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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40)

[TS] 은하보안관 이브 2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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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그마한 옅은 금발의 꼬마가 차가운 달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조용히 앉아 물을 마신다. 알터는 레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순간적이지만 온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페이와의 통화가 시끄러웠던 것도 아니며, 경계심을 완전히 푼 상태도 아니었는데 레아는 완전히 기척을 숨기고 나타났으니.

물론 잔뜩 긴장한 작전지역에서의 상태와 긴장을 푼 숙소에서의 상태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기계거미의 움직임보다 레아가 암행을 잘 한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알터는 아직 레아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감마-로티루스-펩티로스, 통칭 악마의 유혹이란 약물은 없던 기억마저도 조작할 수 있다. 이브가 30여 년 간 저런 종류의 약물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이 행성에서 악마의 유혹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악마의 유혹이 버젓이 사용된 흔적이 있는데 믿음직한 전 상관의 기억조차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아라는 아이에 대한 기억이나 경계심 하나 품지 않는 이브의 태도마저도 사실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알터는 꼬맹이 계집에 불과한 레아에게 본능적인 거리낌을 느꼈다.

“아저씨, 밤인데 안 주무세요?”

경계심 하나 없는 생생한 아이의 목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뚫고 울렸다.

마치 알터와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난 듯한 모습이었다. 어린애가 순수하게 다가와서 친해지고 싶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알터가 그 속에 든 의미마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새로운 약물을 투여했을지도 모르는 법이지.

고민과 고민이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언론사 사건과 비밀결사단과 퀘이사에 연관된 사건, 안 그래도 원치 않는 사이에 양면 전선이 펼쳐진 상태다. 공작을 통해 라임비에 범죄를 만들고 쓸어버리면 아무 말 못 하겠지만, 13억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내는 건 알터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알터의 명성에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거기에 알터의 경계를 뚫고 나타난 눈앞의 꼬맹이는 알터의 눈에 상당히 거슬렸다.

알터의 비인간적인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인지도 모르는 레아에게 그런 동요를 드러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보안관님의 심리적 안정에 이 꼬마애가 필요한 건 확실했으니까. 당분간은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고.

“언제 적이 몰래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지키고 있어야지.”

“졸리잖아요. 밤이에요. 사람은 자야 돼요.”

“아냐, 아저씬 괜찮아.”

알터는 책상 위에 있던 각성제를 의식적으로 숨겼다. 어쩌면 벌써부터 레아가 이 각성제에 뭔 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만약 이 각성제 통에 다른 약을 넣고 다 죽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꼬맹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각성제를 먹고도 잠든 보안관님을 봐선… 알터의 의심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알터는 깍지를 끼고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하나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았다.

“혹시 이름 쓸 줄 아니?”

“네! 언니한테 배웠어요.”

“여기 한번 써 볼래?”

알터는 레아에게 자기가 쓰던 태블릿과 펜을 건넸다. 레아는 액정 위에서 펜을 이리저리 놀려보더니 쀼루퉁하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음… 글자 안 써지는데요?”

“거기 메모장이라고 쓰여있는 거 눌러 봐.”

“네…… 와! 신기하다.”

마치 태블릿도 처음 보는 애처럼 메모장 위에 이리저리 낙서를 한다. 진짜 같은 연기거나 진짜거나 둘 중 하나겠지. 지우는 방법을 묻거나 글자의 색깔을 바꾸는 방법을 묻거나 하다가, 레아는 자기 이름을 썼다. 레아의 필체는 글자 처음 쓰는 애처럼 삐뚤빼뚤했다.

[레아(REA)]

“성은?”

“성도 써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앞으로 네 이름을 써야 할 일이 많을 거란다.”

[라니아케아(RAKEINIA)]

성까지 쓴 레아는 두 손으로 태블릿을 바치고 활짝 웃었다. 라케이니아, 퀘이사의 성씨였다. 지난 30여 년 간 급격하게 인구가 늘어난 성씨였다. 퀘이사처럼 되고 싶은 이들이 이 성씨로 많이 개명하고는 했었지만, 우주에서 그리 흔한 성씨는 아니었다.

알터는 써 놓은 글씨를 보고는 씁쓸함을 감췄다. 아마 적을 들이면서 이브의 아래로 들어갔거나 하겠지.

알터는 선글라스를 통해 레아의 글씨를 아르티 프리세크의 필체와 비교했다. 필체는 육체의 기억에 깃드는 것이 정상이나 기억의존도를 볼 수 있기도 하다. R이나 N같은 글자를 두 번에 나눠서 쓰거나 한 번에 쓰거나, 그런 사소한 곳에서 기억 의존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티 프리세크와 레아의 글씨 쓰는 방식은 달랐다.

“N을 한 번에 써볼래?”

“그렇게 쓰는 거 아니라고 배웠는데….”

“한 번만 해 보렴.”

“네.”

레아는 N을 한 번에 썼다. 구부러지는 부분을 확실히 각지게 쓰는 모양이 아르티 프리세크의 필체와는 달랐다. 어차피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 바꾸지 않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아마 비타에 가서 직접 뇌 검사를 해보기 전까지는 레아가 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알터는 한숨을 삼키고 머쓱하니 레아를 칭찬했다.

“그래, 잘했다. 글자는 매일 연습해야지. 아무리 타자와 음성인식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시대라지만 글자 쓰는 방법을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원한다면 그 태블릿 빌려줄게.”

“정말요?”

“그럼. 비타에 가면 훨씬 좋은 거 사 주지.”

“정말이죠? 와아아!”

알터는 멋쩍게 웃었다. 레아를 의심하는데 힘쓰는 것보단, 더 눈에 띄게 공격해오는 쪽에 대응하는 걸 우선으로 둬야 했으니까. 레아를 의심했다는 사실은 이브에게는 숨기기로 한다.

삐리리리-

그때였다, 호텔의 구식 전화기가 울렸다.

알터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탁자 위에서 울리던 전화를 받았다. 구식 호텔 서비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행성 내 7성급 호텔이라더니 아직도 이런 영상도 지원 안 되는 내선으로 연결을 해댄다. 차라리 스타 스트링스 계열의 호텔을 잡아 두는 게 나을 뻔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카이로스 경. 호텔 슬립하우스의 로비의 제임스 리입니다. 전화 연결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연락 드렸습니다.]

“어느 분이시죠?”

[라임비 37지구 소유주인 테론 아스바르입니다. 연결해드릴까요?]

“예, 그러시죠.”

잠시간의 삐 소리 후 테론과 연결되었다. 알터는 일부러 스피커폰 모드로 변경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오갔다. 테론의 목소리는 분노를 삭힌 듯 말끝이 조금씩 잠겨있었다.

알터는 이미 페이에게서 과거 이브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관련 자료를 받았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37지구 소유자가 이브에게 복상사당했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란 걸 알기에 이브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만나서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 왈가왈부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고 싶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일 오후 2시, 어떻습니까? 제가 그쪽 호텔 로비로 가겠습니다.]

“오신다면 호텔에서 회의실을 하나 빌리도록 하죠. 그건 제 쪽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은하보안관님의 은혜에 감읍하겠습니다.]

알터는 수화기를 탁 내려놓았다. 테론의 태도가 썩 내키지 않았다. 말은 공손해도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게 음성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얼굴까지 볼 수 있었다면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으리라. 22세의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아 큰일 없이 이어나간 사람 같지 않았다. 레드호크가 일을 내려고 내민 카드라기엔 한없이 부족하고 변수 많은 카드였다.

그러나 레드호크의 카드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토록 심약한 사람을 앞으로 내걸면서, 뒤로는 무언갈 더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알터는 레드호크의 수가 무엇이며, 꿍꿍이속이 무엇인지 읽어보려 했다.

가령, 현재 이브에 대한 자신의 평을 낮춘다던가…

“지금 고민하시는 거, 언니 때문이죠?”

“그건 왜 묻니?”

“언니는 이거, 알자마자 만나겠다고 할 거예요. 절대로 보내주시면 안 돼요.”

레아는 어디서 찾았는지 태블릿을 기울여 황색언론에서 나온 뉴스를 보여주었다. 눈에 띄게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이브가 노예이자 살인마이며, 피해자이자 노예의 소유주인 37지구의 남자는 공범인 은하보안관에게 협박을 받았다고 넘겨 집고 있었다.

“지장 찍힌 노예계약서, 어디서 나온 지 알아요. 언니 대신 제가 갈게요.”

‘그건 안 돼.’ 라고, 알터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회담 중에 대놓고 레드호크가 들어와 이브를 훔쳐 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레드호크라면 그런 짓은 안 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라임비의 방범체계가 우주 마피아들에겐 종잇장이나 마찬가지라지만, 오랫동안 상대해왔던 레드호크의 방식은 이렇게 단순하진 않았다. 오히려 피를 서서히 말려 죽이는 방식이었다.

직감은 퀘이사가 과거 알터를 부관 삼던 시절 길러준 영역이었다. 레아를 수상쩍다 여기는 직감만큼이나 내일 이브가 안전하다는 직감 역시 유효했다.

그리고 알터는 이 행성에 미행자를 덕지덕지 붙이고 올 만큼 대놓고 오지도 않았다. 마피아들도 돈의 원리로 움직이는 검은 조직이고, 집착을 갖고 이 거지행성까지 따라온 레드호크가 오히려 신기한 놈이었다.

물론 이게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인 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의뭉스러운 레아가 앞에 있어서인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레아. 난 네게 어떤 계약서라고는 말하지 않았단다.”

“노예라고 말할 정도면 계약서라는 게 있겠죠. 신문사에서 많이 봤어요.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언니가 보호자로 제 종이에 찍은 거, 그 문서일 거예요. 제가 그걸 거짓말이라고 밝히면 되잖아요.”

알터는 웃음을 참았다. 잠깐 태블릿을 기울여 뉴스를 봤다고 주장하기에는 글자도 똑바로 못 쓰는 애가 아니지 않는가? 이브에게 듣기로는 레아가 7살이라 했다. 알터 본인도 유전자가 개조된 강화인간이기에, 7살의 알터가 어땠는지를 기억한다. 해봤자 일반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쳤단 말이다.

하지만 공리나 다름없는 과학 이론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서의 세상 물정을 파악하는 건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이의 통찰력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핵심을 잘 짚어냈다. 지나친 천재거나, 혹은 이 일을 처음부터 꾸민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너, 대체 정체가 뭐니?”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이에요.”

옅은 금발의 소악마는 두 만월의 빛을 받으며 알터에게 미소 지었다.

물론, 알터는 절대로 레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레아의 말이, 20여 년 간 함께 동고동락한 은사이자 상관보다 자신이 더 가깝다는 도발처럼 들리기도 했다.

**

이브는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끙끙대는 신음을 내뱉었지만, 눈에 띄는 몸부림이나 발작은 없었다. 알터는 이브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모공에 송연하니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그저 소녀의 아픈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이브는 알터의 거친 손길을 받으면서도 깨지 않았다. 테론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 레아는 벌써부터 씻고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레아는 그저 방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갈 시간이에요.”

“잠은 잘 잤니?”

“언니가 걱정돼서 못 잤어요.”

두 사람이 어젯밤 이후 나눈 첫 대화였다. 알터는 각성제를 검사하고는 문제없음을 확인하고 밤을 새웠고, 레아는 물을 마시고 곧잘 들어가서 이브의 곁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두 사람이 잠든 침실에 들어왔을 때, 레아를 껴안고 있는 이브의 맥박이 눈에 띄게 안정되었음을 확인했다.

알터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쓸모가 있는 동안은 레아를 쉽게 내칠 수 없었다. 저 속에 얼마나 음흉한 악마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순수하게 아이라고 좋아하는 전 상관이 어떻게 된 건 아닌가 걱정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언니가 걱정되면 남는 게 어떠니?”

“제가 가서 거짓을 밝혀내지 않으면 아저씨가 위험하잖아요.”

“아저씨가 왜 위험할까?”

“은하보안관은 정의를 지켜야만이 가치가 있잖아요. 노예에 살인자 의심 받는 사람을 훔쳐가면 그것만으로도 아저씨는 쫓겨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가서 그 계약서가 무효라는 거 밝힐 수 있어요.”

레아의 말이 맞았다. 살인 용의자이자, 사유재산인 노예를 빼돌린 사실이 알려진다면 알터의 위신에는 꽤 큰 상처가 난다. 이미지도 가치가 되는 세상에서, 그 가치 손실은 아마 테론의 전재산에서 만 번은 곱해야 급이 맞을 정도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알터는 이브의 이불을 덧씌워주었다. 뜨거운 숨을 쉬는 소녀는 어찌나 아픈지 열이 심하게 났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간병 안드로이드라도 데려오는 거였는데, 그것조차도 저 스타포트의 우주선에 있으니 정말 갖고 온 게 없었다.

“그런데, 네 언니가 무고한 사람을 죽일 사람일까?”

“발정기의 언니는… 그럴지도 몰라요. 몸이 뜨거워지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남자들을 찾거든요. 지금처럼요. 언니가 탈출하기 전에 빨리 돌아와야 할 거예요.”

무심하다 할 정도로 레아는 말소리가 변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모습을 봐선 벌써 저 아이도 이 광경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알터는 마지막으로 이브 근처에 설치한 센서들을 체크하고는 일어났다.

“가자. 금방 끝날 거다.”

알터는 이브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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