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3화
-다른 학생들 보호자 분들이 오셨었는데, 그대로 말씀드리면…자기는 이런 딸 둔 적 없고, 술 먹고 사고나 치는 이런 년은 콩밥 먹어봐야 정신 차린다고…그리고는 그냥 나가버리셨습니다.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존나 맞는 말이었다. 부모로서의 정은 좀 부족해 보였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게 맞을 수도 있었다.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 정도면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나이였다.
그런데도 이런 사고를 친 거 보면 보통의 수단으로는 갱생 가능성이 희미하다는 뜻이었다.
이 기회에 고생 좀 하고 정신 바짝 차린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합의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득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형사처벌은 안 받는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콩밥론에 찬성을 한다고 해도 다 차려놓은 밥상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었다.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을 차려놨는데 그 위에 생콩을 뿌려버리도록 놔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저 아직 경찰서니까 곧 가겠습니다.”
“네.”
나는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정혜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귀는 달아올라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멍해 보였다.
“정혜 씨.”
“힉!! 아…네, 네…민준 씨.”
깜짝 놀라 하는 게 귀여워서 괴롭히고 싶었지만, 둘이서 꽁냥꽁냥을 하기 전에 일부터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정혜에게 상황을 말해주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다른 애들 합의금까지 전부 다 내버리라고 말해주었고, 정혜는 내 말대로 행동했다.
사무실로 들어가서 자기 동생이 가장 잘못했으니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며, 가난한 대학생의 신분으로 대승적인 결정을 내리는 정혜의 모습은 그야말로 걸크러쉬 그 자체였다.
정혜가 합의금을 물어내자 사건은 빠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재물손괴죄가 좀 특이해서 사건 당사자들끼리 합의를 한다고 해도 재판에는 들어간다고 하지만, 청소년인 데다가 합의를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유인영 변호사의 말을 듣고, 마음을 심히 졸였던 개노답 삼 자매는 사이좋게 광광 울었다.
“저, 민준 씨!”
경찰서에서의 일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정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친구들과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는 은혜를 질질 끌고, 정혜가 내 뒤를 졸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모른 척 한 건 은혜가 빨리 자기 친구들과 꺼져줄 때까지 기다린 거였는데, 아쉽게도 은혜는 언니의 손아귀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나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정혜가 산 제물처럼 은혜를 질질 끌고 와서, 내 앞에 대령했다.
“아! 이 사람 무섭다고! 안 한다고!!"
“야, 이은혜!!!!”
내 앞에서 은혜가 땡깡을 부리자 즉시 정혜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형적인 도도한 고양이 상인 정혜가 극대노를 하니까 마치 호랑이 같아 보였다. 혼난 건 은혜인데 나까지 살짝 졸아버렸다.
“아, 알겠어…저기요.”
“네.”
“죄송합니다. 잘 못 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사과는 아까 경찰서에서 다 했잖아요.”
나는 신부 후보가 아닌 여자에게 차가운 편이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싸가지 없고 젖비린내 나는 은혜에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었다.
내 냉랭한 목소리에 쫄아서 눈깔을 이리저리 돌리는 게 좀 귀엽긴 했지만, 그래도 미성년자는 믿고 거르는 게 좋았다.
혹여 애먼 짓을 했다간 그대로 인생 쫑날 수도 있었다.
“그…그래도 다시 한 번 하는 거예요…그…합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됐지? 난 간다! 빠잉~”
“아오, 저게 진짜…”
은혜는 철없어 보이는 인사를 날리고 후다닥 도망갔다. 언니 맘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구는 은혜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적당한 때에 빠져주는 판단은 아주 훌륭했다.
나는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면서도, 얼굴을 살짝 굳혔다.
은혜의 어이없는 사과를 받고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는 신호였고, 정혜는 내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죄송합니다! 민준 씨.”
“됐어요. 딱히 동생 때문은 아니고…그냥 기분이 좀 꿀꿀하네요. 생각보다 여기 오래 있어서 약속도 다 날아갔거든요.”
“아…어떡하죠…괜히 저희 때문에…”
“어쩔 수 없죠. 뭐, 정 그렇게 신경 쓰이시면 제 기분 좀 풀어주시던가요.”
“네?! 그…기분을…대체…어떤 식으로…풀어 드리면 될지…”
정혜는 말을 하면서 몸을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은혜를 혼낼 때는 호랑이 같더니, 부끄러워서 베베 꼬는 몸짓은 사뭇 수줍고도 여성스러웠다.
단지 기분만 풀어달라고 했을 뿐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성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동생은 차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정혜 씨도 좋아해요?”
“네? 음…싫다 좋다 말하기에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아, 그렇구나. 그럼 드라이브하러 갈래요?”
나는 가볍게 물었다. 내게 목줄을 꽉 잡힌 정혜가 거부할 리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네? 드라이브요? 차 망가지신 거 아니에요?”
“아, 한 대 더 있어요…저는 정혜 씨랑 같이 드라이브하면 우울했던 거 괜찮아질 것 같은데…싫으세요?”
“아니요?! 좋아요!!”
“…좋아요?”
“네, 좋아……”
내가 능글맞게 물으면서 장난스레 바라보자, 정신없이 대답하던 정혜의 귓볼이 일순 달아올랐다.
무슨 루돌프도 아니고, 너무 빨개서 거의 반짝거릴 지경이었다.
“어, 귀는 왜 빨개요? 정혜 씨, 추워요? 오늘 날씨 괜찮은데.”
“…이런 식으로 놀리시면…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거든요…”
“네? 제가 놀릴 데가 어디 있는데요.”
“…주머니에 뭐 넣고 다니시는 거에요?”
“네…?”
“늘어나고…딱딱하고…그…바지 속에서…만지니까…막…흉기 같았어요.”
“크흠…일단 차에 타서 얘기하시죠.”
경찰서 정문에서 하기에는 확실히 주제가 별로였다. 얘기를 듣던 형사가 주머니 불심검문이라도 하면 낭패였다.
한 방 먹은 나는 한발 물러났고, 다행히 정혜도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이거 민준 씨 차였어요?”
“네. 사고 났다고 해서 오늘 급하게 샀죠. 아, 문 열어드릴게요.”
주차장에서 내 차를 본 정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자존심 상해서 묻기는 싫은데 너무 궁금해서 차마 참을 수 없어 하는 티가 역력했고, 나는 돈 냄새 줄줄 풍기는 대답으로 무참히 흙수저 대학생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내 부내 나는 대답에 정혜의 얼굴에서 한순간 기가 팍 죽었다가, 이내 괜찮아졌다.
아니, 속이 쓰림에도 억지로 괜찮은 척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돈으로 깔아뭉갠 거긴 했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경찰서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정혜와 나의 말싸움은 나의 판정승이었다.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 그런지 승리의 기쁨이 더 컸다.
****
드라이브로 시작된 우리의 데이트는 결국 저녁 먹기까지 이어졌다.
정혜와의 저녁 식사는 재밌고 유익했다. 미녀인 데다가 싹싹하고 눈치도 빨라서, 정혜는 뭐를 하건 함께하면 좋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르쳐주기만 하면 섹스도 금방 잘할 것 같아서, 나는 유능한 정혜에게 더 빠지게 되었다.
턱-.
우리는 후식으로 커피까지 때리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어둑어둑해져서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님 호텔로 가던가.
“아…”
“전화 왔죠? 아까부터 계속 오는 것 같던데, 그냥 받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환영회 뒤풀이 와달라는 전화일 거에요.”
과대표라고 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정혜는 흔히 말하는 인싸인 것 같았다.
매너 모드로 해놔서 소리는 안 들렸지만, 데이트를 하는 내내 정혜의 핸드폰은 식을 줄을 몰랐다.
핸드폰 시작 화면이 보일 때마다 메시지와 전화가 쌓여 있는 게 보였는데, 정혜의 거의 모든 게 마음에 들었지만 이건 좀 마이너스였다.
나는 애정결핍 변태라서, 내 여자가 나 말고 다른 거에 신경을 쓰는 게 싫었다. 설령 그게 가족이건 학업이건 돈벌이건 상관없었다.
만약 나만 바라보지 않는다면 망가트려서라도 나를 보게 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내 여자라기엔 정혜는 아직 썸녀에 불과했고, 썸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건 관계 진전에 도움이 되질 않았기에, 나는 차라리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망가트리고 중독시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서서히 해야지, 한 번에 팔다리 다 부숴버리고 독버섯 수프를 먹여버리면 무서워서 도망갈 수도 있었다.
“뒤풀이 어디서 해요? 데려다줄게요.”
“그…이런 차 타고 가면 애들 기죽어서…돈 없는 대학생들이라…”
“그러려고 데려다준다는 건데요?”
“네?”
“경고하는 거죠. 내가 정혜 씨 찍었으니까 달라붙지 말라고.”
“그…그런 멘트는 어디서 배워요? 무슨…학원이라도 다니시는 거에요?”
내 무근본 직설 화법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는지, 정혜는 내 말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법 잘 받아쳤다.
하지만 말을 저렇게 잘해도, 귓불이 빨개져서야 그저 깜찍할 뿐이었다.
“됐고. 빨리 뒤풀이 어디서 하는지 불러봐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정혜는 나에게 주소를 불러주었다.
한 30분 거리였는데, 장소는 연수대학교 캠퍼스 바로 뒷골목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정혜 씨 혹시 연수대학교 다녀요?”
“네. 아, 제가 말씀 안 드렸었나요?”
“음, 과는요?”
“영문학과요.”
“아~~ 그렇구나.”
꽈아아아아아앙-.
나는 정혜를 데리고 거칠게 자동차를 몰았다. 어쩐지 분노가 솟아올랐다.
정혜에게 어디 대학을 다니느냐고 물어보지 않은 건 일종의 배려였다.
소녀 가장이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대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 최상위권 대학이자, 모든 고등학생의 꿈의 대학 중 하나인 연수대학교, 그것도 뭔가 있어 보이는 영문학과였다니.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재수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뭔가 지는 느낌이었다.
“민준 씨. 혹시 화나셨어요?”
대화 없는 질주가 계속되자, 안전벨트를 꾹 쥐고 있던 정혜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아닌데요? 왜요?”
“표정이 화나신 거 같아서요…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화난 건 아니고…하나 물어보고 싶은 건 있네요.”
대화 주제를 찾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정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좀 중요한 문제였다.
“뭔데요?”
“그때 카페에서…연주 씨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요? 제가 오늘 본 정혜 씨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궁금해서요.”
“음…”
정혜는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지 궁금할 정도로, 정혜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제가 일하는 그 카페, 연주 씨 어머니가 사장님이라는 건 아세요?”
“네, 뭐. 얼핏 들은 것 같네요.”
“저희 할머니가…아프시거든요. 오랫동안 아프셨어요. 원래는 병원비도 없어서 제대로 치료도 못 받으셨는데,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요양병원에 계세요. 상태도…많이 좋아지셨고요.”
“…”
“그거 다 카페 사장님께서 해주신 거에요. 저 거기에서 고등학생 때부터 일했고, 사장님이 지금까지 저 엄청 잘 챙겨 주세요. 어떨 때는 엄마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요…사장님 아니었으면…아마 저도 은혜처럼 엇나갔었을지도 몰라요. 카페에서 자리 잡기 전에는 진짜 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
나는 조용히 정혜의 말을 들었다.
담담히 사연을 풀어놓는 정혜의 목소리에 들어있는 진정성이, 나의 귀를 계속 잡아끌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 같은 사장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연주 씨에요.”
“왜 자기 딸을 싫어하는데요?”
“친딸은 아니에요. 새엄마…그러니까 연주 씨 입장에서 보면 계모거든요. 근데,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재혼을 한 뒤로, 연주 씨가 사장님을 많이 괴롭혔데요. 연주 씨가 친아빠한테 집착이 너무 심해서…연주 씨 이간질 때문에 부부관계가 틀어질 정도라고 하시더라고요.”
“…”
도저히 믿기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참고 들었다. 정혜의 얘기는 계속됐다.
“평소에는 가족 얘기 잘 안 하시는 사장님이, 어느 날은 저를 붙잡고 너무 힘들다고…막 울면서 연주 씨한테 사장님이 당했던 일들을 털어놓으셨는데, 연주 씨 정말 파렴치한 사람이더라고요. 피가 거꾸로 쏟는다는 게 어떤 건지 느낌인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때 그래서 그랬어요. 연주 씨한테…연주 씨가 사장님한테 했던 온갖 나쁜 짓들…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어서…정당하지 않은 일인 건 아는데…엄마 같은 사장님한테 그 정도는 해드리고 싶더라고요.”
과아아아앙-.
나는 말 없이 악셀을 밟았다.
혼란스러운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속이 답답했다.
‘이건…정혜한테 따져 물은 얘기는 아니야…’
그러기엔 정혜는 겨우 제삼자일 뿐이었다.
연주에게 직접 묻거나, 연주의 새엄마를 보고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