.

“하읍…으음…흐으응…헤으…”

우리가 자기 앞에서 딥키스를 나누는 대도 설영은 자존심 때문인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설영을 놀리듯이 더 격하게 연주에게 키스를 해주다가, 연주가 숨 막혀 할 때쯤에야 입술을 떼주었다.

“헤으…하앙…흐에으…”

“착하죠. 연주 씨. 이제 어서 들어가요.”

“흐응…하아….네…네에…”

연주는 엄청나게 아쉬운 얼굴을 하고 발걸음을 옮겨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딥키스 때문에 제대로 발정이 났을 테니, 어쩌면 연주는 집에 들어가서 인생 첫 자위를 시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후우…젊어서 좋겠네. 부러워.”

“…뭘요. 어머님도 젊으신 대요. 저는 영락없이 연주 씨 누님이신 줄 알았어요. 하하.”

방금 전까지 연주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살벌하게 쳐다보고 있던 설영이, 마치 딴 사람처럼 잔뜩 풀어진 톤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설영의 분위기에 맞춰주기 위해서 잔뜩 너스레를 떨었다. 뭐, 누나인 줄 알았다는 말은 아주 조금도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후우…민준 군. 우리 연주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쑥스러운데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내 앞에서 키스도 해놓고 이러기야?”

설영은 장난스레 나를 흘기며 말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풀린 설영은 완전히 딴 사람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하…. 음…. 딱히 어느 한 군데가 좋다기보단, 그냥 연주 씨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연주 씨가 어떤 여자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주 씨를 좋아합니다…. 아, 이거 표현하기가 좀 어렵네요.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는 없으니까요.”

“음…그래. 그렇지 사람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으니까…그래도 다행이네. 연주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이제는 좀 좋아지겠지…”

‘뭐지…?’

연주가 있을 때보다 한층 가벼워 보이던 설영의 태도가, 갑자기 아련아련해졌다. 나는 짱구를 열심히 굴렸다.

그녀가 원하고 있는 포지션이 뭔지 알아야 그에 따른 대응이 가능했다.

‘일단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고…그냥 놔두는 쪽인가? 그건 좀 찝찝한데’

그리스 로마 신화로 치면 설영은 헤라였다.

질투의 화신인 그녀가 연주가 행복하게 놔둔다는 선택지를 이리도 쉽게 선택할 리가 없었다.

내가 추측하고 있는 그녀라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연주를 괴롭혀야 했다. 카페 사건을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인재였다.

‘죽인다와 놔둔다가 재껴졌으니, 남은 건 꼬신 다인데….’

설영의 저 아련한 태도와 나를 꼬신다는 결정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지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위해 우선 설영의 말을 받았다.

“어머니…. 그 하실 말씀이라는 게….”

“…여기서 말하기는 그렇고…잠깐…차에 타서 얘기해도 되려나?”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 죽여서 내게 말해왔다. 나는 의뭉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타시죠.”

덜컥-.

설영을 보조석에 태우고 나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의 문이 탁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설영의 입이 열렸다.

설령의 목소리는 곧 부서지기라도 할 사람처럼 가련하고 아련했다.

“이미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나 연주 새엄마예요. 친엄마가 아니야…”

“네. 그 얘기는 연주 씨한테 들었습니다.”

“연주한테 어디까지 들었는데요? 내가 연주를 괴롭힌다는 것도…들었나?”

“…그렇습니다.”

“아……. 그래…이미 들었으면…어쩔 수 없지.”

“어머님…죄송하지만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아, 아니에요. 붙잡아서 미안해요. 민준 군.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 우리 연주…잘 부탁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여기서는 잡아야겠지? 아무것도 안 하고 내릴 거라면 이렇게까지 떡밥을 뿌릴 필요는 없으니까.’

이건 그녀가 잡으라고 던져놓은 미끼였다.

그녀의 의중을 알아봐야 했으니,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턱-.

나는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의 손목을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어머니…! 잠…잠시만…!”

“허. 민준 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이렇게 여자 손목 덜컥 잡는 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요?”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시늉을 하다 말고 나를 째려봤다.

나는 당황했다는 듯이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고는, 그녀에게 곧장 사과를 건넸다.

“크흠…. 죄송합니다.”

나는 사과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김미현의 웅장한 가슴을 떠올리며, 일부러 볼을 조금 붉게 만들었다.

그녀를 한결 더 과감하게 만들기 위한, 순진한 척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내 불안한 시선 처리와 붉어진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놀리는듯한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보란 듯이 키스는 잘만 하더니…겨우 손목 잡은 거로 부끄러워하네?”

“그…그건 여자친구니까…여하튼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번만 용서해줄게요.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요?”

“네, 잘 못 했습니다.”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냥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연주가…정말 남자 잘 골랐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연주랑은 대체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 겁니까?”

“…”

“왜 어머니 얼굴이 연주 씨 얘기만 나오면 어두워지는 건지…알고 싶습니다. 연주 씨 남자 친구로서 알아야 할 자격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고요.”

“눈치도 빠르네…연주가 폭 빠질 만해…”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설영이 워낙 많은 힌트를 주고 있어서 이걸 못 알아채면 병신인 수준이었다.

나는 힌트는 충분하니 이제 답을 알려달라고 설영을 재촉했다.

“부디 말씀해 주세요. 어머니. 연주한테…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요?”

“…”

그녀는 나를 보며 고민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니까 말하기 어려운 거야…엄마가 되어서 연주 뒷애기나 하는 것 같아서…”

“단순한 뒷애기가 아니라, 알아야 할 얘기니까 어머니가 저를 따로 부른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아…그래요, 그럼. 민준 군…연주가 집착이 심하다는 건 알죠?”

“네…어느 정도는…”

“민준 군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야. 연주는…아빠한테 집착이 너무 심해서…새엄마인 나를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이 집에 올 때부터 연주가…꾸준하게 날 괴롭혔지. 아마 못 믿겠지만…이해해요. 나도 당해보기 전에는 연주가 그런 아이인 줄 정말 몰랐으니까.”

“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유레카를 외치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의 생각이 뭔지 읽을 수 있었다.

‘동정심 유발. 그리고 이간질. 정혜한테 써먹었던 방법 그대로 가려는 건가?’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긴 했다. 내가 한 번 간파했던 방법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없다는 건, 이미 어제 있었던 연주와의 술자리에서 확인을 마쳤다.

그녀의 연기는 대단히 훌륭했지만, 연기인 걸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떡밥을 뿌리는 타이밍이라던가 말투부터 시선 처리까지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연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시나리오가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그걸 풀어놓는 실력의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잘 꾸며내는 작자가, 도둑 고양이 타령이나 하는 연주한테 괴롭힘을 당할 리 없었다.

아마 그녀를 연주보다 먼저 만났거나 내가 조금만 더 어리숙했다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과 그녀의 완벽한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갔겠지만, 알고서 들어가는 판에 당해줄 만큼 지금의 나는 호구가 아니었다.

호구를 잡아먹는 사냥꾼이면 몰라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연주 씨 말로는, 어머니께서 연주 씨에게 폭언을 내뱉는다고….”

“아까도 봤겠지만, 나 연주한테 강하게 나가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엄하게 대해. 그렇게 해서 연주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 줬으면 해서. 그렇다고 폭언은 절대 아니지만…”

그녀는 곧 죽을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웠지만, 무척이나 가증스러웠다.

연주와 처음 저녁을 먹을 때, 옆에 사람이 없다니까 곧장 연주에게 폭언을 내뱉던 그녀의 살벌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여기서는 차라리, 가끔은 너무 미워서 안 좋은 말도 한다고 털어놨으면 내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신뢰했을지도 몰랐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