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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위험한 거래 (2/10)

2장. 위험한 거래

“후……”

선우는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쪽지 창을 보면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명단을 추리는 것도 생각보다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왠지 신중해야할 것 같은 느낌에 통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몇 차례를 거듭하자, 이러다가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대충 훑어보며 지나치게 무성의해 보이는 쪽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쪽지를 워드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걱정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평소에 쪽지를 주고받던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댓글에서조차 처음보는 아이디 뿐이었다. 얄미울정도로 이런일에만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통화를 한다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고, 솔직히 귀찮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도통 내키지가 않았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었고, 그렇게 대충 추려진 명단만해도 대략 300여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히야~. 이렇게 많아?”

윤정이 꽤나 놀라는 눈치로 명단을 받아들 때만 해도, 선우의 찜찜함은 그대로였다.

***

선우가 명단을 넘기고 일주일이 지났다.

화색을 하며 명단을 받아든 것 치고는, 무슨 이유에선지 윤정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한집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사이지만 전혀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따로 불러서 말을 하자니 왠지 조바심을 내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물론 양이 양이니만큼 고작해야 일주일일 수도 있다. 일이 바빴을 수도 있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을 뿐 한참 진행 중일 수도 있다.

열흘째 되던 날, 선우는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윤정을 따로 불러 물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윤정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거? 그거 그냥 안하기로 했어. 무슨 대기업 면접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골라? 그냥 충동적으로 저지르기에는 너무 시간을 잡아먹겠더라고. 오빠도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것 같고 말이야.”

“그래?”

“응, 그리고 우리 계절 바뀌면서 한참 신상 런칭중이잖아. 정신없이 바빠서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네.”

“아, 그렇지. 이제 봄이니까.”

선우로서는 오랫동안 봐왔던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는 해도, 많은 인력을 두지 않는 쇼핑몰 특성상 윤정은 일에 시달려야했다. 그나마 주말은 챙겨 쉴 수 있게 된 것도 선우와 함께 살면서 경제적인 분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심 마음 졸여하던 선우는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재밌는 것은, 한편으론 안심도 되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아쉬운. 쉽게 설명하기 힘든 간사함…….

***

다시 열흘이 지났다.

선우는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 연재도 한편을 올렸다.

윤정이 이벤트를 언급하는 바람에, 심리적인 동요가 생겨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째서인지 키보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제 곧 마무리네. 대충 종결하면 되겠지.’

사실 재미로 시작한 일이니만큼 책임감이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글이니 완결은 지어야겠다는 생각일 뿐.

선우는 복사된 글의 확인 버튼을 누르며 한결 편해진 기분을 느꼈다.

“오빠, 뭐해?”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또 다시 윤정이 불쑥 선우의 방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게다가 오늘도 퇴근이 늦은 윤정이었다.

“이제 자려고. 늦었네?”

“응, 오빠. 이번 주 금요일 시간 되지?”

“나야 별 일 없지. 그런데 왜?”

“실은 우리 이번 신상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스토리보드 식으로 멘트도 조금 넣어볼까 해서. 오빠가 도와줬으면 하거든? 해줄 거지?”

“테마를 잡겠다는 얘긴가? 쇼핑몰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요즘은 가끔 그런 방식도 쓰고 그래. 아무튼, 사진도 찍을 겸 혜민이랑 오빠도 같이 해서 부산에 한번 다녀왔으면 해서.”

“우리 넷이?”

“응. 우리 넷에다가 스텝 세 명 더해서.”

선우는 멈칫했다. 뭔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윤정의 쇼핑몰 매출이 안정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무리한 계획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단지 사진을 찍기 위해 스텝을 3명이나 데리고 출장이라니.

여행이라는 명분을 생각하면 스텝이 걸렸고, 사진 촬영이라는 명분을 생각하니 상식 밖의 투자가 마음에 걸렸다.

“왜 부산이야?”

“신상도 신상이지만, 올 여름에는 수영복도 한번 취급해보려고 하거든. 아직 계절이 일러서 다른 모델은 좀 그럴 것 같고, 만만한 수연이 데리고 내친김에 찍어 보려는 거지.”

“며칠 생각하는데?”

“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주말 3일정도?”

“3일 씩이나? 그런데 굳이 혜민이랑 나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가족 여행 겸사겸사 하는 거지. 우리 어디 놀러가 본 지 오래되었잖아? 그리고 오랜만에 혜민이 사진도 찍었으면 싶고, 오빠도 작업과정을 보는 것이 텍스트 컨셉 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어?”

선우는 더 이상 꼬집어 되물을 말이 없었다.

3일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부산까지 가는데 당일치기나 1박 일정을 잡는 것이 더 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주 금요일 날 출발한다고?”

“으이구, 오빠. 나도 나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인데, 일정이 그렇게 벼락치기로 되는 줄 알아? 이번 주 금요일은 애들이랑 스텝들 인사시키려고, 오빠도 동행할거면 같이 만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아, 그래. 그럼 부산은 언제쯤?”

“음, 지금 생각으로는 2주후 쯤 생각하고 있어. 아무리 수연이라도 지금은 조금 추울 테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리고 금요일이 되었다.

약속시간은 7시였고, 장소는 몇 번인가 가본 적이 있는 혜민의 직장 근처의 호프집이었다.

선우는 혜민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수연을 데리고 출발했고, 약속 시간을 여유 있게 앞두고 혜민을 만날 수 있었다. 약속장소인 호프집에 도착하여 인원을 고려한 넉넉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무렵, 윤정이 도착했다.

“일찍 왔네?”

“뭐, 혜민이 퇴근 시간 맞추다 보니까.”

이미 얘기가 다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인지, 혜민과 수연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인지 수연이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런데 왜 호프집이야?”

공백을 메꾸기 위해, 선우는 별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유 있나? 다들 젊은 사람들이고, 어색하게 저녁식사 깨작거리는 거 보단 낫겠다 싶었던 거지. 괜찮지 혜민아?”

“네, 언니.”

아무렇지 않은 윤정의 말투에 혜민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선우가 무언가 시켜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윤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눈치를 보아하니, 약속했던 스텝들인 모양이었다.

윤정에게 들은 얘기로 딱히 성별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만 세 명이었다.

“아이고, 윤정씨. 며칠 만에 또 뵙는군요. 아, 이분들인가 봅니다?”

남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넉살이 있어 보이는 남자가 다가오며 제일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박 상길입니다. 이번에 좋은 모델 분들 모시고 카메라를 잡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신을 상길이라 소개한 남자는 묻지도 않은 정체를 밝히며 선우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선우의 눈에 상길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기 때문에 함께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마주 인사하며 청한 악수를 위해 손을 잡는데, 그리 힘을 준 것이 아닌데도 상길의 손이 꽤나 두툼하게 느껴졌다. 배가 조금 나왔고 선우보다 조금 작은 키가 흔하게 말하는 몸짱은 아니었지만, 짧은 머리에 떡 벌어진 어깨하며 굵직굵직한 선이 힘 꽤나 쓸 것 같은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김 석현입니다.”

“저는 권 정혁입니다.”

상길의 뒤에서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이들도 선우에게 대표로 인사를 한 뒤, 혜민과 수연에게는 목례로 대신하며 자리에 앉았다. 선우로서는, 사실 그다지 비중 있는 임무를 맡고 있지 않음에도 본의 아니게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석현이라 소개한 남자는 선우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고, 선우와 비슷한 키에 한두 달 정도 운동해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보이는 알 굵은 근육이 도드라져보였다. 전문 헬스트레이너라고 해도 전혀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셋 중에서 가장 어려보이는 정혁은 키가 상당히 컸고, 몸도 제법 좋아 보였지만, 그보다는 뼈가 굵고 골격 자체가 상당히 커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얼굴도 석현과 상길에 비해 상당한 미남형이었다.

“이 분이…….”

남자 셋이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상길의 시선이 혜민을 향하며 말을 끌었다. 소개를 요구하는 눈치였다.

“황 혜민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전에 말씀드린 동생이에요. 몇 번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마추어니까 잘 부탁드려요.”

잠자코 있던 혜민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마주 인사 했다. 이미 필요한 얘기는 전에 다 한 듯이, 옆에서 윤정이 거들고 나섰다.

“그럼 모델은 이쪽 분?”

“안녕… 하세요.”

자신을 바라보는 상길의 말에 조금 자신 없어 하는 말투로 수연이 답했다.

선우의 시선에, 수연의 낯가림은 나이를 먹었어도 나아진 것이 없어보였다.

“이렇게 보여도 카메라 앞에서는 꽤 능숙한 아이니까 걱정 안하셔도 될 거에요.”

윤정은 수연의 소개에도 거들고 나섰다.

상길은 윤정의 말과 함께 주름이 깊게 잡히는 눈웃음을 보이고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윤정씨 처음 봤을 때도 너무 미인이셔서 놀랐는데, 두 분도 정말 미인이시군요. 이거 촬영이 즐거울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선우가 듣기에 인사치례치고는 조금 느끼한 말이었다.

‘애들 예쁜 거야 나도 처음 봤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니 그렇다 치지만, 촬영이 즐거울 것 같다니, 혹시 수영복 촬영을 두고서 하는 말인가?’

선우가 왠지 옹졸한 생각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려는데, 이번에는 상길이 능숙한 말투로 소개에 나섰다.

“에, 그러니까. 석현이는 제 보조 겸 조명을 도와주기 위해 이번에 함께 가게 되었고요, 정혁이는 제가 짐 드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 윤정씨께 무리한 요구를 드려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자못 이해가 되지 않는 상길의 말에 선우는 윤정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윤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외부 인력인데다가 부산까지 동행하는 일이잖아. 저 정도 조건은 어쩔 수 없지 뭐.”

대답을 들어도 선우의 의아함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요즘 같은 인력공급 과잉 시대에, 무리한 요구 조건을 들어줄 만큼 사진사가 없나?’

하지만 역시 대화 도중에 든 의아함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선우는 아마도 인원이 늘어도 비용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거나, 아니면 윤정의 말대로 급하게 외부 인력을 구하느라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겠거니 정도로 결론을 내려야했다.

이후의 술자리는 그저 평범한, 친목을 위한 자리였다. 외부 인력으로 인해 아무래도 낯을 가리는 수연과 몇 번 사진 모델의 경험이 있긴 하지만 익숙지 않은 혜민을 배려한다는 명분이었다.

수연과 혜민의 성격을 잘 아는 선우가 듣기에도 윤정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윤정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게 된 세 명의 남자들도 업무를 위해 나온 사람들답지 않게 술자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

다음 주 수요일.

작은 민속주점의 테이블에 세 남자가 앉아있었고, 맞은편에는 윤정이 있었다.

이미 술도 세병이나 비워진 상태였고, 대화 역시 한참은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저희는 얌전히 따라갔다만 오면 되는 거다, 이 말씀이죠?”

마치 확인하듯이, 상길이 윤정에게 물었다.

“네. 세분께서 개인적으로 필요하신 것을 빼고는, 모든 비용은 저희가 책임질 거예요. 만약 촬영에 대한 페이를 원하신다면 그것도 드릴게요.”

“아니요, 아니요. 몸만 가는 것도 황송한데 페이는 무슨, 제가 프로도 아니고. 그런데 그때 봤던 여자 분이 정말 그 소설에서 나오는 그 분이 맞나요?”

“네. 혜민이요. 왜요? 못 믿겠어요?”

“허헛, 아니요.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어려 보이셔서요.”

“혜민이가 심하게 어려보이는 것은 저도 알지만, 아쉽게도 30살이 맞아요.”

“허어, 투피스 정장이 너무 깔끔하게 잘 어울리는 것만 빼면 22살이라고 말해도 믿겠던데.”

“왜요. 직접 보고나서 실망했어요?”

“아이고, 그럴 리가요. 오히려 생각한 것 보다 너무 예쁘셔서 놀랐습니다. 미리 듣기는 했지만, 옆에 있던 수연씨도 무슨 인형이 앉아있는 것 같았고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이었다. 상길의 양 옆에 앉아있는 석현과 정혁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왜 아니겠니.’

윤정은 상길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세분은 무슨 관계세요? 수연씨가 모델인 것은 들었고, 혜민씨는 무슨 비서직이라고 소설에서 본 것 같은데…….”

“같이 살아요. 자매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아하, 네. 그럼 그때 곁에 계신 남자 분이 그 작가님?”

“네, 맞아요.”

“이거 참, 재밌네요. 작가님조차도 모르게, 윤정씨와 저희만 알고 있는 이벤트라니.”

“굳이 이벤트라고 생각 안하셔도 되요. 우리가 얘기했던 대로 그냥 사진 찍으러 부산에 잠시 다녀오신다고 생각하셔도 좋고요. 마지막 날에는 저희랑 술도 한잔 하시고, 편하게 놀다 오시면 되요.”

“으음.”

윤정의 입장에서는 배려 차원에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순간 상길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곁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석현이 상길의 옆구리를 찌르는 제스처를 했다.

“형님.”

“알아, 알아. 가만히 있어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석현을 자제시킨 상길은 재차 윤정에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윤정씨, 저희 입장에서는 부산까지 가는 건데, 저희가 무슨 전설의 카사노바도 아니고, 사전에 얼굴 한 번 보고 부산 가서 3일안에 꼬셔보라는 건 너무 무리한 얘기 아닐까요?”

이런 식의 항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윤정도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사전 모의를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두 아이 다 그런 문화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친구들이고요. 그래서 경비 일체를 저희가 부담하겠다고 말씀드린 건데, 생각이 바뀌셨어요?”

“허헛,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솔직히 윤정씨 계획에 동조하기는 했지만, 저희가 원래 원하던 바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경비야 부족하면 저희가 보탤 수도 있는 거고…….”

대놓고 말은 못하겠던지, 빙 둘러 상길이 얘기했지만 윤정이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윤정의 계획에 들러리만 서달라는 것은 조금 이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급적 저는 협조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할게요. 애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 까지만. 그 이상은 저도 어려워요.”

“그래주시면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다만 확실한 게 없다보니, 당근 하나만 던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하.”

“당근? 뭘 바라시는데요? 괜찮으니 뾰족하게 말씀해보셔요.”

윤정은 처음부터 무리하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킨 만큼, 너무 지나친 얘기만 아니라면 가급적 들어줄 생각이었다. 이들도 부산까지 따라올 만한 동기는 필요할 테니까.

상길을 비롯한 세 남자는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이윽고 석현이 상길의 귀에 뭔가를 소곤거렸고 상길의 고개가 끄덕였다.

“소설에서 보니 혜민씨가 무모라고 하던데…….”

“무모?”

“거기가 빽이라고요.”

상길의 말을 잠시 혼동했던 윤정은 이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요?”

“저희 셋 다 선천적인 무모는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한 번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어요?”

윤정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얘기였지만 대답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사실 저들이 바라는 범위를 생각해봤을 때, 그 정도가 적정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도, 그리고 선우에게도.

잠시 생각을 정리한 윤정이 천천히 대답했다.

“말했던 대로, 이틀째 밤에 숙소에서 술자리를 만들 거예요. 그때 분위기 봐서 적당한 타이밍에 사진을 찍자고 하세요. 멘트는 알아서 생각해주시고요. 제가 옆에서 적당히 어시스트 해드릴게요.”

“누드 사진이요?”

상길은 별로 크지 않은 눈을 오버해서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대신 그것도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가져가시는 건 안 돼요. 그냥 보기만 하세요.”

“네, 네. 물론이죠. 아이고. 어려운 얘기를 쿨하게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상길은 그 정도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윤정은 그런 상길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제 그만 대화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요즘 자주 귀가가 늦은 탓에 피곤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확인할게요. 주의할 점은 다들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촬영한 사진은 가져가지 않는다. 물의를 일으키는 무리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자제력을 잃고 물의를 일으켰을 시,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즉각 돌아간다. 맞지요?”

자못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인데도, 상길은 미소 띤 얼굴로 윤정의 요구조건 이었던 내용을 상기해주었다.

만족스러운 상길의 대답과 함께, 윤정은 예의상으로나마 미소를 보이며 다음 주 금요일에 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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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소설은 그냥 소설로 즐겨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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