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41화
“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왜 용서를 해줘야 하는데요? 학생이면 그냥 다 용서해 줘야 하나요?”
“그건…그러니까…”
연주를 말로 패서 반쯤 죽여놓던 말빨 좋은 정혜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정혜가 아니라 나였더라도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는 이미 저질렀고, 피해자가 합의해주기 싫다는데 어쩔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피해자의 관용만을 바라며 개처럼 엎드려서 빌 수밖에 없었고, 나는 정혜가 개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젖비린내 나는 동생은 소리를 질렀지만, 더 성숙한 정혜라면 금방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가 합의를 해줘야 하는 이유를 하나라도 대보세요. 그러면 고민이라도 해 볼게요.”
“그…제가 어떻게든…어떻게든 돈을 마련해볼 테니까…”
“제가 지금 돈 얘기 하는 거로 보여요?”
“아니…아니요…그런 게 아니라…제 말은…”
“하아~ 뭐든 빨리 좀 말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지금 좀 바빠서.”
당연히 바쁘지 않았지만, 재촉은 필요했다. 내 앞에서 정혜가 울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정혜를 좀 불쌍 야릇하게 바라보다가, 돌연 완강했던 태도를 바꿔 기적처럼 합의를 해줄 생각이었다.
작정하고 정혜에게 엄청난 마음의 짐을 지워주기 위한 시나리오였고, 거의 완성돼 가고 있었다.
“…할 말 없으시면 이만.”
머뭇거리는 몸집과 열리지 못하고 뻥끗 거리는 입술에서 뻔히 보였다.
자존심 강한 정혜는 엎드리되 완전히 바닥에서 기지는 못했다. 정혜가 똘똘한 년이긴 했지만, 확실히 아직은 아마추어였다.
나는 그런 정혜를 도와주려고 일부러 더 단호하게 나갔다. 망설이지 말고 엎드리라는 디렉팅이었고,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신호를 주면 알아들어야 했다.
턱-.
“잠…잠시만요!!”
정혜는 정말 다급했는지, 다이아가 박힌 오천만 원짜리 로우렉스가 채워져 있는 내 왼쪽 손목을 겁도 없이 붙잡았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정혜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놓으시죠. 기스 나는데.”
“아…아…죄…죄송합니다. 하지만…조금만…조금만 더 얘기를 들어주세요…제발요…흑…제 동생 지금 잠깐 어긋난 거지 원래는 진짜…진짜 착한 애 거든요…정말이에요.”
“…”
나는 무심하게, 하지만 정혜의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흐르고 있었고, 정혜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으니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집이 어려워서…제가 못나서 저렇게 된 거지…히끅…원래는…원래는 정말 착하고 공부도 잘했어요…제가 못나서 그래요…지금은…지금은 제가 못나서…”
“하아…일단 진정해봐요. 진정하고 얘기해요.”
“아니요. 진정 못 해요. 합의 해주실 때까지 진정 못한다구요!!”
“…”
“제발요…제발 합의해 주세요…저희 동생 나쁜 애 아니에요…흐윽…제가 다 잘 못 했어요…제가요…흐읍…뭐든지 할게요…제발…제발…끄읍…크흡…끄읏…끄아아앙…”
곧이라도 터져버릴 것 끅끅대던 정혜의 울음보가 결국에는 터져 버렸다.
정혜는 마치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내 옷깃을 잡고 꺼이꺼이 울어댔다.
그것도 하필 경찰서 한복판에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조용해진 경찰서 안에 오직 정혜의 울음소리만이 들렸다.
모두가 의식 안 하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듬이를 잔뜩 세워서 의식하고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가끔 정혜에게 너무 몰입해서 혀를 차는 형사들도 보였는데, 확실히 여자의 눈물은 강력한 무기였다. 하다못해 피해 당사자인 나도 닭똥 같은 눈물을 쭉쭉 뽑아내는 정혜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나는 꼼짝없이 서서 정혜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등을 두드려주거나 안아주는 건 아직 좀 오바였고, 손수건은 챙겨오질 못했다.
하지만 이 울음을 대가로 합의를 해줄 생각이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매너 있고 착한 남자가 맞았다.
“흐윽…끄흐으으아아.”
“…해 줄게요. 그만 우세요.”
“흐읍…끄읍…끄으응”
“합의해준다고요. 진정 좀 하세요.”
“흐으…흐아…정…정말요?”
“하…잠시만요.”
나는 조심스레 내 옷깃을 잡고 있는 정혜의 손을 떼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정혜가 훌쩍거리며 졸졸졸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가장 구석 자리, 그러니까 정혜 동생 은혜가 나를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가서, 나는 자리에 앉아있는 유인영 변호사를 보며 말했다.
“변호사님.”
“네.”
“만약에 합의한다고 하면, 합의금은 얼마가 적정할까요?”
“음…수리 기간에 따라 좀 다르지만, 기본 부품값에, 렌트 비용만 해도 최소 천만 원입니다.”
변호사의 입에서 천만 원이라는 액수가 튀어나오자, 나란히 앉아있는 고딩들의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고작 천만 원에 이럴 거면서 어떻게 이억짜리 뽀르쉐에 올라탔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달달 떨면서 앉아있는 개노답 삼자매를 바라보며, 존나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멋있고 시원하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고, 싫은 티를 내면서도 꾸역꾸역 해줘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명백히 후자였다.
“중간에 앉은 학생.”
“…네.”
돈의 위력은 즉각적이고 강력했다.
조금 전까지 눈빛만으로 나를 오체분시해버릴 듯 바라보던 은혜의 태도가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전히 나에 대한 분노가 남아있는 게 보였지만 어떻게든 눌러내려고 노력하는 얼굴은 참 보기 좋았다.
“당신 옆에 앉아있는 이 변호사님 선임하는데 제가 딱 오천만 원 썼어요. 그런데 겨우 천만 원 받고 끝낼 수 있을까요?”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굴욕 진 얼굴로 나에게 고개 숙여서 사과하는 은혜를 보고 있으니 희열이 장난 아니었다. 역시 싸가지 없는 것들은 참교육이 제맛이었다.
하지만 동생을 너무 스파르타식으로 교육 했다간, 언니의 호감도가 떨어질 수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둬야 했다.
아쉬웠지만, 정혜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도도한 아름다운 고양이 같아서 언젠가는 한번 따먹고 싶었는데, 이번 사건 덕분에 곧 시식의 시간이 찾아올 것 같았다.
아침에만 해도 완전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오후 정도는 괜찮은 날이었다.
“후우…원래는 절대 안 해줄 생각이었는데…좋은 언니 둔 거,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사세요.”
“그…그 말은…”
예상치 못한 합의 각이 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지는 은혜의 얼굴을 보고 있기 싫어서,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유인영 변호사를 보며 말했다.
“합의 진행해 주세요. 변호사님.”
“천만 원은 정말 최저로 잡은 금액인데, 천만 원으로 합의해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천만 원으로 해주세요.”
나는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등 뒤에서 개노답 삼 자매들이 연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게 들렸지만, 게네한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돌아보진 않았다.
나는 일어서서 정혜를 바라봤고, 내가 바라보자 정혜는 기다렸다는 듯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정말 감사합니다!!”
평범한 합의였다면 극진한 감사 인사까지 할 필요야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했던 눈물의 호소 때문에, 완강했던 내가 태도를 바꿔 합의를 해줬다는 것을, 정혜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베풀었을 뿐이고, 정혜는 나에게 압도적으로 감사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서로 감사해 하는 게 아니라, 한쪽이 한 쪽에게 압도적인 감사를 해야하는 일방적인 관계에서는 마음의 빚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동생 때문에 정혜는 나에게 커다란 마음을 빚졌다. 앞으로는 나에게 마음이 구속된 채, 목줄에 묶여 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훌륭했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정혜가 부담해야 할 마음의 빚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다.
“정혜 씨, 잠깐 나가서 저랑 얘기 좀 하시죠.”
“네? 아, 네. 그럼요.”
나는 정혜를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복도 한구석에 있는 가로로 긴 의자에 정혜를 앉혀놓고, 나는 옆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두 컵 떠왔다.
“아, 감사합니다.”
정혜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내가 건네는 종이컵을 받아들었고, 나는 정혜에게 컵을 건네고는 정혜의 옆에 앉았다.
츠릅-.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혜도 물컵을 멍하게 바라보더니 입을 벌리고 물을 조금 들이켰다.
조용히 물을 마시는 정혜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더 자세히 말하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보였다.
복잡한 것도 정도가 있지, 문제가 너무 복잡하면 시도할 엄두조차 안 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는, 인생의 위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기적을 바라고는 했다.
“뭐하다 오셨어요? 아까 되게 급하게 뛰어오시던데.”
“오늘 신입생 환영회라서…아, 제가 신입생은 아니고 과대표거든요.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많았는데…경찰서에서 연락 오자마자 다 내팽개치고 왔어요.”
“대학생이었구나…부모님은요?”
“음…돌아가셨어요. 오 년 전에.”
“이런…괜한 걸 물었네요.”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전부 내 탓이라고 말하던 정혜의 태도는 단순히 언니로서의 그것이 아니었다.
부모의 태도였고, 자세였다.
부모가 있었다면 아직 이리도 젊은 정혜가 굳이 부모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책임감은 오로지 남은 사람의 몫이었다.
“괜찮아요. 시간도 오래 지났고…그래서 이제는 뭐…”
괜찮다고 말하는 정혜의 얼굴이 전혀 괜찮지 못해서, 나는 말을 돌렸다.
“아, 제 이름은 아세요?”
“아…그…아니요…죄송해요.”
“뭘 죄송까지야. 제 이름은 김민준이에요. 정혜 씨.”
내가 이름을 알려주자 정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 정도 내 이름을 곱씹었다. 까먹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까먹으려야 까먹을 수 없게끔 만들어주면 되니까.
나는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선 넘는 질문 하나만 할게요. 정혜 씨.”
“네. 민준 씨. 얼마든지 하셔도 돼요.”
“합의금…낼 수 있겠어요?”
“아…”
돈 얘기가 나오자 정혜의 얼굴이 급하게 어두워졌다.
스턴에 걸린 듯 부들부들 떨리며 멈춰있는 정혜의 입술과 눈동자에서 실시간으로 생기가 쭉쭉 빠져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든…어떻게든 내볼게요. 아마 다른 애들 부모님들도 같이 분담해주실 테니까…”
“뭐, 그렇겠죠. 그런데요, 정혜 씨. 저는 연락받고 바로 왔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경찰서에 있었어요. 근데 저 애들 보호자로 맨 처음 온 게 정혜 씨에요. 다른 학생들 부모님이 아니라.”
“아…”
“뭐, 일하시느라 바쁘신 거겠죠. 이런 일로도 곧장 경찰서에 올 수 없을 만큼, 빠듯하신 분들일 거예요.”
“네…”
정혜를 생각해서 돌려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개노답 삼자매의 가정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얘기였다.
사실 보호자의 도착 여부를 떠나서 돈 얘기만 나오면 벌벌 떨었던 애들의 태도만 봐도 거의 확실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요…들어보니까 어제 동생분, 그러니까 은혜 양 생일이라서 친구들끼리 술 먹다가 이런 짓을 했다네요. 태도를 보니까 은혜 양이 자동차에 올라가자고 먼저 한 것 같고…말하자면 주동자라는 거죠.”
“정말…죄송합니다.”
“됐어요. 그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보호자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에요.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어쩌면 은혜와 정혜 씨한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도 있겠죠. 하자고 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뭐, 그런 이유로요.”
심지어는 랭크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임 한판에서조차, 상상을 초월하는 정치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판에는 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천만 원을 여유롭게 감당해낼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다짜고짜 자잘못을 따지진 않겠지만, 결국 비율 조정이 시작되면 정치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같이 무언가를 잘해낼 때는 예의로라도 서로에게 공을 돌리는 법이지만, 반대로 다 같이 망했을 때는 꼭 실패의 탓을 돌릴만한 희생자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수없는 정치 경력으로 따져봤을 때, 이번 판의 당선자는 무조건 은혜 정혜 자매였다.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같이 잘 못 했는데…그건 너무…”
정혜가 쥐어 잡고 있는 종이컵이 부들부들 떨렸다. 컵 안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수면의 움직임이, 불안해하는 정혜의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뭐, 따지다 보면 결국 얼마씩은 나눠서 내겠죠, 다 같이했으니까… 그런데요, 돈 때문에 싸우는 것만큼 지겨운 게 없잖아요. 그리고 어른들만 싸우면 다행인데, 애들 사이까지 틀어질 수도 있고…그래서요, 정혜 씨.”
“…네?”
“일단 번호 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