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플쓰는 밤의 황제-20화 (20/270)

〈 20화 〉 20화

나는 혹시 몰라 포인트를 전부 현금으로 교환한 다음 차를 몰아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박아놓고 명품관으로 걸어가니 명품을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 수도 없이 들어본 유명한 명품 브랜드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위축될 만도 했는데, 낮에 슈퍼카들을 수백 대나 보고 와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오…여깄네. 로우렉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로우렉스 매장으로 들어갔다.

시계는 몰라도 로우렉스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인지도를 가진 명품 브랜드였다. 티 나게 사치를 부리는 게 목적인 나에게 로우렉스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가자마자 정중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고풍스러운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넓은 매장 곳곳에 서 있었고, 금은방처럼 튼튼해 보이는 유리 진열장 안에는 말로만 듣던 로우렉스 시계들이 멋들어지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진열되어 있는 시계를 대충 둘러보며 영혼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친절해 보이는 여직원에게 가서 물었다.

“여기서 알이 제일 큰 모델이 뭐죠?”

“네, 고객님. 이쪽에서 보시면…”

여직원이 진열된 제품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제품이 저희 매장에서 가장 사이즈가 큰 제품입니다. 베젤과 인덱스 부분이 다이아로 세팅되어 있어서…”

직원은 설명을 쭉쭉 이어나갔다. 가장 잘 나가는 제품이라든지 한정 수량이라든지 하는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라, 제품의 탄생배경부터 시작해서 들어간 기능과 디자인의 의미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게 확실히 물건이 아니라 역사와 판타지를 판다는 명품 매장다웠다.

하지만 다이아가 박혀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유구한 역사 따위 나 같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로우렉스 마크와 촘촘히 박혀있는 다이아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박혀있는 다이아도 엄청나게 컸다.

이 정도면 손목시계가 아니라 손전등으로 써도 될 정도로 밤거리에서 독보적인 블링블링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직원의 설명을 얌전히 듣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물었다.

“지금 사면 바로 차고 갈 수 있는 건가요?”

“네. 고객님. 가능하십니다.”

“그럼 이걸로 주세요.”

“착용은 따로 안 해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사실 착용을 해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나는 너무 맘에 들어서 차보지도 않고 쿨하게 구매하는 척 무심하게 말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니 여직원이 시계를 포장해서 가져왔고, 나는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4천 570만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할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거 체크에요.”

“아아…네. 고객님. 알겠습니다.”

여직원이 약간 당황하면서 카드를 조심스레 긁고는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매장 안에서 바로 포장을 풀고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백화점에서 나왔다.

순식간에 4천만 원 넘게 털려서 통장 잔고가 천만 원 남짓으로 줄어들었지만, 손목에서 느껴지는 돌덩이처럼 묵직한 시계의 무게 만큼 마음은 든든했다.

오늘 지른 뽀르쉐와 로우렉스는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밥벌이 도구였으니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판타지로 치자면 드워프 마을에 가서 전 재산 꼴아박고 풀 미스릴 갑옷과 마법검을 맞춰 온 상황이었고, 무협으로 치자면 만금을 쏟아부어서 만년설삼과 무공비급을 구해 온 상황이었다.

좋은 장비들을 싹 세팅해놔서 그런지 내 몸에서는 알 수 없는 가오력이 마구 상승 중이었다.

‘다 뒤졌다…다 뒤졌어…’

나는 밤이 되면 어김없이 강남 거리로 쏟아져나올 부나방 같은 사람들에게 마음 속으로 선전포고를 보냈다.

졸부가 무엇인지, 영앤 리치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는 대신, 어마어마한 관람료를 챙겨갈 생각이었다.

온몸에 쑤셔 박힐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가 벌써부터 달콤했다.

부아아앙—.

나는 뽀르쉐를 타고 강남 뒷골목 향해 내달렸다. 이제 곧 5시였으니 트레이너 쌤을 마중하러 가야 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자랑하고 싶은지 뽀르쉐는 듣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배기음을 우렁차게 뱉어냈다.

사실 속이 뻥 뚫리는 걸 넘어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배기음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더 쏠릴 테니 나쁘지는 않았다.

‘자, 드가자~’

조금 더 돌아가야 했지만, 굳이 강남 뒷골목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수많은 상가와 술집, 그리고 업소들이 양 사이드로 길게 뻗어있는 불야성의 거리는 이제서야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는 계획한 대로 뚜껑을 열고 롤렉스를 걸친 손목을 차창에 떡하니 걸친 채 유유히 강남 뒷골목을 가로질렀다.

뒷골목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차가 거의 기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이걸 노리고 있던 거라 답답하지는 않았다.

‘크. 바로 이거지.’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각양각색이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분노에 차서 씨익씨익 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이나, 대놓고 휘파람을 불며 차를 천천히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응은 다 달랐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확실했다.

계획했던 돈 복사 버그가 제대로 먹혀들어서 기분이 무척이나 유쾌했다.

나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시선을 음미하면서, 피트니스 클럽이 있는 빌딩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대놓고 트레이너 쌤에게 문자를 보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주차장 안에서 뚜껑을 열어놓고 기다리기도 뭐해서, 뚜껑을 닫고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주차장으로 내려온 트레이너 쌤이 보였다.

“시은 쌤, 여기요!”

“헐! 민준 씨!!”

나는 차에 탄 채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힐을 신어 한층 더 부각된 콜라병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오프 숄더 원피스에, 얇은 가디건만 하나 걸친 그녀가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간지가 좔좔 흐르는 뽀르쉐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나에게 걸어왔다. 길게 뻗은 그녀의 목에는 보기만 해도 관능적인 검은 초커가 걸려있었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었다.

그녀에게도 잘 어울렸지만 딱 개 목걸이같이 생긴 게 연주에게 걸어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 잠시만요.”

나는 운전석에서 내려 그녀가 탈 수 있도록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민준 씨.”

“뭘요. 시간 내주셔서 제가 고맙죠.”

턱-.

그녀를 보조석에 앉혀놓고, 나는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앉았다.

“예약해놓은 가게 있다고 하셨죠? 네비에 찍게 위치 좀 알려 주실래요?”

나는 그녀를 보며 친절하게 물었는데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음…있잖아요. 민준 씨.”

“네, 시은 쌤.”

“사실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에 비싼 걸 얻어먹기는 좀 그러니까 그냥 적당한 고깃집으로 예약했거든요…”

“네, 그런데요?”

“민준 씨 차를 보니까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대지 말고 얌전히 비싼 거나 얻어 먹을 걸…진짜…나는 왜 이렇게 먹을 복이 없을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정말 후회하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히려 대놓고 말하니까 속물 같다기 보다는 솔직해 보여서 귀엽고 유쾌했다.

“왜요. 지금이라도 예약 취소하면 되죠.”

“그러기엔 너무 또 속물 같잖아요.”

“조금 그렇긴 하네요.”

살짝 놀리니까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나를 힐끗 노려봤다.

“와~ 그렇게 안 봤는데…PT 신청서에 쓰신 거 보니까 저보다 5살이나 어리시던데…누나한테 이럴 거예요?”

“죄송합니다, 누님.”

“누님은 너무 갔고, 누나라고 불러.”

“네. 누나.”

“어이구, 귀여워라. 우리 동생.”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저보단 누나가 훨씬 귀엽죠.”

“어마어마. 얘 뭐래니? 나는 큐트보다는 섹시인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은 누나는 기분이 좋은지 웃고 있었다.

뭔가 놀리고 싶은 마음에, 나는 시은 누나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손수 안전 벨트를 매주었다.

누나와 나의 육체가 닿을 듯 말듯 가까워졌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는지 누나의 몸에서는 향긋한 바디 워시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흐응…어린 친구가 제법 매너가 있으시네요?”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안전 벨트를 매주는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놀라기는커녕 무척이나 여유로운 태도였다.

연주라면 어버버 거리면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볼을 붉히고만 있을 텐데 역시 시은 누나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딸깍-.

나는 안전 벹트를 매주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괜히 여기서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가는 오늘 산 차에서 카섹스를 해버릴지도 몰랐다. 사실 물티슈라도 있었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였지만 아쉽게도 물티슈는커녕 휴지도 한 장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크흠. 예약한 곳 불러줘요, 누나. 오늘은 일단 거기로 가고 다음에 또 비싼 거 사줄게요.”

“헐~ 벌써 다음 약속까지? 와~ 민준이 이놈 이거 어린 자슥이 완전 선수였네…나 오늘 좀 잘 못 걸린 거 같은데?”

“선수는 무슨. 저 지금까지 여자친구 한 명 없었는데요.”

“아~ 민준아 그거 아니야. 요즘은 그런 거 잘 안 먹혀. 순진한 척한다고 여자가 남자를 다시 보거나 그러지 않는다니까?”

“…”

“응…? 설마…진짜로…모태 솔로야?”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섹스는 몇 번 했지만 따져보면 아직 여자친구는 없었다. 미희 누나는 당연히 아니었고, 연주와도 정확히 말하면 썸의 단계였다.

물론, 연주야 내가 사귀자고 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감동의 눈물즙을 광광 뽑아내며 결혼까지 하자고 할게 분명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굳이 여자 친구에 집착해서 좋을 게 없어…’

어플에서 무슨 퀘스트가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나의 행동을 제약하는 요소들을 만들어선 안 됐다.

그러니 여자 친구보다는, 여자 노예나 원나잇 섹파를 만드는 쪽으로 길을 터놨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은 심상치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내 얼굴에는 조그마한 그늘이 생겨났다.

“저…미안해…민준아…”

“됐어요. 빨리 네비나 찍어요.”

“으응…알겠어.”

나는 시은 누나가 찍어준 곳으로 차를 몰았다. 마침 강남 유흥가 한가운데에 있어서 뚜껑 열고 플렉스 포인트 빨기에 딱 좋아 보였다.

과아아앙-.

예상한 대로 시은 누나처럼 눈알이 빡 튀어나올만한 미녀를 태우고 다니니까 몰려드는 시선이 장난 아니었다. 강남 거리가 나를 위해 준비된 런웨이 같았고 사람들의 시기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느껴졌다.

잔뜩 오르고 있을 플렉스 포인트를 생각하니 밥을 먹기도 전에 배가 불렀고 여자 친구 얘기를 하며 상처받았던 마음까지도 힐링되고 있었다.

시은 누나도 나 못지않게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지 표정이 훤했다.

“아~~ 좋다. 사람들이 엄~청 부러워하네. 헐…저기 봐봐 민준아. 딱 봐도 클럽 죽순이 같은 년들이 나 죽일 듯이 째려본다.”

“싸움 나니까 그냥 무시해요. 누나.”

“괜찮아. 저렇게 술만 먹고 다니는 멍청한 년들은 한주먹 거리도 안 돼.”

“누나는 술 안 마셔요?”

“나도 마시지. 하지만 운동으로 다 빼내서 괜찮아.”

“아, 예.”

“뭐지?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운동하는 사람답게 시은 누나는 약간의 허세가 있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은 누나가 표정을 조금 찡그리고는 나를 흘겼다. 아무래도 누나는 운동에 대해 굉장히 진심인 것 같았다.

“다 왔다. 여기 맞죠?”

나는 빌딩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으음…맞아. 근데 민준이 너…”

“아~ 맛있겠다. 빨리 먹고 싶네요. 누나.”

뭐라고 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누나의 말을 끊었다. 누나의 귀여운 허세를 듣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놀리고 싶었다.

연주가 소유욕을 자극하는 스타일이라면, 시은 누나는 가만히 있어도 그냥 놀리고 싶은 스타일이었다. 생김새와는 다르게 알면 알수록 성격이 엄청 털털해서 그런 것 같았다.

“…칫.”

“…뭐야. 누나 삐졌어요?”

“뭐래. 됐고 빨리 주차나 해. 고기 먹으러 가고 싶다며.”

삐진 게 확실했지만 바로 풀어주면 재미가 없었기에 나는 개의치 않고 심혈을 기울여 주차했다.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려 했는데 그보다 시은 누나가 먼저 내려버렸다.

틱틱대는 수준을 보니까 생각보다 더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

“크흠. 화 풀어요. 누나. 그냥 장난친 건데…”

“누가 뭐래?”

“아니, 25살이나 먹어놓고 뭐 이런 거로 삐져요.”

“이씨~ 나 안 삐졌다고.”

“놔 으안 삐즜다그.”

“야, 너 죽을래!!”

누나는 뒤를 홱 돌더니 나를 향해 주먹을 올려 보였다.

그러자 슬립처럼 얇은 가디건 위로 누나의 탄탄한 이두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쿡쿡.

나는 탄력 있게 솟아난 누나의 이두를 콕콕 찌르며 회심의 멘트를 준비했다.

헬창들 기분 풀리게 해주는 멘트쯤이야 뻔해도 너무 뻔했다.

“와~ 누나. 이렇게 보니까 이두 진짜 장난 아니네요. 어쩌면 이렇게 모양도 예쁘고 근질도 좋아요? 비결이 따로 있는 거죠?”

“하. 당연하지. 너도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매일 꾸준히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

“역시. 우리 시은 누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주먹을 잡아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팔짱을 꼈다. 아침에 신체 강화로 키를 늘려 놔서 다행이었다. 힐은 신은 누나와 아슬아슬하게 키 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운동도 좋지만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요. 우리.”

“와……이제 보니까 진짜 선수였네…모솔을 개뿔…”

누나는 그러면서도 팔짱을 빼지 않고 내 팔에 끌려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 빌딩 안으로 향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근육에 비해 나에게 끌려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역시 근육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두 칭찬은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