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40)

[TS] 은하보안관 이브 27편

<--  -->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잠드셨습니다.”

“아으…“

“지금은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복잡한 일은 생각하지 마시고요. 기다리세요,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겁니다. 어제 하루 만에 시설을 전부 뒤집어 확인했어요. 푹 쉬시면 나을 겁니다.”

“어으…”

이브의 목구멍에 뇌수가 녹아내려 가득 채운 듯 뜨거운 것이 가득 들어찼다. 성대는 눅눅하게 젖어 옹알이하는 것처럼 도저히 제대로 된 말을 자아내지 못했다. 소녀의 몸은 뜨거웠고,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표정은 도저히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심했다. 자신이 이토록 한심했던가.

알터는 선글라스 아래에 연민의 눈빛을 숨긴 채 소녀에게 꼭 필요한 말만 해주었다. 그래서 더 야속했다. 이브는 자신이 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발정기를 유지시키는 다른 스위치가 있어서 끝나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지도 모른다. 알터의 품에 안겨 있으면 자꾸만 꿈에서처럼 멍청해지고, 아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아직 저희는 안전한 숙소 안에 있으니까요.”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 알터의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에 스며들었다. 중후하게 울리는 알터의 목소리는, 소녀의 뇌수를 녹일 만큼 지나치게 달콤했다.

뇌를 적시는 그 목소리는 너무 따스해서, 시간을 느릿하게 바꾸고 흐물흐물한 행복감에 적셔갔다.

소름끼쳤다.

그래서 이브는 더 냉랭해졌다.

한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부하에게 하달했다.

“…이거 놔라!”

이브의 본모습은

사내의 품에 안겨 질질 짜는 계집이 아니었기에.

“숨기고 있는 걸 빨리 말해라. 심신미약인 상태에서 뭘 들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이게 30살 더 먹더니 능숙하게 사실을 숨기려 드는구나.”

그래서 더 냉랭하게, 알터의 의중을 파악하고 제 의지를 관철했다.

“말했지, 빨리 숨기고 있는 걸 말해. 너도 내가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애새끼처럼 보이냐?”

호통치듯 급변한 소녀의 목소리에 호텔의 공기조차도 얼어붙었다. 알터는 분에 가득 차 끝이 떨리는 소녀의 목소리에서 퀘이사를 읽었다. 그래서 어쩌면 마음을 놓기도, 그리고 어쩌면 긴장하기도 했다.

이브는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발그레한 뺨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붉게 타는 눈동자만큼은 날카로웠다. 입술을 짓씹고 나오는 목소리에 알터는 이브의 어깨를 잡고 서서히 떨어트려 주었다.

“어서 말하라고!”

소녀의 재촉에 알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현 37지구의 소유주인 테론 아스바르가, 당신의 노예계약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숨을 삼키고 충격받을 법도 한데,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없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허, 내가 무슨 노예계약이야?”

“조작이겠지요. 조작이었어도, 지장은 진짜였습니다.”

알터는 태블릿을 꺼내어 찢기 전에 스캔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겉면에는 [신체의 소유권 이전 서류 및 노예계약서]라는 명칭이 버젓이 붙어있었다. 서명란에 이브와 레아의 지장이 찍혀있는 그 서류였다.

이브는 알터의 태블릿을 들고는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액정 위를 휘저었다. 그리고 이브는 지장이 찍혀있을 만한 유일한 계약서를 떠올렸다. 무엇인지를 알고 나니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레아의 고용계약을 했던 그 서류였다.

“언론사에는 그가 알기도 전에 먼저 퍼졌습니다. 당신이 전 37지구의 소유주를 살해한 용의자면서, 그의 아들의 노예라고요. 적당히 조작하고 취합한 가짜 정보들로 만든 공작이었죠.”

“하, 하하…”

이브는 그제서야 바깥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뒤늦게 귀를 기울이자 모여 있는 시위꾼들이 은하보안관을 몰아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저치들은 팻말을 들고, 플랫 에어리어인 80층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떤 돈이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로우 스트리트에 사는 사람들에겐 적은 돈마저도 저렇게 강한 동기를 만들어 내긴 쉬웠으리라.

이브는 뜨거워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하루 기절한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파악했다. 찾으러 와준 알터에게 제 과거의 실수 때문에 민폐까지 끼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제 손으로 저지른 일은 제 손으로 해결 지어야 했다.

“그 소유주라는 사람, 내가 만나서 해결하지.”

“안 됩니다.”

“왜?”

“이미 끝났거든요. 모두 해결했습니다.”

“……”

이브가 일어난 시간은 테론 아스바르와 알터의 회담이 끝난 지 한 시간이 지난 때였다. 이브는 여전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시선을 창밖이 보이는 유리벽면을 향했다.

밖에서 비치는 인공햇빛을 받고 있는데도 표정이 조금씩 어둡게 물들어갔다. 어째서 찍었던 적 없는 문서에 지장이 찍혀 있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해결된 것이 썩 석연치만은 않았다.

지금처럼, 마치 30여 년간 살았던 이브의 삶처럼 남들에게만 휘둘리는 삶이 연속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진취적으로 살 수 있었던 퀘이사의 삶이 아니라, 이건 이브의 삶이었다. 여전히 어린 계집처럼 보호받아야 하고, 지켜져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정말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이브는 복잡한 감정에 휘둘리기보단 당장 파악해야 할 것을 물었다.

“어떤 식으로… 해결했기에 물러났지?”

“가장 깔끔하고 편한 방법으로 해결했습니다.”

“죽여버렸나?”

“아니요, 샀습니다.”

이브는 머리가 띵해졌다. 광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사는 것도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 한 지구의 소유주였던 만큼 사람을 사려면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을 것이다.

“으음… 많은 빚을 지게 되었구나. 나중에 착수금으로 갚을 테니 달아 두어라. 그런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다고 했지?”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입니다.”

“…그 기절하기 전에 갔던 시설은?”

“전부 수색했습니다.”

“아, 그래.”

허탈했다. 정말 알터가 다 해결해버렸다. 소녀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 쓰러졌다. 차라리 다 숨기고, 멍청한 이브처럼 저 든든한 알터의 몸에 맡길까, 그런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퀘이사 라케이니아, 은하보안국의 정의를 실현하는 보안관이었기에. 예전처럼 상황에 대해 직관을 갖고 사건의 본질을 깨우쳐야 했다. 악몽을 꾼 탓인지 약을 먹은 것처럼 사고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예전부터, 잠에서 깨어난 뒤면 마치 외모와 같은 어린 소녀가 된 기분이 들곤 했었다.

지금도 그랬다. 모든 사건은 자기 손아귀 위에 쥐고 흔들리라 생각했더니, 잠든 사이에 다 끝났단다. 나약할뿐더러 무능력하기까지 했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니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음에도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브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거기 뭐가 있었지?”

“아르티 프리세크의 일지와 컴퓨터요. 그리고 세뇌 칩을 심었던 거미 로봇 하나가 있었군요.”

알터는 프리세크의 일지를 보여주었다. 분해한 거미 기계도 보여주었다. 이미 기능을 잃었으니만큼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이브는 알터에게 프리세크의 일지를 받아 펼쳐보고는 내용을 읽었다. 안에는 연필로 쓰인 사소한 일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

2735년 1월 2일

오늘은 죽이 나왔다.

맛없는 죽이었다. 먹고 나서 잠이 쏟아졌다.

몸이 뜨겁다. 많이 뜨겁다. 더워서 땀이 난다.

-----------------------------------------

2735년 3월 17일

오늘은 호박이 나왔다.

노란색 호박이었다. 녹색 호박도 있다고 한다.

어제 하얀 애가 쓰러졌다. 많이 아파보여따.

-----------------------------------------

별다른 내용 없는 일지의 연속이었지만 이브는 그 안에 무언가가 있을지 생각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이브는 그런 애가 있었는지, 누구였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마치 뇌가 발달하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듯, 어린 날의 기억처럼 흐릿해서 같은 곳에 살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이브는 더 많은 정보를 읽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지를 쓴 사람이 여자에 8살, 글씨는 삐뚤빼뚤하고, 그냥 그때 당시의 고아원에 있을 법한 아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일지를 덮은 이브는 눈을 꼭 감았다. 이 사람을 조사할 방법이 없을까…

있었다.

2년간 고아원에서 생활한 후 이브는 튀어나와서 복수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사실상 저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그나마 약한 고아원을 운영하던 조직에 복수하기 위하여 움직였었다. 그때도 발정 나서 기억을 잃기 일쑤였으니 정확한 기억은 남지 않았지만, 일말의 정보라도 지금은 필요했다.

“다시 내려가야 해.”

“아직 시위꾼들은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쉬시지요.”

“헤센11 거리 136, 세이엔 클럽.”

알터는 이브가 주소를 말하자마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통해 반사적으로 위치를 검색했다. 해킹을 통해 라임비의 데이터베이스를 전부 읽어왔기 때문에 근방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 알 수 있었다. 음성적인 골목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 총기사건과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날 받아준 갱이 운영하는 클럽의 주소다. 타이틀 갱. 거기도 조사할 게 있지.”

이브는 결연한 눈동자로 알터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제처럼 엉망진창으로 기절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알겠습니다. 레아가 잠들면 가지요.”

알터는 여전히 레아를 경계하며 말했다. 이브도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험을 무릅써야 하니까.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

알터와 이브가 침실에서 조용히 밀담을 나누고부터 한 시간쯤 지난 시간이었다.

하와이안 셔츠에 머리를 빡빡 민 대머리 남자와 플로라 원피스에 붉은색의 긴 곱슬머리 소녀가 손을 맞잡고 호텔을 나왔다. 언뜻 보면 아버지와 딸 같기도 하고, 삼촌과 조카 사이같기도 한 그들은 상당히 다정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끝자락에는 강화복의 카멜레온 기능 효과로 빛의 입자가 흩날렸다.

호텔 밖은 천여 명가량의 시위꾼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은하보안관을 규탄하는 팻말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같이 구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도 없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했다. 몇몇은 당장 내일 먹을거리 살 돈을 위해 나왔으리라.

“살인자를 내놓아라!”

“은하보안관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 있냐! 애도 납치한 다음에 기억 조작한 거 아니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붉은 곱슬머리의 소녀는 생각했다.

당최 저들이 무슨 상관인가. 그저 돈 받고 일하는 전문 시위꾼들일 뿐이다. 당사자 간에 협의한 내용이니 명분을 잃은 시위꾼들은 금방 수그러들겠지. 그러나 돈을 받은 이상 계약한 시간까지는 아마 저 자리에서 못 박고 살지도 모른다.

소녀는 무심하니 거구의 사내 손을 잡고는 시위대 곁을 지나갔다. 일부러 군중들을 외면했다. 그들을 볼수록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던 30년간의 과거가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저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본질은 선한 사람이었기에 도와주고 싶기도 했다. 언젠가 모든 것을 되찾게 되면 도와줄 수도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본인부터 바뀌어야 했다. 목표 없이 그저 살기만을 위해 찌들어 있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바뀌어야만 했다. 바뀌어야만 했다.

소녀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만큼, 저들에게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것들에 집중해보려 했다.

유달리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면, 망토자락에 야한 검은 속옷만 입고 다니던 때보다 더 거슬리는 치맛자락이었다. 기상나노머신들이 일으키는 산들바람에 치맛자락을 몇 번이나 움켜쥐었으나 하늘하늘 흩날리는 게 영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시위대가 점거한 지역을 지나쳐도 영 거슬리기 짝이 없었으니, 정말로 야속했다.

“아으… 싫어.”

“저치들이 외치는 게 듣기 싫으시다면 버블이라도 칠까요?”

“그런 거 아니다.”

이브는 뺨을 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다시 뒤로 넘기면서,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꾹꾹 눌렀다. 파스텔 톤에 가까운 꽃무늬 원피스를 자신이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다시금 시뻘게졌다. 그 본모습인 케이프 코트도 부끄러워 죽을 맛이었는데 말이다. 빡빡이로 분장한 알터는 눈치는 더럽게 빨라가지곤 이브에게 물었다.

“바람을 막아드릴까요?”

“아니! 미쳤냐?”

딱 봐도 저 하와이안 셔츠로 변한 코트를 벗어준다는 뜻이었으니 거절했다. 알면서 그러는 건지 모르면서 그러는 건지 더 신경 쓰여서 기분 나빴다. 당연히 알터는 그쪽으론 무감각하니 모르면서 하는 걸테지만 말이다.

이브는 30년 동안 여성으로 살아왔던 게 몸에 베인 만큼 어떻게 하면 남자가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면 남자가 감동받는지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변해버린 환경과 변해버린 주변의 태도에 반쯤 포기하고 소녀와 여자 사이 어딘가의 삶을 흉내 내고 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의 흉내는 내면과 뒤섞여갔다. 이브와 퀘이사를 다른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 만큼, 그만큼의 시간은 이브를 다른 존재로 변모시켰다. 감정의 흐름이나 가치관 따위가 온전히 과거 퀘이사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이 부하직원과 연애감정을 느끼고 있느냐? 거기에 대답할 순 있었다.

그건 절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런 감정이 진짜로 있다고 해도, 그건 몸뚱어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