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53화
-지이잉. 지이잉.
도로가 꽉 차 있어서 어차피 기어가야 했으니 운전에는 신경을 놔버리고, 음흉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여자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그…민…민준 씨!!”
내가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쌔끈녀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연주는 집에 불이라도 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낚싯대를 던지자마자 입질이 온 셈이었는데 충분히 그럴만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연주의 시선은 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가 어딜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는 게 이상했다.
“아, 깜짝아. 왜요?”
“꼭…꼭 여기서 술 마셔야 해요? 다른 데서…다른 데서 마셔요. 네?”
“제가 연주 씨랑 가려고 봐둔 가게가 여기 있어요. 거기 요즘 되게 핫하데요. 잠시만 기다려봐요. 연주 씨.”
“아으…으…그…그래도오…”
연주가 뭐라 뭐라 하는 게 들렸지만 가볍게 씹어주고, 다시 스포츠카 몰고 다니면서 지나가는 여자 다리 대놓고 바라보는 젊고 음흉한 양아치에 빙의했다.
“와……”
“아우…아우우…민…민준씨이…”
“허어……네? 왜요, 연주 씨?”
“아으…민준씨이…가…가게 멀었어요? 아직…아직도 다 안 왔어요?”
“좀 더 가야 해요. 거의 다 왔어요. 잠깐이면 돼요.”
연주에겐 미안하지만 애초에 정해진 가게 따위는 없었다.
상대적으로 헐벗은 누나들이 많이 보이는 곳을 향해 유유자적 차를 몰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게 가다 보니 정말로 핫한 가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저기네요.”
적당해 보이는 술집이 있었다. 나는 차를 몰아서 술집 주차장으로 향했다.
1층에 지상 주차장과 매장 입구가 동시에 있는 형태였는데,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중에 헐벗은 누나들이 대단히 많아서, 이 가게라면 연주의 인내심을 끊어놓기 딱 좋을 것 같았다.
꽈아아앙—.
폭력적인 배기음이 들려오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패션 너무 훌륭하고…’
나에게 시선을 보내오는 누나들을 한 명씩 스캔했다. 일단 바지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미니 스커트 아니면 미니 드레스였는데, 어찌나 짧은지 팬티가 안 보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그그그그…그…그…민준 씨이…민준 씨이!!”
“잠시만요, 연주 씨. 주차 좀 할게요.”
꼬리에 불이 붙은 강아지처럼 날뛰는 연주를 싹 무시한 채,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보조석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어줬는데 연주는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래요. 연주 씨?”
“아으으…그으…여기!! 여기 분위기 별로…랄까? 느낌이…느낌이 안 좋아요. 다…다른 가게로 가는 건…어때요?”
연주는 나를 보며 말하면서도, 양손으로 차량 시트를 꽉 붙잡고 있었다. 절대로 이 가게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독한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연주가 아무리 독해 봤자 연주였다. 전투력이 제로에 수렴하는 연주가, 최근 쓰레기 짓에 물이 제대로 오른 나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쉽네요. 연주 씨.”
“네…?”
“연주 씨랑 꼭 가보고 싶었는데…후우…하는 수 없죠. 다른 데로…”
“아아아아니!! 아니요!! 가요!! 가고 싶어요!! 여기 가요!!”
“그럴까요? 연주 씨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었어요?”
“그, 그렇지 않아요! 제가…제가 잘못 말했어요!”
나는 방긋 웃고 연주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손을 건네주었다.
언제 차량 시트를 쥐어 잡고 있었냐는 듯, 연주는 빠르게 내 손을 잡고 차에서 풀쩍 뛰어 내렸다.
나는 그대로 연주와 손을 잡고 맨 뒤로 가서 나란히 줄을 섰는데, 마침 우리 앞에는 과감하게 헐벗은 두 명의 이쁜이가 서 있었다.
한 명은 등이 U자 형태로 파진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얼마나 깊고 넓게 파여 있는지 날개뼈부터 척추 부근까지 전부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엉밑살이 찝혀 있는 게 보일 정도로 짧은 숏팬츠에, 허리부터 갈비뼈까지 전부 보이는 과감한 크롭티를 입고 있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앞에 있던 그녀들도 은근히 나를 신경 쓰고 있었는지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우으으…민…민준 씨!!”
와락-.
내가 다른 여자들을 보고 있는 게 불편했는지, 갑자기 연주가 나에게 와락 안겨왔다.
자기만 봐달라는 귀엽고 처절한 애교였지만, 오늘은 연주의 애교를 받아줄 수 없었다.
나는 연주를 안아주면서도 앞에 있는 헐벗녀들과 은근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내가 연주를 껴안고 있는데도, 그녀들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뜨거운 눈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 앙큼한 년들 좀 보게? 이런 상황에서 저런 눈빛을 보낸다고?’
정신 나간 여자들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몰카라지만 저 헐벗녀들은 리얼이었다. 헐벗녀들은 연주를 껴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심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설마…이런 게 섹스럭키가이의 힘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백화점에서 만나 곧바로 섹스를 조져버렸던 혜미의 경우도 그렇고, 비일상적인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섹스에 관련된 쪽으로만.
“민준 씨…민준 씨…”
“…”
“우으…아으…민…민준 씨…저…저 좀 봐주세요…”
“…”
“저…저 여깄어요…민준 씨이…저…여기…여기 있어요…히끅…끄읍…끄윽…”
“아, 미안해요. 연주 씨. 울지 마요.”
“그…그치만 민준 씨가…끅…민준 씨가아…흐아앙…”
‘나는야 섹스럭키가이’에 대해 생각하느라 넋 놓고 있었는데, 연주가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오해하라고 데려온 거긴 하지만…아직은 울만 한 타이밍이 아닌데.’
오늘 안에 연주를 울릴지도 몰랐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술을 먹고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연주가, 오늘 내내 나 때문에 쌓이고 쌓였던 극한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지켜보는 게 이 설계의 핵심이었는데, 벌써부터 울어버리면 곤란했다.
토닥. 토닥.
연주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연주의 가녀린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충격을 받았는지 연주는 좀처럼 진정을 하지 못했다. 내 품 안에 안겨 있는 연주의 가녀린 몸이 덜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의 손, 그중에서도 약손을 키고 연주의 등을 두드렸다.
스트레스도 스트레스지만 일단은 연주를 가라앉혀서 술자리까지 데려가는 게 더 중요했다.
“끄윽…흐읍…으으…”
“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
“우으…네에…고마워요…민준 씨…”
“아까는 잠깐 딴생각 하느라 연주 씨한테 신경을 못 썼어요. 미안해요.”
“그…무…무슨 생각을…하셨는지…물어봐도 될까요오…”
질문을 하는 연주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극도로 불안해하면서도, 내가 뭘 그렇게 멍하니 생각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연주를 내려다보며 잠깐 아련하게 웃어주고는 말했다.
“그냥 엄마 생각이요. 연주 씨 손잡고 있으니까, 어렸을 때 엄마 손잡고 있었을 때가 잠깐 생각나서요.”
“아…”
“가끔 생각나요. 지금은 돌아가셨거든요.”
“아…아…아아…죄죄죄…죄송해요…! 죄송해요, 민준 씨!”
“아니에요. 이미 오래 지나서…아, 우리 차례인데 들어갈까요?”
“네에!! 들어가요! 빨리 들어가요!”
나는 그렇게 죽은 엄마 찬스를 한번 써서 위기를 한 번 넘기고 술집 안으로 무사히 입장했다.
미친 불효자였지만 괜찮았다. 내가 이렇게 큰 건 어렸을 때 나를 버린 엄마 때문이었다.
심각한 애정결핍에다가 여자를 지배하려고 안달 나 있는 것도 전부, 엄마가 나를 버렸을 때부터 굴러온 스노우 볼의 효과였다.
“두 분이시죠?”
“네.”
“테이블 안내 도와드릴게요~”
우리는 붐비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직원을 따라 걸어갔다.
직원이 우리에게 안내해준 테이블은 두 명이 쓰기에도 좀 비좁았고, 옆 테이블과의 간격도 거의 없었다.
사실상 옆 테이블과 합석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옆 테이블 손님이 아까 봤던 헐벗녀들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헐벗녀들은 내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서로 귓속말을 하며 응큼하게 웃더니, 연주는 싹 무시한 채 나에게 대단히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왔다.
심지어 내가 ‘잠깐 화장실 가서 섹스할래요?’라고 추잡하게 물어봐도, 헐벗녀들은 냉큼 고개를 끄덕거릴 것 같았다. 그만큼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쌩까고 연주에게 집중했다. 헐벗녀들은 연주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위해 필요하긴 했지만, 아직 타이밍이 아니었다.
‘분위기 좀 보고 들어와라. 이 앙큼한 것들을 진짜 어떡하지?’
헐벗녀들의 대쉬를 조금이라도 받아주면, 연주가 그 즉시 울어버릴 게 분명했다.
나는 연주가 어쩔 줄을 몰라 우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펑펑 울더라도 술을 먹고 취한 다음에 울어야 했다.
연주가 꽐라가 돼서도, 단지 우는 것으로만 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낼지 아니면 다른 액션을 취할지 지켜 봐야 했는데, 헐벗녀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무조건 직진밖에 몰랐다.
“연주 씨. 술은 뭐 마실래요?”
“아…저는…민준 씨가 마시는 거로…”
“알겠어요.”
띵동-. 띵동띵똥-.
벨을 누르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나는 안주를 종류별로 골고루 시키고 소주를 한 병 부탁했다.
조금 있으니 안주가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잔에 가다 소주를 따라서 연주에게 건넸다. 조심스럽게 술잔을 받아드는 연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연주는 소주잔을 들고 향을 킁킁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딱 봐도 소주를 처음 마시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연주의 표정을 못 본 척, 내 술잔도 채운 다음에 연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반강제적인 건배 제의였고, 연주는 벌벌 떨면서도 나와 잔을 부딪쳤다.
짠-.
나는 짠을 한 다음에 망설임 없이 소주를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연주 역시 분위기를 타서 얼떨결에 잔을 비워냈다.
“크흐~”
“후으…”
“…연주 씨, 술 잘 마시네요?”
“에…? 네…네에…그…그런가 봐요. 맛…맛없는 물맛이네요…”
연주는 캐릭터와 다르게 술을 꽤 하는 것 같았다.
소주 한잔을 원샷 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나는 술을 싫어했지만 마시긴 잘 마셨다.
원래도 소주 두 병은 너끈히 마실 정도로 알콜 해독 능력이 좋았는데, 신체 강화를 통해 간이 더 좋아져서 이제는 몇 병이 한계인지도 쉽게 측정할 수 없었다.
미현 누나와 포차에 갔을 때도 술을 꽤 많이 마셨지만, 알딸딸한 느낌조차 들지 않았었다.
짠-. 짠-. 짠-.
우리는 연신 술잔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술잔을 내밀었지만, 서로 한 병쯤 마셨을 때부터 연주가 먼저 잔을 부딪쳐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연주의 주량은 소주 한 병인 것 같은데, 여자인 데다가 체구도 작은 연주에게 소주 한 병이면 결코 작은 양이 아니었다.
“흐헤. 이거 달아요. 민준 씨이. 마실수록 맛있어요.”
“그래요?”
연주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고 있던 빨간 드레스와 거의 깔맞춤이었다.
‘어떻게 취하니까 말을 더 잘하지?’
신기한 건 술이 들어갈수록 연주 특유의 더듬거리는 말투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연주는 취기가 올라올수록 과감하고 용감해지는 타입인 것 같았다.
‘뭐, 나야 좋지. 연주 속마음을 알기 쉬울 테니까. 슬슬 취조를 시작해볼까?’
타이밍을 재다가 질문을 던졌다. 정혜가 해줬던 얘기의 진위를 알아봐야 했다.
“연주 씨. 아버지 얘기 좀 해주세요.”
“아빠요?”
“네. 아버지랑 사이가 좋은 거 같던데.”
“음…좋긴 좋은데…떨어져 있는 날이 많아서…그럴 때는 외로워요…아! 지금은 민준 씨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행복해요. 히힛.”
“그럼 어머니는요? 저번에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까…솔직히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엄마요? 좋아요! 평소에는 무서운데 가끔은 잘해주세요. 아빠랑 있을 때요! 엄마는 아빠만 좋아하고 저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그래도 저는 좋아요. 엄마잖아요! 헤헤.”
“음…”
나는 연주의 얘기를 들으며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머리가 존나 띵했다.
정혜에게 들은 얘기와 연주에게 직접 들은 얘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야기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 하나 없이 아예 정반대인 수준이었다.
‘뭐지…? 뭐가 맞는거지?’
혼란스러웠지만 두 얘기 중 뭐가 진실이든, 이 사건의 흑막이 정말 터무니없는 빌런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갈등 관계에 있는 건 연주와 새엄마…둘 중 한 명은 빌런이라는 소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