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2화
나는 정혜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런 상황에 대놓고 작업을 걸 리도 없었고, 내 표정도 호감 때문에 번호를 따는 남자라 치기에는 많이 엄숙했는데, 정혜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혜가 당황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음. 합격. 합격이요.’
자고로 남자가 이렇게 길게 밑밥을 깐다는 건 뭔가를 해줘도 해 주겠다는 신호였다. 정혜는 똑 부러지고 똘똘하기는 했지만, 아직 남자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야 좋았다.
“아…일단은…계속 연락도 해야 할 테니까…네에…그…그러니까 드릴게요…”
정혜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변명을 내뱉더니, 눈치를 살살 보면서 내 핸드폰을 가져가 번호를 찍어줬다.
저번에 연주를 심하게 갈구는 독한 모습만 봐서 그런지 적응이 잘 안 되긴 했지만, 확실히 귀엽긴 귀여웠다.
나는 핸드폰을 돌려받고, 곧장 천만 원을 송금했다.
받는 사람은, 정혜였다.
위이잉-.
송금 메시지가 날라왔는지, 정혜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리고 슬쩍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던 정혜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릅뜨고 핸드폰 화면을 뻔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정혜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정혜의 눈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어떻게든 지켜 내려 하는, 애처로운 가시가.
“저기요. 민준 씨.”
“네. 정혜 씨.”
“돈은 왜 보내주신 거에요? 저 돈 없고 사정이 어려운 건 맞는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동정받기는 싫어요. 제 동생이 잘못한 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돈을 받고도 화를 내는 정혜가 밉지 않았다. 꼰대 같지만,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힘들었을 텐데도,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도, 정혜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걸 지켜내는 사람은 빛이 나는 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찬란한 빛을 하염없이 동경했고, 사랑했다.
혹여 그 빛이 나를 향해 쏟아지지 않는다면, 짙은 어둠으로 집어삼켜서라도 가지고 싶을 정도로.
“그거 그냥 빌려드리는 거에요. 가불. 정혜 씨 가오 좀 한번 잡으시라고.”
나는 일부러 더 가볍게 얘기했다.
본디 따듯한 마음이란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르도록 가볍게 전해야, 더 아름다운 법이었다.
“…네?”
“그 돈으로 동생 기나 한번 살려주세요. 정혜 씨 동생이라 그런지 책임감은 있어 보이던데 친구들한테 죄책감 느끼지 말고 어깨 쫙 펴고 다닐 수 있게끔, 정혜 씨가 그냥 합의금 다 물어 버리세요. 그게 간지고 스웩이죠. 돈은, 이자랑 기한 없이 빌려드리는 거니까 나중에 잘 되시면 갚으시면 되구요.”
누군가가 두르고 있는 마음속 가시를 떼어내는 법은 사실 간단했다.
지켜야 하는 걸 같이 지켜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정혜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혜가 목숨 걸고 지키려 하는 은혜를, 정혜와 같은 따스한 마음으로 동정해 주는 게 포인트였고, 그러면서도 정혜의 입장을 배려하는 부분에서 가산점이 들어갔다.
어떤 까다로운 심사 위원들에게도 만점을 받을 만큼, 지금 내 사냥 스킬은 완전히 물이 올라 있었다.
“…왜요? 왜 이렇게…저한테 잘해주세요…?”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결국은 올가미에 꽁꽁 묶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냥감을 보고 있는 건, 사냥꾼들에게 최고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정혜는 두르고 있던 뾰족한 가시를 내려놨다. 아니, 내가 내려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정혜의 눈동자와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연약했다.
“사실은요…우리…오늘 처음 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지…모르겠어요…흐윽…제가 불쌍해요…? 네?…제가…제가 마음에 들기라도 하셔서 이래요?”
궁금해하는 척하지만, 정혜는 단지 자비를 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목줄을 더 강하게 쥐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럭저럭 착한 남자였다며 말없이 정혜를 껴안아주고, 못된 남자였다면 마음에도 없는 사랑 고백을 하겠지.
하지만 진짜 나쁜 남자는, 그보다 한 발 더 깊게 들어가는 법이었다.
“멋지더라고요. 저한테도 정혜 씨 같은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졌어요. 정혜 씨가.”
“뭐가…뭐가…멋진데요…저 여기 지하철 타고 왔어요…동생이 경찰서에 있다는데…그래도 돈이 아까워서…택시도 못 타고 지하철 타고 왔어요. 끕…완전히 구질구질한데…뭐가 멋져요…이런 게…”
“그래도 제일 빨리 왔잖아요. 정혜 씨가 일등이었어요.”
마음에 걸렸던 것들, 동생에게 못 해줬던 것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위로받고 싶었던 일들.
정혜의 속살이 드러났고, 곳곳에 있는 상처가 보였다. 나는 그 상처를 어루만져 줬다.
정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전혀 아니에요…사실은요……진짜 사실은요…오면서 귀찮았어요. 짜증 났어요! 끄읍…동생이…동생이 미웠다고요…없으면…차라리 없으면 편하겠다는 생각도 했어요…부모님도 없는 애한테요!! 그런데…끅…그런데 뭐가…대체 뭐가 괜찮은데요…”
“그래도 책임졌잖아요. 책임지려고 여기 왔잖아요. 그러면 된 거죠.”
“…민준 씨가 다 했잖아요…끄흑…민준 씨가 다 해줬잖아요. 저는 그냥…울었어요…우는 것밖에 못 했다고요…”
“그래서 멋졌다니까요? 저는 안 울거든요. 가족이 죽어도 안 울어요. 그런데 정혜 씨는 막 울잖아요. 가족 때문에 울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끄윽…흐윽…”
열심히 달린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했지만, 무엇이 충분한 보상인지는 참 어려운 문제였다.
그것이 천만 원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스킨쉽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한 마디의 말일 수도 있었다.
돈은 이미 줬고, 스킨쉽은 시기상조라서, 나는 대신에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마치 첫 데이트에 들고 나갈 꽃을 고르는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었다.
`가장 듣고 싶은 말. 가장 힘이 되는 말.`
정혜를 질식 시킬 만큼 목줄을 세게 조여줄 단어들. 그런 따듯하고 잔인한 단어들이 필요했다.
상황과 상황을 관통해서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의지를 일으켜 세워주는, 나를 인정해주는, 힘들었던 하루를 따듯하게 해주는 그런 말 한마디.
나는 정혜를 바라보며, 오로지 내 마음 속 밝은 면만 담아서 입을 열었다.
"정혜 씨…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오늘 정혜 씨는, 동생한테 멋진 언니이자 훌륭한 부모였어요.”
“…”
마치 멈춘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슬로우 모션에 걸린 건 나만이 아니었다.
정혜와 나는 멈춘 시간 속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단 몇 초 만에 눈에서 눈으로 수많은 감정이 오가고, 대화 없이 서로를 이해했다.
마치 원래 하나였다가 잠시 떨어져 있던 것처럼, 우리의 눈빛은 빈틈없이 엉겨 붙었다.
한 번의 눈 맞춤이, 백번의 섹스보다 더 강렬했다.
스윽-.
하지만 백번의 섹스보다 더 짙은 눈 맞춤으로도 부족했는지, 정혜의 몸이 나를 향해 점점 기울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아련하고 가련한 눈망울을 하고서, 서서히 다가오더니 조금씩 입술을 내밀었다.
마음뿐 아니라 몸도 달래 주기를 바라는 어리광이었고, 도저히 거부하기 싫은 예쁜 짓이었다.
정말이지 가시를 벗겨놓은 정혜는, 그런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이유가 궁금할 정도로, 그 무엇보다도 연하고 부드러웠다.
촤악-.
“앗…”
그리고 서로의 입술이 거의 닿으려는 그 순간, 그 누가 와도 두 사람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운명의 순간에.
정혜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떨어트렸고, 내 바지는 종이컵 안에 있던 물 때문에 젖어버렸다.
서로의 타액 때문에 입술이 축축해야 할 상황에, 뜬금없이 바지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촤라라락-.
고장 나서 잠시 멈춰있던 시계태엽이 순식간에 촤르르륵 돌아가듯, 시간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정혜와 내 사이에 머물렀던 묘한 기류는 공중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아이 싯팔 진짜…’
좋은 분위기가 깨져서 화가 났지만,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다. 정혜가 떨어트린 종이컵은 내가 직접 정혜에게 갖다 준 바로 그것이었다.
연주 때도 그러더니, 아무래도 나는 그 카페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눠 마시면 안 되는 몸인 것 같았다.
‘그런 게 어딨어, 진짜!…다음에는 바지 속에 수영복 입고 만다 내가…’
정혜에게 물을 떠다 주면서, 차갑지 말라고 냉수와 온수를 적당히 섞어서 미지근하게 줬더니, 내 바지가 미지근하게 축축해져 갔다. 찬물처럼 확 깨는 느낌은 없었지만, 서서히 스며드는 느낌이라 더 찝찝했다. 마치 옷을 싹 갖춰 입고 온천물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아…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아니요. 괜찮아요.”
“잠시만요…민준 씨, 가만히 계세요!”
정혜는 역시 유능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지만 카페 알바 짬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사과 먼저 하고 빠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정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나타난 정혜의 손에는 티슈가 잔뜩 들려있었고, 정혜는 내 앞에 무릎 꿇고 휴지로 바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삭삭삭삭-.
“괜찮으세요? 진짜 진짜 죄송해요.”
어디서 본듯한 데자뷰가 일어나는 장면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혜는 봄에 어울리는 분홍빛 브이넥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요즘 스타일 대로 기장은 짧은 대신 옆으로는 헐렁했다.
그런 헐렁한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숙이니, 내 시야에서는 순백색 브래지어를 넘어 정혜의 귀여운 배꼽까지 슬쩍슬쩍 보였다.
삭삭삭삭-.
“원래 이러지 않는데. 제가 잠시 정신을 놨나 봐요. 아으, 진짜.”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정혜가 닦고 있는 위치, 그러니까 정혜가 내 바지에 물을 흘린 위치는, 정말 공교롭게도 사타구니 근처였다.
정혜는 위치의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물기를 닦는 데에 집중해서 휴지로 바지를 삭삭 문지르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단히 곤란했다.
여기서 내 존슨이 제대로 용트림을 해버리면, 정혜는 너무 흉악한 물건에 깜짝 놀라 도망칠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 사람이 바지 안에 샷건을 숨겨놨다며 당장 형사들에게 달려가 총기류 불법 소지죄로 나를 신고해 버릴지도 몰랐다.
“정혜 씨…이제 그만 하셔도 되는데…다 닦였어요.”
“아니에요. 하나도 안 닦였어요.”
“괜찮으니까. 그만 하세요.”
“이 정도는 제가 해드려도 되잖아요. 제가 하게 해주…어라?”
삭삭. 턱-. 턱-. 턱-. 터억…
잘만 닦이던 바지에 갑자기 뭐가 툭툭 걸리자 정혜의 손이 느릿느릿해졌다. 두툼한 휴지 뭉치 때문에 촉감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는지 조금 더 툭툭 거려 보던 정혜의 손길이 돌연 멈추더니, 정혜의 귓불이 순식간에 불에 달군 듯 달아올랐다.
부끄러우면 귓불이 달아오르는 체질인 듯했는데, 도도한 얼굴과 갭모에가 느껴져서 귀엽긴 더럽게 귀여웠지만, 아쉽게도 정혜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혜에게 인자한 심리 상담 선생님처럼 입을 턴 지 얼마나 됐다고, 손길이 좀 닿자 곧바로 발기를 해버린다는 게 엄청나게 창피했다. 빨리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저…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그…그러세요.”
갑자기 동시에 연주에게 빙의라도 된 것처럼,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말을 더듬었다.
나는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고, 정혜는 나를 피해 길을 내어 줬는데 그 움직임이 얼마나 다급한지 마치 길가에서 칼을 든 괴한이라도 만난 것 같았다. 정혜는 명백히, 내 자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면 그냥 칼도 아니고 중세 롱소드인데…정혜한텐 무서울 만하지.’
발기했다고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는 게 조금 수치스럽긴 했지만, 정혜가 남자 맛을 모르는 여자라는 걸 확인하자 기분은 좋았다.
정혜가 내 롱소드가 얼마나 멋지고 강력한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여자였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흥분하는 기미를 보였을 텐데, 정혜에게서 느껴지는 건 오로지 두려움뿐이었다.
‘처녀다. 저건 무조건 처녀야.’
처녀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처녀인 게 좋았다.
처녀가 아니어도 맛만 있으면 상관없다, 혹은 처녀에 집착하는 게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처녀 이거나, 아니라면 차라리 섹스 마스터인 편이 가장 좋았다.
처녀와 하면 누군가의 처음을 갖는다는 심리적인 흥분감이 있었고, 섹스 마스터와 하면 그냥 육체적으로 좋았다.
어중간한 비처녀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들에게도 기회의 문은 열려 있었다.
열심히 연습해서 섹스의 오의를 깨닫고 섹스 마스터가 되어오면, 그 노력을 높이 사서라도 가끔은 상대해 줄 수 있었다.
“후우…인생 레전드네…”
나는 화장실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발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하는 가장 심오한 고찰이 고작 처녀, 비처녀 논쟁이라니.
덕분에 자지가 가라앉긴 했지만, 마치 야동을 찾다가 타이밍을 잘 못 잡아서 썸네일만 보고 사정을 해버린 것처럼 가슴이 씁쓸했다.
위이이잉-.
내 마음을 위로해 주기라도 하듯, 마침 핸드폰의 진동이 구슬프게 울렸다. 나는 폰을 꺼내서 번호를 확인했다.
유인영 변호사였다.
“네, 변호사님.”
-합의 못할 것 같습니다.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