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화
플렉스(flex).
힙합 쪽에서 사용하던 트렌디한 유행어였다가 하도 많이 쓰여서 이제는 일상용어가 되어버린 그 단어.
뭔가 더 유쾌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플렉스라는 단어의 본질은 ‘사치’와 ‘과시’였다.
겸손은 개나 줘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마음껏 소비하고 자랑하는 게 바로 플렉스였다.
그런 의미에서 플렉스 포인트를 얻는 법은, 아주 다양하고 또 간단했다.
속옷 가게에서 돈지랄을 했을 때나 무려 오만 원을 팁으로 뿌렸을 때, 또 팔자 좋게 점심 늦게 내려와서 연주 같은 미녀를 대동하고 특급 호텔 로비에서 체크아웃했을 때.
돈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행동을 하면 알아서 플렉스 포인트가 쌓인다는 걸 확인했고, 쌓여있는 포인트를 보고 이 시스템이 상당히 쏠쏠하다는 것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어떤 식으로 하든 적자가 날 수준은 아니었다.
‘플렉스 포인트라…하하…사치를 부리면 돈이 또 들어온다니…’
섹스에 이어서 주어진 과제가 사치 부리기라니. 이 정도면 정말 돈 복사 버그라도 봐도 무방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돈이 펑펑 쏟아지는 건 아니었고, 섹스를 해야 한다거나 사치를 부려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남들은 오히려 섹스하고 사치를 부리기 위해 돈을 버는데, 나는 섹스하고 사치를 부리며 돈을 벌게 되었으니 이걸 노동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섹스야 일단 미희 누나랑 연주만 있어도 충분하고…플렉스 포인트가 문제인데…어떻게 하면 예술적으로 사치를 부릴 수 있을까나…’
나는 플렉스 포인트를 위한 사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런 생각도 없이 돈을 펑펑 써버려야 진정한 의미의 사치겠지만, 내가 부려야 하는 사치는 조금 달랐다.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소소한 사치가 아니라, 최대 다수의 최대 욕망을 끌어낸다는 목적성이 분명한 사치였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진 걸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자동차를 먼저 사야겠지?’
생각 끝에 나온 결론은 자동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특정 다수에게 가장 쉽고 빠르게 사치를 부릴 방법은 자동차밖에 없었다.
길거리에서 비싼 차를 타고 돌아다닐 때 몰려드는 부러움과 욕망의 시선, 나에게는 그 흔하고 일상적인 시선 하나하나가 다 돈이었다.
‘할 것도 없는데 생각난 김에 바로 가볼까?’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나는 망설임 없이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양재동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중고 외제차 매장으로 향했다.
신차는 차가 출고 될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중고차의 경우 딜러에게 돈만 건네면 곧장 차량을 인수하는 게 가능했다.
몇 개월 동안 기다리면서 굳이 신차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중고차를 사야 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흔히들 말하는 호갱을 당해서 침수차량을 덜컥 산다든지 하는 경우였으나,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그저 하늘에 맡겨야 했다. 그리고 나는 평범한 호갱들과는 입장이 조금 달랐다.
호갱 탈출할 때까지 중고차에 관해 이것저것 공부를 할 바에야, 그 시간에 침수차라도 타고 강남 뒷골목이라도 돌아다니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외관만 멀쩡하고 굴러만 간다면 플렉스 포인트는 쌓일 테니까.
“집에 잘 들어갔어요?”
-네. 민준 씨. 그…전화해주셔서 고마워요오…
“전화하라니까 연주 씨가 안 했잖아요. 걱정되게.”
-아…엄마랑 좀 얘기할 게 있어서…
중고차 매장에 도착해서. 나는 연주와 통화를 하며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산뜻하고 무심하게, 실내 주차 공간에 정렬된 수많은 외제차들 사이를 거닐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중고차 갤러리라 그런지 주차 공간이 대형 마트 주차장보다 훨씬 넓었다. 그 넓은 공간 안에 수억짜리 외제차 수백 대가 정갈하게 주차되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서, 속으로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함을 유지했다.
플렉스의 기본은 졸부 스웩이었고, 진짜 졸부라면 이런 매장이야 밥 먹듯이 들릴 테니 굳이 놀랄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 차를 보여주기 위해 양복을 차려입은 딜러 아저씨가 한 발자국 정도 뒤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고, 나는 딜러 아저씨를 수행 비서처럼 대동한 채 삐까뻔쩍한 외제차들을 대충대충 훑어보며 연주와의 통화를 이어나갔다.
“집 들어가니까 어머니가 많이 뭐라고 하셨어요?”
-그…그랬긴 했는데…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연주 씨, 진짜 감금된 건 아니죠?”
-당분간은…괜찮을 거에요…아빠가 마침 한국에 돌아오셔서…
“…뭐, 그래요. 집안 얘기는 천천히 해줘도 되니까 좀 쉬어요. 연주 씨 괜찮으면 됐네요.”
-우으…네에…민준 씨…
슬슬 연주와의 통화를 마치려는데 마침 눈앞에 마음에 드는 차가 한 대 보였다. 차알못인 내가 봐도 디자인이 정말 쌔끈했고 딱 보니 뚜껑도 열릴 것 같았다. 나는 통화를 마무리하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뒤따라오던 딜러 아저씨에게 물었다.
“딜러님. 이거 뚜껑 열리는 모델 맞죠?”
“아, 이 뽀르쉐요? 이야, 고객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게 바로 작년에 나온 최신식 모델인 데다가 3천 킬로도 안타서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거든요. 뚜껑 열리는 오픈탑 모델 맞고, 풀옵션으로 나온 녀석이라 마음에 드시는 차 없으시면 제가 추천해 드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바로 찍으셨어요? 하하. 젊어 보이시는데 차를 정말 잘 보시네요.”
역시 딜러답게, 아저씨는 입담이 참 좋았다. 사실 무슨 매물을 찍든 대충 이런 반응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그냥 예뻐서 찍었는데 운이 좋았네요. 한번 타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고,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답하고는 차 키만 수십 개가 달린 키 체인에서 키를 하나 빼더니, 능숙하게 뽀르쉐의 차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운전석에 들어가서 앉자 아저씨는 운전석에 달린 수많은 기계 부품들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대충대충 설명을 들어가며 괜히 핸들을 잡고 좌우로 꺾어봤는데 심지어 이 차는 핸들의 손맛도 괜찮았다.
디자인도 이쁘고 손에도 잘 달라붙으니 뚜껑만 잘 열리면 고민 없이 바로 사도 될 것 같았다.
‘뚜껑…뚜껑을 보자…’
내가 굳이 뚜껑에 집착하는 이유는, 뚜껑의 유무에 따라서 어그로 차이가 심하게 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 같은 경우에는 비싼 외제차를 봐도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나와 같을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에는, 그중에서도 서울에는 외제차가 너무 많이 굴러다녔다.
어떨 때는 도로 위에 국산차보다 외제차가 많이 보여서, 지나가다 외제차를 봐도 '아, 또 한 명의 부자가 외제차를 타고 지나가는구나.' 정도의 심심한 감상뿐이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는 경우에는 정말 확 달랐다. 뚜껑이 열리는 기능이 특별한 게 아니라 운전석에 누가 타고 있는지 훤히 볼 수 있다는 게 특별했다.
‘나 같은 젊은 놈이 이거 타고 뚜껑 열고 다니면 진짜 열 받아서 못 참지…’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쉬웠다.
예를 들어 택배 상하차를 마치고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겨우 이끌어서 뚜벅뚜벅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것으로 보이는 젊은 놈이 뚜껑 열리는 슈퍼카를 타고 달리고 있다면, 거기다가 조수석에는 쭉쭉빵빵한 미녀까지 태우고 분위기 좋게 하하호호 웃고 있다면, 질투와 시기를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무 분해서 죽창이라도 한 방 꽂아주기 전에는 잠도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강력한 광역 어그로를 위해서는 간지나는 차의 겉모습은 기본이었고, 더 나아가 뚜껑을 열어서 누가 그 간지나는 차를 몰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뚜껑 열리는 버튼은 어디 있나요?”
“아, 여기 있는 이 버튼을 누르시면 이렇게….”
지이잉-.
딜러 아저씨가 대시보드 중앙에 붙어있는 버튼을 띡 누르니까, 위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재질의 뚜껑이 촥촥 접히더니 차량 뒤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슈퍼카답게 뚜껑도 멋지게 열렸고, 뚜껑이 열리면서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니까 운전석에 앉아만 있을 뿐인데도 남자의 가오가 한층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딜러 아저씨에게 가격을 물어봤다.
“좋네요. 이거 얼마에요?”
“음…사실 차가 신차나 다름없어서 감가가 많이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원래 출고가는 2억5천이고 현재 판매가는 1억7천입니다.”
중고차치고 비싼 가격인지 딜러 아저씨가 신중한 태도로 가격을 불러주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예산인 2억 안쪽에 여유롭게 들어오는 가격이었고 차도 아주 마음에 들어서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구매 의사를 밝혔다.
“계좌 이체해드리면 바로 가져갈 수 있는 거죠?”
“예? 예, 고객님. 물론이죠. 그런데…이렇게 빨리 결정하셔도 괜찮으실런지…단순 변심으로 인한 환불은 좀 어려워서…”
“저한테 뭐 사기 치셨어요? 혹시 침수차거나 미터기 조작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예? 그럴 리가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괜찮아요. 타보고 마음에 안 들면 한 대 더 사죠, 뭐.”
내뱉으면서도 스스로 졸부 스웩에 젖어들 만큼 허세 가득한 대사였다.
내 대사에 아저씨도 감명을 받았는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상당히 달라졌다.
그저 돈 많아 보이는 젊은이가 아니라, 무지막지한 큰 손 고객 정도로 진화했달까.
“사장님. 그럼 바로 계약서 쓰러 가시죠.”
호칭도 고객님에서 사장님으로 바뀌었다. 사장님은커녕 무직 백수 재수생이었지만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아저씨와 사무실로 가서 곧장 계약서를 작성했다. 차를 한 대 사려면 작성해야 할 서류가 꽤 많았는데 읽어보기도 귀찮아서 대부분 아저씨한테 맡겨버렸다.
서류 작성을 끝내고 사무실에 적혀있는 계좌로 1억7천을 한 방에 쏴주니까 딜러 아저씨는 다음에도 꼭 찾아달라며 극진한 태도로 차 키와 함께 명함을 한 장 건네주더니, 뽀르쉐가 있는 곳까지 나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해주었다.
“궁금하거나 불편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해주십시오!!”
딜러 아저씨에게 폴더 인사를 받으며, 나는 차를 몰아 중고차 판매장에서 빠져나왔다. 당연히 뚜껑은 타자마자 열어 놓은 상태였다.
‘후우…존나 떨리네…’
모든 게 정돈된 주차 공간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도로로 나오니까 확실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완전 개초보 운전자였다. 이제까지 운전해 본 차라고는 운전 학원 차량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첫차가 바로 이 뚜껑 열리는 뽀르쉐였으니 체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나마 드라이빙 센스는 있는지 차를 모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운전 학원 똥차와는 달리 살짝만 밟아도 쓩쓩 나가는 이 최신식 뽀르쉐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럼…강남대로 쪽으로 한 번 가볼까?’
나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서 강남으로 향했다. 우선은 차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제한 속도보다 꽤 느리게 달렸는데도 강남까지 가는 동안 경적 소리는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만 느리게 밟아도 빵빵거리는 사람이 많은 거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게 바로 뚜껑 열리는 스포츠카의 위엄인 것 같았다.
나는 강남대로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괜찮아 보이는 피트니스 클럽을 찾아다녔다.
강화를 해놔서 골격이라든지 전체적인 몸의 맵시가 무척이나 좋아지긴 했지만 원래 붙어있던 자잘한 살들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운동이 좀 필요했고, 강화된 신체의 운동 능력도 궁금했다.
‘저기 괜찮겠네…’
대로변에서 바로 보이는 커다란 빌딩 외벽에 ‘grand open’이라는 상투적인 문구와 함께 피트니스 클럽의 개장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빌딩 주차장을 향했다. 다행히 주차장에 자리가 많이 비어있어서 어렵지 않게 주차를 마치고 내려서 피트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띠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곧장 피트니스 클럽의 내부였다. 새로 오픈한 만큼 내부 인테리어는 굉장히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기구만 잔뜩 갖다놓는 평범한 동네 헬스장과는 확실히 자태가 달랐다.
벽에 붙어있는 전면 거울하고 헬스 기구들만 치우면 분위기 좋은 카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나는 내부를 둘러보며 정면에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여자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카운터 직원 같았고, 다른 한 명은 트레이너 같았다.
‘와……’
강남이라서 그런지 트레이너의 외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고양이 상 이었는데, 눈이 유독 컸고, 매끄러운 턱선과 오뚝 솟은 콧날, 그리고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까지 합쳐져서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색정적이었다.
하지만 외모보다도 더 장난이 아닌 건 바로 그녀의 핫바디였다.
앉아있는데도 콜라병 몸매라는 게 딱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굴곡감을 자랑했는데, 너무 굴곡져서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벗어나 만화나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육덕 여캐의 느낌이 솔솔 풍겨왔다.
모두가 현실에 있는데 자기 혼자만 포토샵으로 보정을 받은 것 같은 이기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기에 나는 참아보려 했지만, 그녀의 몸을 힐끗힐끗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선 관리가 안 되는 건 내 탓이 절대 아니었다. 이건 남자라면 준수할 수밖에 없는 지독하고도 불합리한 법칙에 가까웠다. 적어도 남자라면 그녀의 사기적인 몸을 좋든 싫든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소아성애자라고 해도 적어도 단 한 번은 그녀에게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자 단위에 새겨진 명령 같은 거라서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미친놈아. 이러다가 시선 강간으로 고소당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