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52화
아직 희미하지만, 머릿속에서 조금씩 내가 만들어갈 교단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원래도 레오레를 하기 전에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했는데,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연주의 일과 이사만 마치고 나면, 곧장 전직해서 교주로서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체크요.”
나는 머릿속에 교주가 되겠다는 목표를 확고히 심어 놓고, 카운터로 가서 초커를 두 개 결제했다.
‘비공식이긴 하지만…교인 1호나 마찬가지네. 잘해줘야겠다.’
나는 혜미를 보며 싱긋 웃고는 싸인을 하기 위해 놓인 전자 패드에다가 내 이름은 정자로 써주었다.
내가 싸인하고 있는 걸 유심히 지켜보는 혜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띠디딕-.
“네.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혜미가 카드와 함께 영문으로 ‘챠넬’로고가 크게 박혀있는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들고는, 주변 쓱 둘러보다가 혜미에게 작별 인사를 날렸다.
“또 봐요. 혜미 씨.”
“네…민준 씨…”
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챠넬 매장을 빠져나왔다.
아무리 시간이 없다 해도 카운터에서 혜미가 보고 있을 텐데, 가오 상하게 뛰어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끝까지 여유를 지키면서 주차장으로 와 람보에 올라타고, 악셀을 쎄게 밟았다.
‘돈값 좀 해보자. 람보야.’
백화점 밖으로 빠져나왔더니 이미 노을이 져가고 있었다.
교통법규를 적당히, 걸리지 않게끔만 준수하면서 최대한 속도를 높였다.
고속도로에서 과속 카메라가 없을 때는 200km로 달렸다.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배기음과 압도적인 비주얼에 쫄아버린 다른 차들이 워낙 얌전하게 운전을 해줘서, 사고의 위험은 전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연주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게이트로 차를 몰고 가며 사람들을 살펴봤다.
‘저깄네. 우리 연주.’
연주는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지나다니는 차를 살피고 있었다.
동화 속 공주님 같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존나 귀엽네 진짜…저런 댕댕이가 부부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연주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눈 밑이 퀭했고 표정이 너무 울상이라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일 초일 초가 지날 때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내가 늦는 바람에 연주는 실시간으로 상처를 받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아려왔지만, 상처받은 모습마저 귀여웠다.
‘보고만 있지 말고 전화를 하지. 저 멍청이.’
가만히 놔두면 곧 펑펑 울 것 같아서,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연주를 향해 걸어가는데 연주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3초 안에 눈물이 터져 나올듯한 포즈였다.
단단히 쓰레기 짓을 하자고 마음먹고 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만나기도 전부터 울려버릴 수는 없었다.
원래는 큰 소리 내는 걸 정말 싫어하지만, 연주가 아직 멀리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공항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연주를 불렀다.
“연주 씨!!!”
“…?!”
연주의 몸이 크게 흠칫 거렸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연주는 숙여놨던 고개를 휙 치켜들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그러다 나를 발견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나를 향해 우다다다 달려왔다.
파악-.
멈추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려온 연주가 나의 품에 자석처럼 착 달라붙더니, 떨어질 수 없다는 듯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우으…아으…끄으윽…민…민준씨이…”
“연주 씨. 많이 기다렸어요?”
“흐극…끄으읍…아…아니요오…많이…많이…끄윽…보고 싶었어요…끄읍…흐윽…”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나는 연주를 품에 쏙 넣고 끌어안아 주면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진정하라고 해준 건데 되려 서러웠는지, 결국 연주가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끄힛…하응…흡…흐아…흐아아앙…”
내 가슴에 고개를 푹 박고 눈물을 흘리는 연주 때문에 가슴이 촉촉히 젖어 들어갔다.
백화점에서 섹스만 안 하고 왔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좀 너무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연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빌드업으로서는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았다. 감정이 많이 요동칠수록 속마음을 숨겨 놓기가 힘든 법이었다.
‘나중에 더 잘해줄게. 딱 오늘까지만 고생하자 연주야. 네가 얀데레가 아니라면 말이지.’
오늘 목표는 연주가 얀데레인지, 혹은 얀데레로 흑화할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주에게 한계까지 스트레스를 준 다음에, 그걸 어떤 방식으로 푸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참다못한 연주가 이상 반응을 보이거나 살벌한 낌새를 풍긴다면, 오늘부로 연주와의 정상적인 관계는 끝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연주를 시은 누나 보다 훨씬 더 거칠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얀데레 엔딩을 예방하려면 아예 비정상적인 루트로 틀어서, 내 자지를 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육변기로 연주를 개조시키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신의 손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사실 스트레스를 줘서 이상 행동이 나오는지 관찰하는 것보다, 신의 손을 써서 머리에 색기를 주입한 다음 연주의 페티쉬를 확인하는 게 더 빠르고 확실했다.
하지만 혹여 곤히 잠들어 있던 연주의 집착 본능을 깨워버릴까 봐 섣불리 신의 손을 쓰기는 어려웠다.
나만 해도 원래는 단지 멜돔끼와 사디스트끼가 있을 뿐이었다.
신의 손 부작용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목을 조르거나 배빵을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쯤 해보고는 싶었겠지만, 평생 해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막연히 해보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달랐다. 그런데 신의 손을 쓰면 그 경계가 사라졌다.
그러니 섣불리 신의 손을 쓰면 상황이 더 꼬여버릴지도 몰랐다.
‘그래. 연주의 반응을 살펴보는 게 최선이야.’
단단히 마음을 굳히고, 내 품 안에 안겨서 울고 있는 연주의 등을 토닥거렸다.
토닥. 토닥.
“끄읍…흐으읏…흐아…”
“진정해요. 괜찮아요. 어디 안 갈게요.”
“으하아…하으…끕…흐으…”
등을 두드려주자 연주가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신의 손도 필요 없었다. 연주에게는 평범한 내 손도 약손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주 씨. 울음 그치면 제가 선물 드릴게요.”
“끕…흐윽…서…선물…이요?”
연주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렇게 서운해 하다가도 선물이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연주가 귀여웠다.
아무리 삐지고 상처 받아도 적당한 간식과 산책 한 번이면 금방 헥헥 거리는 강아지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서 연주의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 자국을 좀 닦아주고는, 연주의 손목을 잡고 내 차를 향해 걸어갔다.
연주를 세워놓고, 차량 문을 열어서 대시보드 안에 들어있던 ‘챠넬’ 쇼핑백을 꺼냈다. 초커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포장을 풀고 초커를 꺼내 들었다. 선물 포장은 아까웠지만 이런 건 원래 직접 걸어줘야 제맛이었다.
“연주 씨. 머리 좀 묶고 있어봐요.”
“네…? 네에…”
연주는 팔을 들어서 머리를 묶어 올렸다. 나는 초커의 체인을 풀고 그대로 연주의 목에 손을 넣어서 초커를 걸어줬다.
“읏…”
연주는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눈을 꼭 감고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가, 내가 초커만 걸어주고 순순히 떨어지니까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는, 예쁘장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이게…뭐에요? 민준 씨?”
“초커에요. 연주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그…그…그렇구나아. 아으…우으…감사해요…”
감사하다는 이미 전했음에도, 연주는 자꾸만 초커에 걸려있는 검은색 쥬얼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를 흘겨봤다. 뭔가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으…민준 씨…그러면 있잖아요…”
“네.”
“저…이거…잘…잘…어울려요? 예뻐요…?”
“네. 예뻐요.”
“아으…아으으…”
너무 조심스럽게 묻길래 뭘 물으려고 저라나 했더니, 연주는 고작 내가 선물해준 초커가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지 물어왔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연주에게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완전히 진심이었다.
연주의 목은 길고 가늘었으며 주름 하나 없이 탱탱했다.
더군다나 우유처럼 뽀얀 빛깔을 하고 있어서 블랙 초커와 확연하게 대비되었고, 그 대비가 연주의 목을 한층 더 탐스럽게 만들었다.
“옷이랑도 잘 어울려요. 원래 그런 디주니 스타일 드레스 좋아해요? 그런 옷 입고 있으니까 완전 공주님 같네요.”
“아으…이건…그러니까…아빠…아빠 취향이에요…”
“장인어른 취향이 저랑 딱 맞네요.”
“…?”
인터넷에서 흔히 통용되는 장인어른 드립이었는데, 연주에게 수준이 너무 높은 것 같았다.
연주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거렸다.
-펑!
그러다 한순간에 얼굴이 훅 달아올랐는데, 머리에 차오르는 열기를 빼려는 건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입에서는 연주 특유에 ‘아으. 아으.’ 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우으으…아으…아으…”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보조석의 문을 열어 그 안으로 연주를 넣어주고는, 나도 운전석에 올라타 차를 출발시켰다.
연주는 장인어른 드립의 여파로 한동안 고생했다. 연주의 빨개진 얼굴이 진정될 때까지 대략 십 분이 넘게 걸렸다.
“그으…있잖아요. 민준 씨…”
“네.”
“이거…내려도 될까요…?”
연주가 보조석에 달린 햇빛 가리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도 햇빛 가리개에 달린 거울을 보고 싶은 것 같았다.
“네, 그럼요.”
“아…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허락을 받은 연주는 기쁜 표정으로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그리고는 턱을 살짝 들어서 목을 길게 빼더니 햇빛 가리개에 달린 거울로 목에 걸려있는 초커를 구경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가운데에 달린 꽁알 사이즈의 검은 보석을 계속 만지작거렸는데, 초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조금 더 지나니 연주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연주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으흐흥~ 흐응~”
“그렇게 좋아요?”
“앗…!! 아…네에…처음…이에요…이런 거 받아본 거…진짜…진짜진짜 좋아요…고마워요. 민준 씨.”
“그렇게 고마우면 뽀뽀나 한번 해주세요.”
“…네?”
“운전하느라 힘든데 연주 씨 뽀뽀 받으면 기운이 좀 날 것 같네요.”
“…”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연주는 토마토가 되어 있겠지.
‘하. 뭐 뽀뽀를 받으면 기운이 나?’
내가 말해 놓고도 남사스러웠다. 연주를 따라서 내 볼까지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런 것도 다 필요한 과정이었다. 연주의 기분을 하늘 높이 붕 뜨게 만들었다가 다시 추락시키는 것도 설계의 일부분이었다.
절대 사심을 채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스으윽-.
“우으으…”
잠시 기다리니, 연주가 입술을 들이밀고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타이밍을 재다가 연주의 숨결이 바로 옆에서 느껴질 때, 고개를 휙 하고 돌려버렸다.
아무리 남사스럽고 오그라든다고 해도, 이 좋은 기회를 겨우 볼 뽀뽀만으로 날려버리기에는 좀 아쉬웠다.
쪽-.
“우읏…!”
“아, 힘 난다.”
그렇게 연주의 입술을 훔치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끅…”
연주는 깜짝 놀랐는지 옆에서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깜짝 키스 정도가 아니라 깜짝 펠라치오도 시켜보고 싶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연주 씨. 저녁 먹었어요?”
“끅…네에…끅…아빠랑…끅…공항에서…끅…”
“그럼 술 한잔 어때요?”
“끅…좋아요오…끅…”
늦은 저녁 시간대였으니 조금 있으면 술판이 벌어질 시간이었다. 나는 그걸 노리고 강남으로 차를 몰았다.
수많은 지역에 술집이 널려 있었지만, 술 마시러 굳이 강남까지 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쁜 누나들이 헐벗고 있거든.’
아무리 성괴다 뭐다 해도 강남에 있는 여자들이 확실히 예뻤다. 그리고 술집 종업원부터 클럽 죽순이들까지 전부 모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옷차림도 시원시원했다. 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내 계획은 술집을 찾는다는 핑계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음흉한 시선으로 헐벗은 누나들을 대놓고 훑어보며 연주의 질투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무슨 너튜브 느낌이네.’
‘여자친구 질투 유발 몰래카메라!’ 따위의 제목으로 너튜브 어딘가에 똑같은 내용의 영상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연주에게는 딱 그 정도 수준이 알맞았다.
연주는 이해력이 조금 부족해서, 연주에게 고도의 심리전을 걸어서 질투를 유발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제대로 하려면 연주 눈높이에 맞춰서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가야 했다.
꽈아아아앙-.
연주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 보니 차가 어느새 강남 접어들었고, 강남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예상대로 거리의 분위기는 아주 후끈했다.
인도는 물론 차도까지 사람이 북적여서 차가 기어 다녔고, 도로 양옆으로 쫙 늘어선 모든 가게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더군다나 도발적인 복장으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클럽녀들과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클럽녀들보다 더 헐벗은 복장으로 마구 염기를 뿌리며 돌아다니는 처자들이 보였다.
`캬. 이거거든.`
준비물은 완벽했다. 슬슬 연주의 정체를 까볼 시간이었다.
그 방법이 조금 쓰레기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레기도 쓰레기는 거르고 싶은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