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주의자의 아내와 애인
나는 원칙주의자다.
흔히들 말하는 정해진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옳다고 교육받았고, 그에 맞는 삶은 살아왔다.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의 범주라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뭐, 굳이 말하자면 좀 고지식하다는 느낌의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긴 할까? 하지만… 의외로 내가 생각하는 그런 관점은 사회적으로는
그보다 더 나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듯 하였다. 이제는 왠지 원칙주의자라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숨겨야 하거나 되도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세상이 되버린 것 같았다.
그것을 처음 인식한 것은 아내와의 이혼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제법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 사회 나와서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으로 발전한 우리의 인연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파경을 맞았다. 그녀는 뭐랄까나…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타입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즐기는 것에 있어서 종종 내가
눈쌀을 찌푸릴 만큼 원칙을 무시하는 스타일이었다. 어쩌면… 나와는 상극의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건,
전략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결합한 경우 서로의 다른 장점에서 발생시키는 시너지를 얻을수 없다는 지극히 효율적인 이유였다. 뭐… 주관적으로
예쁘다는 게 더 컸기도 했겠지만…
하지만 우리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연애랑은 달리 순식간에 우리의 감정은 식어갔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녀처럼 자유분방한 입장에
있어서 나의 인생관은 잠시 즐기는 상대로는 몰라도 평생을 같이 할 반려로서는 끔찍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줄어갔고, 삶의 접점은 하나둘
사라져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무미건조한 관계는 그녀에게 유희도 생식도 아닌…
그냥 행위에 불과 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생명이 태어나는 건 무리였겠지.
그래서 그녀가 결혼 3년차가 될 무렵 지나가듯이 이혼하자고 한 말에… 나는 별다른 말없이 동의했다. 생각보다는 쿨하게 헤어졌다. 아이가 없으니 양육을
신경쓸 필요도 없었고… 재산분할도 깔끔했다. 어차피 나름 직장을 가지고 각자 재산관리를 하던 입장에서 그녀는 오래된 살림에 별 미련을 두지 않고 짐을
챙겨 몸만 나갔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물려받아 결혼할 때 인테리어를 새로했던 쓸데없이 큰 교외의 내 집에 나는 그저 덩그라니 홀로 남겨졌다.
처음에는 삶의 변화는 없었다. 그저… 이제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의문을 떠올리게 되었고, 의문에 대해
항상 즉답을 찾을수 있었다. 원칙주의자인 내 성격… 그로 인해 무미건조했던 나의 삶…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래서… 누구를 원망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 자신의 성격을 탓하면 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성격이라는 것이 그렇게 의지대로 바뀌는 것이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았겠지… 변하지 않는 성격에 나는 내 삶이 참으로 시시하구나라는 자조를 하며 그냥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 시시한 인생에 어느날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다시 해오세요.”
“응? 아니, 왜… 분명히 요건에 제대로 맞게했잖아.”
“외환경비의 환율을 기간 평균으로 하신게 아니라 환전한 날짜의 환율로 하셨습니다. 15원 차이나요.”
나는 내 눈앞에서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내가 청구한 출장 경비 청구서를 반려하는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경리팀에서 대부분의 정산 업무를 담당하는
그녀…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 계약직으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들어온 그녀는… 나와 닮은, 어쩌면 나 이상의 원칙주의자였다. 매사에
빈틈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는 성격과 업무 특성 탓에… 아직 스물 두세살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그녀는 경리팀에서 이런 자잘한 경비 처리를
대부분 전담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자세히 보면 대단히 미인이지만, 그 차가운 표정과 수수한 메이크업, 그리고 그냥 단정하게 늘어뜨려 뒤로
질근 묶기만 한 긴 머리가 그런 미모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압적인 태도 덕분인지 실제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와 닮은 꼴인
그녀는 나에게 경비 청구 서류를 반려하며 이제 볼일이 없으면 돌아가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 역시 원칙주의자이기에 그것이 분명 회사의 규칙에
어긋난건 인정한다. 하지만… 겨우 15원으로 이렇게 고압적으로 구는 그녀에게 나는 좀 빈정이 상했다.
그것은… 어쩌면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원칙주의자라는 특성이 이토록 세상에 혐오스러운 존재인가를 거울처럼 보는 기분을 들게 해서 더 그렇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없이 그녀가 내민 반려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사무실에 들어오던 경리팀장이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아니, 우리 과장님이 왜 이리 기운이 없으실까? 어라? 반려? 야, 너 또 우리 과장님 서류 까칠하게 군거야? 아놔… 아, 미안해요. 내가 애 교육을 다시 좀
시켜야 겠네요. 뭘 그런 사소한걸 가지고…”
과장되게 유난을 떠는 경리팀장을 나를 만류하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실수한게 맞긴 하니깐요. 다시 작업해오지요. 신경써줘서 고맙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걸…”
나는 조금 메스꺼운 기분이 드는 경리팀장을 피해 내 자리로 돌아왔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는 나에게 동료가 말했다.
“야, 또 빠꾸먹었냐? 히야… 고 기집애 대단해. 우리 회사 최고의 까칠이를 가지고 노는구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년이 있었네. 이번에는 얼마 차이?”
“15원… 발견하는 게 대단하다. 나도 놓칠 정도면 회사에서 그거 하나하나 따져가며 일하는 사람은 없을꺼라고 생각했는데…”
“거참… 너도 너지만 걔도 참 대단하다. 근데 이상하네… 그럼 어차피 회사 내에 경비 정산 걔가 다 하니깐 다들 반려가 속출해야 할꺼 아니야? 근데 경리팀에서
경비 정산 적체됐다는 소리는 한번도 못들어 본 것 같던데… 나도 경비 청구들 한번도 빠꾸 안먹었는데… 왜 너만 그러냐?”
“그러게 말이다. 유독 나한테만 까칠하게 굴더구만. 이건 대체 무슨 심보야?”
“흐음… 원칙주의자 배틀 붙은거 아냐? 뭐, 어쨌든 상관없지 않냐? 너 이번주 인사발령에서 팀장 내정이라며? 그러면… 이제 그냥 부서 과장이 아니라 나름
끝발 날리는 팀 팀장이니 걔도 좀 덜 까칠해지지 않을까?”
“그런가?”
“그렇겠지… 다른 팀도 아니고 감사팀인데… 암튼 이번주 한턱 내는거 잊지 말라고. 제수씨한테는 늦는다고 미리 연락해두고… 큭큭큭…”
동료의 히죽거림에 속이 더 쓰려왔다. 아직… 회사와 처가의 친척들에게는 우리의 이혼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왜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할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나는 다시 컴퓨터를 켜고 속쓰림을 달래고, 조금전 나를 엿먹인 그녀가 반려한 서류의 파일을 다시 불러내 수정을 시작했다.
“승진 축하드립니다.”
다들 건배를 외쳤다. 나는 회식자리에서 흔해터진 감사 인사를 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축하 회식에 하필이면…
“아이고, 우리 감사팀장님 앞으로 잘뵈어야 겠네요. 제 잔 한잔 받으시죠.”
…경리팀과 동행을 하게 될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연히 옆자리에 예약이 잡혀서 합석을 하게 된 나는 연신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경리팀장을 억지로
웃으며 만류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멍하니 고기만 굽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변함없는 표정… 그녀는 여기서도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인양 열심히 고기를 굽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당장 고개를 돌리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후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자아, 우리 경리팀 꽃들은 다들 한잔씩 감사팀장님들한테 드려야지. 김양부터!!!”
“꺄아아앙~~~ 팀장님 엉덩이 때리면 성희롱으로 고발할꺼얌.”
버겁다… 그녀와는 달리 왠지 모르게 팀장을 닮아 화려한 경리팀의 여직원들은 우르르 몰려와 나에게 잔을 권했다. 나는 거절할수 없어 그녀들과 한잔한잔
술을 마시며 별 무가치한 얘기들을 나눴다. 그러던 중에… 경리팀장은 고기를 굽던 그녀도 손목을 잡고 일으켜 내 옆에 앉히며 말했다.
“자아, 팀장님, 우리팀 막내 덕분에 맘 고생 심하셨죠? 제가 따끔하게 혼을 냈습니다. 이제 앞으로 안그런데요. 그러니깐… 두 사람 화해의 의미로… 다들 외쳐1
러브샷! 러브샷! 러브샷!”
그리고 사람들은 다들 박수를 치며 우리 앞에 독하게 탄 폭탄을 내밀며 우리에게 러브샷을 강요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깰수 없어…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왠지… 곤란한 표정… 얘 왜 이러는 거야? 나랑은 술자리에서 흔히 감정없이 하는 그런것도 하기 싫다는 건가? 경리팀장의
종용이 계속되자… 그녀는 결국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팔을 교차하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때였다. ‘쨍그랑.’
“죄송합니다.”
그녀는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정적이 일자… 그녀는 황급히 주변에 사과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뭐야 저거… 아무리 그래도 이거
사회 생활인데… 너무 심하잖아. 그 정적은 잠시 우리들 사이에 침묵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경리팀장은 상황을 수습하며 다시 사람들에게 흥을 돋게
만들었고… 회식은 그렇게 몇잔을 더 마시고 파하였다.
돌아와서 여러 번 고민했다. 뭔가… 내가 개인적으로 원한을 살만한 일이 없는지 고민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건 없었다. 그녀와 나의 접점은
오직 경비 정산 청구서 밖에 없었다. 그녀의 기준에서는 오류가 자주 보이는 내역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내에서 나보다 더 그걸 깔끔하게 맞춰서
주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한다.
대충 영수증을 위치에 붙이지도 않고 호치키스로 박아서 던지거나, 증빙 없으니 알아서 비용 달라는 배째라는 놈들도 있고, 대부분 과장급 직급만 되도
자기가 청구를 챙기는 대신 부하 직원들을 시켜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의 나에 대한 차별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에게 저렇게 박대를 하는건가? 결국… 아내의 경우 처럼, 내가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인걸까?
나는 다시금 자괴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회사일은 회사일이다. 나는 팀장이 된 이후 정신없이 업무에 매진하느라… 한동안 그런 일은 잊고 살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그런 불편한 사실이 상당히 누적이 되었던듯 했다. 결국 그것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깐… 그것은, 내가 베트남 출장을 다녀와서 급한 간부 미팅에
참석하느라, 만들어 놓은 서류를 직접 제출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로 빈틈이 없도록 모든 금액을 두세번 확인하고 감사팀의 부하 직원한테
내역을 그녀에게 전달만 해달라고 하고 나는 미팅에 참석을 했다.
미팅은 사람을 파김치로 만들었다. 당장 여기저기서 벌어진 사고들에 대한 감사 보고로 나는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 다들
퇴근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서류를 맡긴 직원이 남아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 녀석이 말해준…
이번에도 반려된 사유를 듣고 나는 결국 화가 통제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부하직원보고 퇴근하라고 말하고, 서류를 들고 경리팀으로 갔다.
늦은 시간… 불도 대부분 꺼진 경리팀에 그녀는 남아서 잔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다가가서 소리쳤다.
“야, 너 지금 왜이러는거야?”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류 반려 말이야! 서류 반려!!! 뭐? 그 사유가 씨바… 영수증이 꺼꾸로 붙었다고?”
베트남어는 생긴게 생소했다. 하지만 금액이 정확하게 나와 있었기에 잘못붙은걸 알고 있었지만 풀로 붙인걸 떼어내서 다시 붙이는 것도 좀 그래서 그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놔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그대로 반려해버린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회사 원칙대로는 영수증은 정방향 부착 후 제출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화가 더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결국 소리를 빽질러 버렸다.
“씨바, 그래서 뭐! 못알아 처먹냐? 제대로 증빙으로 부착만 되면 됐지, 그걸 정방향으로 붙이라고 다시 반려를 쳐? 너 나 우습냐? 어? 그런거냐?”
“말씀이 심하십니다. 저는 원칙을…”
나는 그녀의 말에 격하게 그녀의 책상위에 올려진 서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야이, 씨발!!! 입닥쳐. 네가 모든 사람들한테 다 원칙 따지고 살았어? 이거봐! 이 새끼는 영수증도 없이 손으로 5만원 써놨네. 그리고 이 새끼는 지가 술먹은
걸로 원래 처리하면 안되는거 가지고 경비 청구했네. 근데… 다들 반려 안됐네. 다들 통과하셨네. 이건 뭘로 설명할껀데? 앙? 씨바 이건 뭘로 설명할꺼냐고?
다 필요없어. 너 내가 뭔가 존나 만만하게 보이나 본데… 나, 너 아니어도 피곤한 인생이야. 그러니깐, 다 집어치우자. 내일 경리팀장 출근하면 이거 깔아놓고
얘기해서 끝을 보자. 안그러면 내가 너땜에 못살겠다.”
나는 그렇게 내뱉어 주고 몸을 돌렸다. 솔직히… 말이 과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혼 후 마음속에 가라앉혔다고 생각한 울분이 이번에 한꺼번에 쏟구쳐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보다 열살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평소에 해본적도 없는 상스러운 소리까지 하며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만큼 화가 났다. 나 자산에게 화가 났다. 대체 왜… 원칙대로 살았을 뿐인데… 그런데 왜 남들에게 질시당하고 오히려 더 차별당하는거냐?
그것도 나같이 만만치않게 원칙만 따지는 놈들에게도 이해는 커녕 더 차별받는 건가? 나는 그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였다.
“왜…”
그녀가 뭐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걸음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왜… 저한테 왜 이러세요. 팀장님까지… 이러시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 그나마… 팀장님이 제 마지막 위안이었는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은 간데 없고, 정말로 서러운 듯이… 너무나 원통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눈물을 끝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의외로… 아름답다는 생각이었다. 나… 좀 제 정신이 아닌건가?
자리를 옮겼다. 밤 12시를 넘겨서도 하는 맥주집이나 카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겨우 안정을 찾고 눈물을 멈추고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린 그녀에게
그간의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깐… 간단히 말해, 팀장 주도의 경리상의 부정이 이행되고 있었다는 거군.”
그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위는 이랬다. 로얄의 친구 자격으로 낙하산으로 온 현재의 경리 팀장은 업무적으로 유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면 성실하고 정직하기라도 해야 할텐데…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사내 정치질에만 열중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와중에 필요한 돈을… 경리팀 주도의
경비 횡령으로 확보하고, 일부는 자기 주머니로 집어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각은 쉽게 발각이 난다. 그래서… 그는 보험을 들었다. 그는 일부러
경리팀 내부 직원들과 짜고선 경비 관리를 일부러 느슨하게 하도록 하였다.
명목은 복잡한 부가 업무를 완화하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회사일로 발생되는 경비들이 슬쩍 사라지는 것을 비공식적으로 눈감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경리 업무도 대단히 느슨하게 관리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가… 그런 떡밥이 던져주면 다들 하니깐 같이 하게 된다. 경리팀장은
그렇게 소소하지만 회사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경비 횡령의 공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듣고 나니 한숨이 다 나왔다. 정말이지… 이렇게 허술한 방법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유지가 되긴 하는구나. 난 갑작스럽게 윗선에서 나를 감사팀장으로 승진 시킨 이유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그러면 왜 나한테는 그렇게 엄격하게 원칙대로 증빙 및 요건을 요구한거지? 다들 경리 팀장 주도로 경비 처리를 느슨하게 봐주고 있던거 아닌가?”
그녀는…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
“처음에… 저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아무리 봐도 부정이 명확한데 동참하는 건 원칙상 있을수 없다고요. 하지만… 그 후로 집요하게 저를 협박해오기
시작했어요. 그냥 경리팀 내부의 협박이었으면 어떻게든 외부에 도움을 청했을텐데… 인사며 재무며 비서실이며 모든 부서에서 저를 노골적으로 질시하며
경리팀장에 협조하길 강요했어요. 결국… 저는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한패가 될수 밖에 없었어요. 매일매일 들어오는 내규의 기준에 턱없이 못미치는
어처구니 없는 서류들을 보면서… 저는 하루하루가 지옥같았어요.
이건 잘못된건데… 이래서는 안되는 건데… 그럼에도 거부하지 못하고, 원칙을 어기고 불합리한 처리를 해줘야 하는 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저에게 유일하게 희망이 되었던건 바로 팀장님의 품의와 청구였어요.”
“나? 내가? 왜?”
“팀장님만… 다들 엉망으로 청구를 하는 와중에 원칙대로… 회사의 내규대로 서류를 꾸며서 주셨으니깐요. 저에게는 그것이 마치… 진흙탕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진주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 일은…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엉망으로 경비가 처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것이다. 그때가 왔을 때… 저는 작은 실수나 오차로 인해 팀장님의 서류가 그런 것들과 같은 범주로
취급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서류를 반려했어요. 만약에 그걸 납득못하시면, 팀장님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분이니 그냥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팀장님은 제가 지적한 오류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직접 그 실수를 수정해서 저에게 가져다 주셨구요. 저는 그래서…
팀장님의 서류를 더 열심히 챙기려고 했어요. 단 한 개의 오류나 흠잡힐 일이 없도록… 나중에 이 더러운 일을 하면서도 제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
분이기에 다치시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그게… 차별로 받아들여질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다시 뭔가 복받치는지 살짝 흐느끼다 심호흡을 하고 안정을 찾았다. 나는… 뭔가 멍한 기분이 들었다.
첫번째 든 생각은… 의외로 내가 요즘 나 스스로 저주하던 원칙주의의 성격이… 이번만은 나를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회사의 대형 스캔들이다.
그리고, 나는 감사팀장이다. 이 커넥션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흔치 않은 사다리를 만난것과도 같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니… 이런 망할 성격도 도움이 되는 날이 있구나.
두번째 든 생각은… 내 눈앞에 있는 그녀… 그녀에 대해 대체 뭐라 형용할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나 이상의 원칙주의자라면… 그 상황이 정말이지 지옥만큼
겸디기 힘들었을텐데… 그걸 견디게 해준 것이… 내 비용 청구였다고? 이건 뭐… 소 뒷걸음에 개구리 잡은 것도 아니고… 나는 내가 생각치도 못했던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마음의 의지가 되고, 또 그로 인해 내가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번째 든 생각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대단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미인이다. 하지만 뭔가 지금의 상황은… 평소에 차가운
그녀에게서 볼수 없는 묘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초하면서도… 가련한… 하지만 절대 굽히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문득 전처가 떠올랐다.
전처와는 완전히 반대다. 발랄하고, 활기차지만 종종 성질을 내고 또 금방 식어버렸던 그녀… 나는 왠지 모르게 대조적인 내가 매력을 느끼는 두 여자를
생각하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일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나는… 차분히 그녀의 앞에 스마트폰의 녹음기능을 켜고, 수첩을 꺼낸 다음 물었다.
“그거… 나에게 증언해줄 수 있겠어요?”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지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