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18/21)

(20) 벼랑 위의 숙모, 그리고 라스트 콘서트

숙모가 문을 열어주는 동안 뭐라 말할까 궁리했다.

친구 만나러 나왔는데 어디 가고 없더라 할까?

엄마의 심부름을 나왔다 할까?

마음을 채 정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어쩐 일이니?"

"어...."

"넌데 어쩐 일이 어딨겠니. 들어와!"

미적미적 따라 들어가자 거실과 소파에 늘린 옷들로 어지러웠다.

아마도 말린 옷들을 개고 있었던 모양 같았다.

그걸 모두 안아들며 그 자리에 나를 앉혀두고는 방에다 집어넣고 나왔다.

숙모는 요즘 다이어트 중인지 며칠 새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자주 나오는구나?"

"한 달이나 지났는걸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럼 너도 군에 갈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네, 3주정도..."

"오늘 뭐할 거니? 내가 영화라도 보여줄까?"

"네!"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서둘러 반길 수는 없었다.

여기 오면서 줄곧 그 일을 궁리했다.

어떻게 숙모를 끌고 영화를 보러 갈 수 있을까하고..

그래서 영화관마다의 상영작을 훑어보고 온 터였다.

"왜? 늙은 숙모와 가는 게 싫어서..?"

"아, 아뇨! 그럴리가요.."

"너 애인 없는 건 이 숙모가 알잖아! 그리고 사실은 나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오늘 갈까, 내일 갈까 하던 중이였는데..."

"제목이 뭔데요?"

"이탈리아 영화라던데 제목은 '라스트 콘서트'....!"

"xx영화관....?"

"혹시 너 벌써 본 거니?"

"아뇨, 길거리에 붙은 포스트보고 좋은 영화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너도 그랬니? 그래, 우리 가자! 지금 당장..."

사실 나는 다른 영화를 점찍어 갖고 온 터였다.

그 영화는 포스트만 봐도 제법 찐한 영화였는데.. 그러나 상관없었다.

내가 가려는 건 영화 감상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시간도 때우고, 잘하면 색다른 경험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큼한 속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숙모는 큰방으로 들어가 입고 나갈 옷을 고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있자 긴 원피스 하나를 들고 나와 앞에 대 보이며 어떠냐고 물었다.

"이거 어떠니? 좀 젊어 뵈니? 너와 맞추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마치 소녀같이 들뜬 기분으로 연거푸 물어 왔다.

푸른 줄무늬가 시원해 보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좋아라 웃으며 엉덩이를 실룩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숙모가 저렇게 날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뭔가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긴 저번부터 예감이 이상했다.

아무리 급했다지만 팬티도 안 걸치고 있었다든지 내게 전에 없던 자상함을 베푼 거라든지...

무슨 털어놓지 못할 속절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핸드백까지 걸친 숙모와 집을 나서서 택시를 잡아탔을 때 숙모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넌 내가 반은 키웠다는 걸 넌 알지?"

"네, 그걸 늘 고마워해요!"

"그래... 그래......."

숙모는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는데, 손이 떨리고 있었다.

왜일까? 왜일까........?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걸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혹시....?

그랬다. 울고 있었다.

내 손을 잡은 손이 더욱 떨려왔다.

그렇다고 왜 우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숙모가 중간에서 차를 세웠다.

쳐다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술 할 줄 알지?"

"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숙모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무작정 앞서 걸었다.

그리고 어느 허름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레스토랑 같았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은 아담했다.

"어서 오세요? 아니 너, 대낮부터 웬 일이니?"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언니, 얘는 내 조카야! 내가 반은 키운 애지!"

그러며 아까 택시 안에서 한 말을 재차 확인하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묻지도 않고 술과 안주를 들고 왔다.

술은 맥주였다.

그녀는 먼저 내 잔부터 채워 주었다.

"조카가 잘 생겼네!"

"그지?"

쑥스러웠다.

숙모는 안에서도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왜 이러실까?

"얘 곧 군에 가! 우리 집에서 얘 인생의 반을 보냈는데.."

"그래서 서운해서 데려온 거란 말이니? 그게 아닐텐데...?"

"언니, 너무 갑치지마! 안 그래도 질식할 거 같애..."

숙모 주변에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게 확실했다.

아무래도 삼촌과의 문제이리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로선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거기 있을 적에도 문제가 없던 두 분 사이였으니까.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그제도 다녀갔잖아... 혹시 그 일이니?"

"그래. 결국 터질 게 터진 거야!"

"정수씨가 뭐랬는데?"

"집에 들어와야 얘길 듣든지 말든지 하지...!"

"그 만큼이니?"

정수씨는 삼촌이다.

숙모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빈 잔을 내가 채워주자 그 잔을 반쯤 마신 뒤..

"너 이 숙모 욕하면 못 쓴다?"

"제가 어찌 숙모를 욕하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애들도 알아?"

"모를 리 있겠어. 걔네 아빠가 틀어 놓았겠지! 그리고 그네들끼리는 왕래도 하나봐.."

"그렇게 까지나... 어쩜 그럴 수가 있니? 네 속이 속이 아니겠다!"

그 만큼 얘기를 들었어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삼촌이 여자가 생긴 걸까?

왕래란 말이 나왔으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모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 놀라지 마! 사실은 이 숙모는 애 못 낳은 여자란다. 네 사촌들도 모두 내 애가 아냐."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나도 술을 한잔 들이켰다.

앞의 여자가 술잔을 채워주었다.

"숨기려한 건 아냐. 네 엄마도 그건 알고 있어. 지금 네 삼촌은 요즘 그 여자 집에서 지내고 있어. 네 동생들도 틈만 나면 거기를 드나들고.... 휴!"

나는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앞의 여자가 담배를 꺼내어 내게 권했다.

사양할 수 없어서 그냥 받았다.

숙모도 한 개피 받아 물었다.

숙모가 문 담배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엄마처럼 캑캑거렸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빨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담배를 빨며 이렇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정말 몰랐어요. 평소 늘 평화로운 숙모의 모습만 봐와서 정말 꿈에도 생각 못해본 일이었어요!"

"괜찮아. 이 숙모 그렇게 나약하지만은 않으니까..."

"동생들에게는 제가 나무랄 게요! 못된 놈들...!!"

"그러지마! 걔들 앞에서까지 가련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걔들 제네 생모에게 간다한들 또 아들 하나 있잖아. 여기..!"

또 한번 내 손을 꼭 잡았다.

"얘, 청승떨지 말고, 앞으론 어쩔 건데?"

"되는대로 살지 뭐! 나가라면 나가고, 이혼하자면 이혼하고..."

"그런 말이 어딨니! 네가 왜 나가? 나가려면 정수씨더러 나가라 해! 여태 뒷바라지 해주고, 애들 다 키워 놓으니.. 뭐, 나가라고!! 내가 다 성질난다.. 휴!"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 음악을 바꾸고 나왔다.

마치 디스코텍 같은 데서 나올 법한 노래가 나왔다.

분위기를 바꾸자는 뜻 같았다.

그녀가 괜스레 그 음악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언니 이런 거 하나 하려면 얼마나 들어?"

"왜 물장사 하게? 넌 안돼! 이건 뭐 아무나 하는 줄 아니?"

"어디든 마음을 붙여야 할 거 아냐? 좀 갈켜 줘!!"

"차라리 옷가게나 책방 같은 거 해! 네겐 그게 더 어울려."

"지겨우면 나 더 못 살 거야. 제발 언니..??"

"어허 안 된데도.. 정 그러면 울 집에 놀러와서 종일 놀다 가! 아, 그것도 안 되겠다. 이곳 물이 얼마나 험한데..."

"언니! 언니! 나 어떡해! 나 좀 살려줘!!"

기어이 숙모가 탁자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옆으로 와 숙모의 등을 다독이자 그녀 품에 안겨 더욱 오열을 터트렸다.

옆에 앉은 내가 민망하여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 코끝도 찡해왔다.

그런 아픔을 속에다 숨기고 여태 살아 왔다니..

10여 년 같은 집에 살았지만 내겐 전혀 내색이 없었다.

동생들의 표정에서도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숙모 집을 떠난 뒤 본격적으로 터진 일임에 틀림없었다.

저번에 갔을 때 이미 삼촌과는 별거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미루어 보면 유난히 출장이 잦았던 삼촌, 그때마다 그 여자의 집에서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숙모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숙모의 성품으로 보면 모른 채 해 왔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딱 자르지 못한 숙모의 유연성이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꼴이다.

남의 애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 여자와의 계속적인 통정을 보고만 있어야 했을 숙모의 마음은 오직 했을까?

그때 손님이 들어섰으므로 여자가 숙모를 달랬다.

내가 아무래도 모시고 나가야겠다고 눈치를 보내자 그녀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내가 내미는 술값을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는 숙모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왔다.

바깥바람을 쏘이자 숙모는 뒤돌아 서서 손수건으로 얼굴부터 닦고는 옷을 여몄다.

그렇게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아니, 비틀거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내가 팔을 내 밀자 팔짱을 껴왔다.

팔 안쪽에 따스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오늘 나 청승맞지?"

"괜찮아요. 절 믿고 그런 말까지 해주신 걸 고맙게 생각해요!"

"그 말은 내가 해야지. 그 보다 영화 봐야지? 그거 보러 나왔으니까.."

평일이라서인지 영화관은 한산했다.

안에 들어와서도 숙모는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팔짱을 꼈다.

영화가 시작되자 숙모는 그 속에 몰입했지만 나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숙모의 말랑한 가슴살이 팔에 대어있었고, 내 손을 쥔 손으로 계속 만지작만지작 했다.

요즘 얼마나 외로우면 나를 보자마자 끌고 나왔을까를 생각했다.

옆 복도로 그림자 하나가 조그마한 소리로 "오징어나 땅콩, 팝콘 새우깡.."을 외며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잡아 땅콩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그걸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꺼내 숙모에게도 주고 나도 씹었다.

몇 안 들어 있어서 금방 바닥이 났다.

다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숙모는 습관이 된 듯 자꾸 손을 내 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 내 무릎 위에 엎어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내 손으로 덮었다.

숙모는 영화에 너무 몰입해서인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손을 위로 끌고 올라오고 싶었으나 참았다.

숙모의 아픔을 이용하여 내 욕심을 채운다는 건 너무 가증스런 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 그림자가 올라왔을 때 팝콘과 새우깡을 한꺼번에 샀다.

새우깡은 숙모에게 주고 팝콘은 내가 쥐었다.

숙모는 새우깡을 뜯어 하나를 입에 넣더니 내 것과 바꾸어 갔다.

그러나 그것도 곧 내 쪽으로 밀어버렸다.

입맛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나도 입맛이 사라져버렸다.

봉지 두 개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화면에 몰입했다.

내가 본 내용은 대강 이러 했다.

여주인공 이름은 스텔라라는 여자로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뻘인 중년 피아니스트인 리차드를 조잘거리며 따라 다닌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날의 열정을 다 잃어버리고 여행이나 즐기는 부랑아에 불과하다.

다시 피아노를 치라고 권하는 스텔라의 관심과 애정을 일부러 모른 채 하는 리처드는 모든 여행 경비를 스텔라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결국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헤어진 그녀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립던 친아버지의 집 앞을 서성거리던 스텔라는 들창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벽난로 앞에서 홀로 외롭게 책을 읽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잘 찾아 왔다고 생각한 그녀가 막 들어가려는데, 웬 작은 소년이 뛰어와 아버지의 목에 매달리어 안긴다...

그것은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이미 밤이 깊어 캄캄한 길을 되돌아 나오는 스텔라. 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던 스텔라를 저쪽 멀리 어둠 속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에 밝게 번지는 미소와 조금은 어색한 듯 웃으며 서서히 팔을 벌리는 리처드..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몽마르뜨 언덕의 작은 아파트에서 리처드는 작곡에 열중하고, 스텔라는 그를 격려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리처드가 작곡하는 <스텔라를 위한 콘체르토>가 완성되어 감과 동시에 스텔라의 병세도 깊어만 갔다.

드디어 그의 음악이 파리 교향악단에 의해 첫 연주가 되던 날. 피아노가 마주 보이는 무대 옆 작은 의자에 하얀 꽃처럼 앉아 있던 스텔라는, 스텔라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하는 리처드와 시몬이라는 여자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영화가 끝났을 때 숙모는 울고 있었다.

막다른 벼랑 끝에 선 숙모가 아니더라도 여자라면 누구나 울음을 터트릴 듯한 내용이었다.

다들 일어나 나서는데 숙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거였다.

"왜요, 한번 더 보시고 가시려고요?"

"가봐야 반겨줄 사람도 없는 집에 내가 어찌 가겠니!"

난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끌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털썩 앉았다.

시계를 보니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난 3시 반을 넘고 있었다.

술을 마시느라 점심 생각도 못한 터였다.

다음 시작은 네 시쯤에나 시작할 것이다.

나는 숙모를 앉혀두고 밖으로 나왔다.

휴게실로 가자 호도과자가 보였다.

그거 한 봉지와 우유 두 개를 사들고 돌아왔다.

숙모는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윤수야, 이 숙모 앞으로 어떡해야 하겠니?"

난감한 물음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호도과자와 우유를 내밀었다.

숙모는 빨대를 꼽아준 우유만 마시고 있었다.

보기 딱하여 호도과자 하나를 내밀자 입을 벌렸다.

그 입에 넣어주자 넙죽 받아먹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아니다. 아니었다.

넋 나간 여자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숙모를 포근히 감싸주고 싶었다.

그래서 팔이 근질거렸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숙모가 넋 나간 목소리로 또 한번 묻고 있었다.

"이 숙모가 어떡했으면 좋겠니? 어떻게 해? 어떻게..??"

내가 숙모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숙모도 주위를 의식한 듯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나의 팔은 자연스럽게 숙모의 등을 두를 수밖에 없었다.

숙모의 등은 보기보다 작았다.

너무 작게 느껴져서 더욱 가련해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워오고 있었다.

앞에도 사람이 차고, 옆자리에도 아가씨 둘이 앉더니 숙모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저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조금 있자 다시 화면이 뜨고 있었다.

애국가가 나올 때 다들 일어났지만(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뒤에 사람이 없어서 민망함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몇 편의 예고편이 있은 뒤 본 영화가 시작되고..

앞에서 미처 못한 시작 부분의 내용을 덧붙이면..

손을 다치고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리처드에게 진찰실에서 나오던 한 소녀가 상냥하게 미소짓는다. 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음 차례로 그가 들어가자, 의사는 뚱단지 같이 "당신의 딸이 백혈병"이라며 이제 두 세 달밖에 못 산다는 것이다.

리처드는 무슨 착오겠지 생각하다가 방금 전 마주친 소녀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녀가 자기를 아버지라고 속인 것이 틀림없었다. 

병원을 나온 리처드는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스텔라.

쉴새 없이 재잘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붙는 스텔라가 귀찮은 듯 무신경한 리처드는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살만큼이나 고독한 삶은 사는 중년의 피아니스트였다.

젊은 날 품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이미 온데 간데 없어졌고 지금은 세상의 벽에 갇힌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 갈 뿐이다.

두 사람을 태운 버스는 몬산미셸의 아름다운 해안으로 갔다.

리처드가 듣건 말건 떠들어대는 스텔라. 그녀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입원을 해야한다며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하자 마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처드를 아버지라고 말한 스텔라는 어려서 헤어진 친아버지를 찾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입원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그녀의 사정을 묵묵히 듣고 있던 리처드가 그제서야 조금씩 스텔라를 돌아다본다.

그리고 조금전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당장 머물 곳이 필요한 스텔라를 유일하게 자신의 재능을 믿고 도와주는 맘 좋은 아주머니 시몬에게로 데려다준다.

시몬은 후덕하고 따스한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

다음날 시몬의 차로 스텔라의 아버지가 사는 집을 찾아가는 두 사람. 겨우 집을 찾기는 했으나 흰 천을 씌운 가구들만이 남아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썰렁한 집안 여기 저기를 둘러보던 스텔라의 귓가에 어디선가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 왔다.

한 걸음씩 소리를 쫓아가는 스텔라...

그곳엔 겨울 바다의 파도가 눈부시게 부서지는 창 앞에서 피아노에 덮여 있던 흰 천의 한 귀퉁이를 걷어 놓은 채 연주에 몰두하는 리처드가 있었다...

...................................................................................................................

스텔라의 아버지가 파리로 이주했다는 관리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함께 파리로 향했다.

그 뒤부터는 내가 전편에서 본 것으로 앞에 이미 설명한 내용이다.

얼마 지나자 숙모의 울음은 거쳐 있었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향해 호도알을 집어넣으며 숙모의 앞에도 들이밀자 입을 벌렸다.

그리고 내가 마시던 우유를 뺏어 마셨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본다면 모두 연인쯤으로 생각할 거였다.

앞자리에 앉은 둘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여자가 남자의 품에 얼굴을 기대고 있고, 남자의 팔이 나처럼 여자의 등을 두르고 있었다.

다만 다르다면 가끔씩 서로 입술을 쪽쪽거리고, 남자의 손이 여자의 몸을 더듬기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정도의 차이였다.

숙모도 그걸 보았을 게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