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26편
<-- -->
“이런, 옆의 꼬마가 변수였군.”
사방이 온통 녹색으로 가득한 특수 촬영 스튜디오 가운데서 흰 연미복을 입은 레드호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섬유 드러난 얼굴의 흉터는 쓴웃음에 가깝게 휘어졌다. 기분이 나빴다. 일이 돌아가는 꼴이 영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미심쩍은 부분은 하나가 아니었으니, 어째서 알터가 이런 결심을 했는지는 옆의 꼬마가 변수였다. 알터처럼 우직하고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경쟁심만큼 강한 동기는 없었다. 꼬마는 알터를 이용해 레드호크에게 가장 최악의 결말을 안겨주었다.
웃겼다.
알터를 이 행성에서 만나기 전까지 전혀 신경도 안 쓰던, 라임비의 거지 꼬맹이였다. 그러나 그 꼬맹이를 키운 건 퀘이사였다.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퀘이사 라케이니아, 그는 정말 파괴적으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수석 은하보안관이라는 직명 하나만으로 설명되는 알터 카이로스, 수주받는 일은 모두 해결해낸 잔혹한 현상금 사냥꾼 테이 루체네리아, 시간축을 벗어났다고 소문난 4차원의 정보원 루드 크로노스, 그리고 한때 재계서열 9위였던 마르스 일렉트로닉스에서 독립한 자회사를 재계서열 3위까지 올려놓은 마르테르트 컴퍼니의 수장, 안젤라 세라피나까지. 모두가 그의 손을 거쳐 간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이름이 레아 라케이니아던가?”
퀘이사 라케이니아가 제 성씨를 물려줄 정도로 대단한 꼬맹이는 과연 어떤 실력자일까? 레드호크는 궁금했다.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저 위험한 꼬맹이는 바깥으로 내어놓기엔 너무나도 위험했다. 이브는 놓치더라도, 그 꼬맹이는 이 행성에서 죽여 놓아야 했다.
하지만 레드호크 역시 준비하지 못한 카드를 마구잡이로 내버릴 순 없었다. 상대는 알터 카이로스다. 1대1로 맞대고 싸워선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함정 한 방으로 굴욕과 참혹한 실패를 동시에 먹여야만 했다.
“아니야, 안 되지. 안 돼.”
옆의 꼬맹이는 잠시 잊어야 했다. 아직까지 큰 변수는 아니었다. 꼬맹이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알터와 퀘이사에게 큰 한 방을 먹일 수 없다. 꼬맹이는 여유가 생긴다면 얻을 수 있는 덤이라고 생각하자.
본 게임은 벼랑 끝의 퀘이사를 밀어, AV배우로 데뷔시키는 것이다.
전 은하에 펼쳐져 있는 인류의 리비도를 자극하기 위하여, 새로이 데뷔하는 배우를 위해서 무대를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사명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육신이 살아나는 세상이다. 마음을 죽이는 킬러야말로 가장 위대한 킬러이다. 또한 보스의 뜻이었다.
녹색의 특수촬영 스튜디오 안에서 그는 미리 준비해둔 촬영을 시작했다. 굴욕의 순간을 기록하여 영원히 남도록!
레드호크는 두 팔을 좌우로 쫙 벌리며 어릿광대짓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스타 스트링스의 존경하는 시청자 여러분들. 어서 오시지요.”
그는 정면의 홀로그램 카메라를 보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붉은 반점이 타오르는 카메라는 착실히 저장소에 저장되고 있었다. 이 무대는 신입 배우 이브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내레이터에 불과한 레드호크의 손님맞이 준비는 끝나가고 있었다.
“이 홀로그램을 시청해주실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잠시 배우들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지요.”
레드호크의 눈앞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보이는 듯했다. 열광하는 시선들,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들, 욕망에 느글거리는 시선들, 그리고 이 영상을 빨리 넘겨 하이라이트를 보려 하는 시선들까지.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그들이 원하는 건 결과적으론 하나로 이어진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은하보안관이, 완벽한 암컷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우리의 비련의 여주인공! 여러분들은 30여 년 전 돌연히 사라진 은하보안관 라케이니아 경을 잘 아실 겁니다. 또한 그의 직속 현장부관이자, 제자였던 알터 카이로스 경 또한 유명한 사람이지요. 여주인공은 바로 카이로스 경의 여자친구입니다!”
화면에는 두 사람이 밀회하는 듯한 홀로그램이 자동으로 편집되었다. 고민하는 카이로스의 모습과 멀찍이서 찍은 듯한 두 사람이 껴안는 모습들이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그건 마치 비련의 커플을 연상시켰다.
“아, 누가 이럴 줄 알았겠습니까! 카이로스 경이 페도필리아라니요. 하지만 이 영상이 단순히 두 사람의 꽁냥꽁냥한 연애사를 다루는 건 아닙니다. 바로 이 영상! 우리의 남주인공은 이 우람한 흑마거든요!”
레드호크는 마치 상품을 소개하듯 스튜디오 구석에 있던 루이스의 턱주가리를 잡았다. 카메라의 초점도 레드호크를 따라와 루이스에게 맺혔다. 루이스는 약을 먹고 해롱해롱한 상태였다. 군침을 질질 흘리던 루이스는 카메라가 오자 멍청하게 웃었다.
“자, 어서 인사해야지?”
“안녕하십니까, 라임비의 종마 루이스입니다. 나이는 23세. 신장은 183cm, 체중은 84kg…”
레드호크는 들을 필요도 없는 종마의 소개를 자르기 위해 그의 바짓단을 찢어버렸다. 북 찢어지는 와중에도 루이스는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약이 제대로 든 모양이다.
“다시 간략하게 소개드립니다. 암컷을 울리는 아주 우람한 물건을 지닌 흑인이지요. 카이로스 경의 여자친구가, 이 물건에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이들은 모두 오십시오! 감각 공유 섹스로이드도 함께 판매합니다!“
레드호크가 손을 치켜들었다. 환희에 찬 시선들이 소개문구가 끝나고 본 영상으로 돌입하는 장면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홀로그램 카메라의 삼발대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홱 돌아갔다. 레드호크의 손날림에 바람이 일었던 건 아니다. 그저 카메라의 지지대가 약했던 탓이다. 상당히 불길한 징조였다.
“…이런, 슬프네요.”
[경보, 경보. 라임비 상공 스타포트에서 흑성마교의 우주선 발견.]
으득-
레드호크의 손아귀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혈관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옆에서 멍청하니 헤헤거리던 루이스도 레드호크의 살기를 느꼈는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화나게 하는군요.”
레드호크의 근처에서 붉은 전기가 찌릿찌릿 솟아났다.
“내 먹잇감에 숟가락 얹으러 나타난 놈들이 있다니.”
**
이브는 끝없는 어둠 속을 헤맸다.
트라우마는 직면하면 이겨낼 수 있다.
이브가 익히 아는 지식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오래된 정신과 치료법 중 하나다. 인간이 생체적인 뇌로 사고하는 한 이는 아직까지도 통하는 사실이었다. 이미 인간에 대한 생체기술이 발달한 현재에는 다른 방식으로 치료하는 게 훨씬 쉽기에 시도조차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뇌를 스캔하고 트라우마를 담당하는 영역에 나노머신을 투하해 알아서 치료하게 만드는 방법이 깔끔하고 훨씬 쉽다. 빠르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술을 위해선 전문 기능성 나노머신을 사용해야 하고, 그런 나노머신은 10대 행성의 전문의들이나 쓸 수 있었다.
시간이 없는 이브는 새카만 과거의 그림자를 향해 오래된 치료법을 시도했다. 이 행성에서 남은 시간은 5일 남짓, 어쩌면 코르디스 행성에서 무의미한 시간이 끌릴 수 있으니만큼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지금처럼 체념한 상태가 아니라 단단해져야만 했다.
그러나, 약해진 정신머리는 그것조차 버티지 못했다. 어쩌면 소녀의 몸이 영향을 준 걸지도, 아니면 약물 때문에 정신이 난도질당해서 그럴지도 모르는 법이다.
이브는 지금도 악몽을 꾸고 있다.
발정기 때면 항상 똑같은 악몽을 꾸곤 했다.
어떤 남자에게 깔려 앙앙대거나, 흉악한 자지를 제 여린 살틈에 스스로 보채며 끌어들이거나, 흥분해서 남자의 품에 안겨 진땀을 빼며 허릿짓을 하거나, 약에 취해 해롱해롱한 상태로 남자의 거친 손길에 성감대를 만져지거나, 하나같이 음란하고 잔혹한, 충족되지 않는 암컷의 욕망에 빠져 구르는 지독한 음몽, 오늘도 그 꿈 중 하나가 자신을 옭아매었다.
음산한 로우-스트리트의 고아원이었다. 아이조차 돌보지 않은 두 영생자 사이에서 태어난 퀘이사의 기억이 아니라, 약에 취해 강제로 돌아간 이브의 유년기 기억이었다.
정원조차 없는 거리에 항상 안드로이드가 지키는 정문으로 나가 노는 건 불가능했다. 살풍경한 시멘트 건물 안에서 어렴풋이 이브가 기억하는 건 세 아이가 있었다는 기억이었다. 거울인지, 유리창인지 모를 곳에 노란색, 붉은색, 그리고 하얀색의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나머지 둘이 누구였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다섯 명이었다가, 어떤 때는 홀로만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창밖은 다소 어둑하니 어떤 종류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밖은 언제나 컴컴했고 네온사인이 별빛처럼 가득했으므로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흐릿해서, 이브는 글자를 읽을 수조차도 없었다. 이브는 고아원에서 살고 있었다. 어른들도 있었다.
이브는 파도처럼 몰려드는 기억의 파고 속에 그리움과 슬픔, 기쁨과 화남, 그리고 쾌락을 간헐적으로 경험했다.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졌으며 이 명확하지 않은 꿈속에서 이브가 확신하는 건, 그저 악몽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기억의 파편에서는, 주인님을 부르짖으며 앵앵 애새끼처럼 울고 쾌락을 갈구했다. 낯설고도 익숙한 저림이 진피 밑을 기어 다닌다. 뜨거운 열락이 몸을 적신다.
그리고 쾌락에 절여지는 횟수는 뒤로 갈수록 점차 잦아졌다.
“헤에… 쥬인님. 가고… 가고 싶어여. 자지, 자지, 주세요.”
이루 말할 수 없는 형체에게 도저히 제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을 내뱉은 순간만큼은 따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워지기도 했다. 눈물은 뚝뚝 흐르고 윗입과 아랫입에선 군침이 줄줄 흘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인정받았다는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기둥모양 그림자에 턱끝까지 욕망이 샘솟아 주인님에게 군침 잔뜩 흘리는 입으로 봉사하면서, 그림자에서 다디단 정액이 나올 때까지 빨고 또 빨았다.
[…….]
무슨 말이었는지는 모른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고등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따뜻했고, 가슴이 애틋해졌다.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주인님은 저를 쓰러트리고, 제 엉덩이를 팡팡 두들기며 허릴 잡고는 여린 속살을 헤집었다. 두껍고 뜨거운 것이 삽입을 반복하고, 그때마다 민감한 곳, 여린 곳에 닿아 낯선 암컷의 쾌락이 울려 퍼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까스로 주먹을 움츠렸다가 펴면서 갈 곳 없는 다리를 공중에서 휘저었다. 허리는 쾌락이 밀려들 때마다 비틀렸다. 욕망으로 점철된 눈동자는 침대보를 핥았으며 흐릿한 기억 속에 쾌락만이 선명하게 남아 맴돌았다.
[…….]
“앗, 앗, 악, 앗… 아흑, 아흥… 가버렷… 가버려엇… 아흐으응!”
파편적인 기억들은 새하얀 쾌락으로 뒤덮인다. 오로지 농후하게 응축된 쾌락뿐인, 얻고 싶어도, 갈구하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뜨거운 열이 하복부에서 피어나와 얼굴까지 빨갛게 달구었다.
끝끝내 형체마저도 일그러져서 하얀색과 살구색이 이리저리 뒤섞인다. 그 가운데는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보채며 광희에 가까운 교성을 내지르며 허릿짓하는 멍청한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브 자신이었다.
[…이……브…?]
낯선 기억의 형태는 절정과 동시에 심장마저 울리는 소음이 가득한 공간으로 변했다. 고아원보다는 더 현란한 빛이 제 피부를 비추었다. 그러나 연한 홍조가 있을 뿐인 사랑스러운 피부는 이미 죽어버린 시체처럼 창백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도 이브는 미친듯이 온기를 갈구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에서, 이브는 흘러가는 데로 몸을 맡기고 세월을 흘려보냈다. 더 강한 자극과 폭력이 가해졌고, 어딜 가든 경멸과 추잡한 욕설이 가득 쏟아졌다. 쾌락의 양은 늘어났으되, 이브는 여전히 갈구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그곳에서, 형체 없는 남자는 다가왔다. 커다랗고 테가 큰 안경을 쓴 사내였다. 이브는 그를 알았지만 약에 절여져 맹랭한 사고력으로는 정확한 단어를 맺을 수 없었다. 사내는 이브를 꼭 껴안았다. 그 온기에 이브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에서 쓴물이 치밀어 올랐다.
“…안관님?”
“보안관님?”
“헉, 헉… 아, 아스테이…?”
그의 품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알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커다란 남자의 갑빠가 있었다. 그리고 제 가느다란 두 팔은 도저히 안을 수 없는 알터를 안으려 하고 있었다. 아래는 어떤가, 단단하고 커다란 허벅지를 깔고 앉으며 올라타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잔 걸까? 악몽은 얼마나 꾼 걸까? 레아가 알 정도로 잠꼬대는 심한데, 설마…?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머리에서 빠져나간 핏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진창에 빠진 것만 같았다. 꿈에서 현실로 빠져나갈수록, 이브는 비참해졌다. 만난 지 이틀만에 발정 난 모습을 보이지 않나, 악몽에 시달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나, 하찮기 짝이 없었다.
누가?
내가.
곧이어 뜨거운 눈물이 소녀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비부가 아릿하고 홧홧한 느낌은 없었기에 설마 하던 교접을 하진 않았겠지만, 더 없는 추태를 부렸으리라. 허리를 흔들고 쾌락을 좇아, 이 온기에 몸을 맡겼으리라. 쾌감을 찾아 자연스레 분비된 액이 비부를 적시고 흘러내려… 팬티와 그 너머에 있을 그의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아… 아아….”
“악몽을 꾸셨나 봅니다.”
“아…”
도저히 목이 메여서 말이 맺히지가 않았다. 제 일그러진, 나약해 빠진 목소리로 헐떡이는 잠꼬대는 언제부터였을까, 어디서부터 알터가 들었으며, 언제부터 달려와 이렇게 안은 걸까? 안을 때마다 독한 마음이 깎여 나가는 건 아는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알터의 품에 안겨 있는 현실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제멋대로 남자의 품에 안겨 안정을 취하는 이 버러지 같은 몸뚱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오늘 제 욕심 때문에 남는다고 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우주 엘리베이터의 화물칸 안에서 나노머신이 일으킨 발정이라고 치부하고 넘겼을 수도 있는데…
그마저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력멀미 방지약이라는 물건이 있으니까. 알터가 이미 건네준 약은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위험할 때 언제든 꺼내 복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나약한 모습은 온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온전히… 자신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