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자퇴서를 낸 후에도 마사오의 생활에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뭐가 됐든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식료품 회
사에서 운송 일을 해보았지만, 근성이 없는 마사오는 한 달만에 싫
증이 나서 그 회사를 그만두어 버렸다
고학생이었던 그는 대학에 다닐 때도 출판사 재고담당, 완구공
장 발송담당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어느 것
이고 삼 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마사오는 한 가지 일에 열중할 수
없는 성격은 자신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싫증 잘 내는 성격은 시골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
지가 뇌일혈로 갑자기 죽고 난 후 더욱 심해져서, 이제 고생하여
대학에 다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생각되어 스스럼없이 자퇴서
까지 내고 만 것이었다
대학을 그만두었을 때도 마사오는 아무런 감상을 느끼지 못했
다. 단지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마사오는 변두리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 년째 살고 있다 네 평
과 다섯 평짜리 방 두 칸인 집은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천장도
여기저기 갈라져 있다. 이런 낡은 건물에서 벌써 년이나 버텄구
나 하며 가끔 쓴웃음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사실 게으른 성격 탓
에 이사할 염도 네지 못하고 있다.게다가 월세 10만 원짜리 싼 집
이 어디 요즘 흔하기나 한가. 이 집 주인은 게다가 마사오와 마찬
가지로 게을러 터져서, 제때 제때 월세를 받으러 오는 일이 없다.
방 수리를 요구해도 귀찮아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마사오에게는
아주 안성맞춤한 집이었다
마사오는 그런 아파트에 종일 틀어박혀 있는 날이 많아졌다. 이
제 직장을 구하는 일도 겁이 나고, 구한다 해도 어떤 일에도 흥미
를 갖지 못하는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
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전부터 애독하고 있
던 잡지에 투고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소설을 쓸 만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기묘한 성벽만을 믿고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쓰면서 묘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황홀한 도원경에 빠져들어 한 손으로 사타구니 사이에서 꿈틀거리
는 것을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 글을 썼다. 축축히 젖어 가는 눈
으로 찢어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신
명나게 일을 할 수가 있구나 하고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사홀간 딱딱한 펐과 물만으로 때우면서 목욕도 하지 않고
묘한 창작에 전념하였다.손톱에는 까맣게 때가 끼고,피부는 거
칠거모해지고, 콧구멍에는 시커먼 코딱지가 생기고, 방안에는 악
취가 돌기 시작했지만, 마사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만 사홀에
걸쳐 열과 성을 기울억 소설을 완성했다.그리고 그는 급히 우
체국으로 달려가 발송했다. 물론 그것이 잡지에 꼭 실릴 것이라고
는 믿지 않았지만
닌 잡지를 사 보는 것은 마사오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도로변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매달 열광팬}이나 영 } 등
이상 성벽을 다룬 잡지를 구입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투고한
{ 퀸}에 그의 작품이 실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사오는 웬지 자신의 노력과 열의를 우롱당한 듯한 불쾌한 기
분에 빠져들었다. 한창 잡지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단 오니
사부로나 치다 마사오 따위의 소설에 비해 자신의 소설이 뒤질 게
뭐란 말인가? 오히려 횔씬 박진감이 있지 않은가? 자신이 철이 들
었을 때부터 사디스틱한 성의 환상에 시달려온 원인은 어디에 있
는가, 왜 여체에 대한 집요한 정념을 사디스틱한 형태로 연소시키
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시작한 자신의 작품은
이상 성애를 현실과 관념의 두 가지 면에서 다룬 문제작이라고 생
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다루지 않고 케케묵고 먼지 앉은 싸구려
소설만 늘어놓고 있다니 . .마사오는 그런 한심한 편집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가게 앞에 늘어놓은 잡지를 뒤적이는 동안, 특히 한 잡지
의 권두 그림에서 결박 누드를 발견했을 때 마사오의 마음은 어느
덧 진정되어갔다 말할 것도 없이 마사오의 관능이 기분 좋은 흥분
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권두 그림과 그라비아에 게재된 결박 누드 모델들은 모두 똑같
이 생기 없는 표정을 하고 몸매도 형편없었지만, 마사오는 그 모델
의 용모나 육체에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하나하나 넣어 보며 황홀
한 장밋멎 망상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곳에 있는 여배우나 가수의 교만한 미를 파
괴시켜 이처럼 무참한 모습으로 묶어 두고 마음대로 데리고 놀면
얼마나 통쾌할까.
게다가 그 잡지에는 관장을 테마로 한 소설이 제법 많았는
데 공상의 미녀를 친친 묶어놓고 무조건 관장을 시켜 배설을 하게
만드는 데 이르자, 마사오는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흥분
을 느꼈다.
이제 완전히 낯이 익어 버린 책방 아저씨는 마사오가 고른
잡지를 포장하며 인사 대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전에는 책방애서 이런 종류의 잡지를 구입하는 것에 대해 뭔가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전척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생물 아닌가? 이든 뭐든 이상 성벽
을 다룬 잡지들이 최근 서점 앞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것은 어쩌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불가해한 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리얼
리즘 정신의 산물이라고 마사오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이치는
어찌되었건 지금의 마사오에게 있어서는 잡지 속의 도원경에
빠지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사오 앞의 현실은 막막했다 이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
면 과연 자신의 인생에서 쾌락이라는 것을 얻을 수나 있을지 하는
삭막한 심경이 드는 것이었다.
마사오는 스물네 살이었다. 청년의 다감한 피가 끓는 나이가 아
닌가! 남들처럼 애인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공상과 망상 속에서
는 절세의 미녀를 음란하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마사오지만 현실에
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제 여자라면 아무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의 여자라고 하는 여자는 전부 자기를 무
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마사오는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이어서 상대의 얼굴을 똑바
로 쳐다보지 못할 뿐더러 걸음을 걸을 때도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구
부정하게 해서 걷는다. 표정은 항상 음침했고, 피부색마저 묘하게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마사오는 종종 그런 것들 때문에 여성들
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쨌든 정혼을 기울여 쓴 소설이 채택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게 되자, 마사오는 다시 원래의 허무상태로 떨어졌다. 대체 앞으
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마사오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
을 것 같은 염세관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이리저리 윙굴며, 그을음 투성이의 창밖으
로 붉은 빛을 띤 태양이 황량한 인가의 지붕 아래로 떨어져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마사오는 그저 공상만을 되풀이하고 있었
다.
도회의 미녀를 모조리 납치해서 지방의 한 작은 산 속에 감금해
놓고 자신이 정념을 만끽할 때까지 고문하는 공상-그 다음은 하
이재킹으로 수억 엔의 돈을 챙겨 쿠바로 망명한다는 바보 같은 망
상-공상과 망상에 지칠 즈음에야 그는 공복을 느찐다. 이불을 걷어
차고 거리로 나와 풀어진 눈을 끔뻑거리며 그는 걷기 시작했다.
단골이 되어 버린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을 시켰다. 이것이 그의
저녁식사였다. 남은 동전을 계산하면서 학교 다닐 때 자주 갔던 아
지트에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찻집에는 에스 대학의 과격파 학생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거
품을 품으며 격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계급적 입장에 서있지 않느
니 어쩌니 하며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목청 높여 떠들어대고 있
었다. 마사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끄럽게 토론
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사오는 이런 젊음 속에도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열중하썩 흥분하는 일들은 뭔가 사치스러운 취미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마사오에게 당장 급한 문제는 내일부터의 밥값이었다. 생
각해 보니 방세도 석 달이나 밀려있다.
마사오는 횡하니 그 찻집을 나왔다 쩍쩍 달라붙을 듯 차가운 네
온불빛 아래를 마사오는 고양이 등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
은 채 걸었다
그때였다 마사오의 곁을 지나가던 검은색 소형차가 갑자기 멈
추더니 클랙션을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다가가 보니
대학 동기인 호리구치란 친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딜 가는데 멍청하게 걷고 있냐,마사오.'
호리구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타!술마시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조수석에 웬 여자가 타고 있었다.
'이 녀석.바로 얼마 전에 학교를 그만둔 마사오라고 해.음침해
서 전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녁석이지 .'
호리구치는 옆의 아름다운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마사오를 소개
했다
호리구치의 아버지는 큰 건설회사의 사장이다. 부잣집 아들인
데다가 핸섬보이여서 그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당연했지
만, 지금 옆에 있는 저 여자가 그가 데리고 다녔던 여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미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하라 유리코라고 해요.잘 부탁합니다.'
그녀는 마사오를 돌아보며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용모를
정면으로 본 마사오는 그 단정한 미모에 압도되어 엉겁결에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목부분에서 부드럽게 웨이브진 밤색 머리칼의 아름다움 볼선이
나 목선도 매끄럽고 섬세하며 피부는 상아및으로 빛나고 있다. 게
다가 예쁘게 다듬은 속눈썹과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꿔라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어때,내 애인,상당히 미인이지?'
호리구치는 신호를 기다렸다가 차를 출발시키며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게다가 이 아가씨는 유명한 현월류 꽃꽂이계의 대가인 시마하
라 유키 씨의 동생이야.'
그으래?하고 마사오는 일부러 놀란 듯한 소리를 냈다. '
시마하라 유키는 현월류 꽃꽂이계의 대가로도 유명했지만 무엇
며 닉
보다 그 뛰어난 미모로 자주 주간지의 그라비아에 실렸다. 올해 나
이 서른. 전 외교관 부인으로 스물여섯에 미망인이 된 여성이다.
어쩐지....... 그런 언니를 뒀으니 저렇게 예쁘겠지.
호리구치와 유리코는 어캐를 맞대듯이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나하고는 전혀 차웠이 다른 두 청춘이 여기 있구나 하고 마사오
는 뒷좌석에서 두 사람을 묵묵히 관찰했다.
호리구치는 신주쿠의 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로 저기야. 따라와."
호리구치는 유리코의 손을 잡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그 뒤를 그저 개처럼 따라 걸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클로버'라고 하는 고급 카페였다.파란 주
단이 깔려있고, 사방엔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중앙에
그랜드피아노가 놓여있고, 한 미국인이 스텐드의 손님들에게 애교
를 부리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마사오는 그들을 따라 대리석으로 된 탁자에 엉거주춤 앉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곳에 온 것 같아 어색하기
만 했다. 이런 분위기를 즐기려면 저희들끼리나 오지, 어째서 이런
고급 클럽에 자기까지 끌고 왔는지 마사오는 호리구치가 원망스러
워졌다
호리구치와 유리코는 웨이터가 가져온 메뉴판을 뺨을 비비듯이
함께 바라보며 안주와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호리구치는 잊었다
는 듯이 마사오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야.넌 뭘로 할래?'
마사오는 메뉴판을 받을 생각도 않고 말했다
'나야 뭐 맥주하고 마른안주면 돼."
'그레?'
호리구치는 보이에게 메뉴판을 돌려주며 주문을 했다
그나저나 나 너희들 방해하는 거 아니냐?"
마사오는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얘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다
다이즘의 그림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림 이야기, 나는 모던보다
쿨이 좋아 하는 음악 이야기
두 사람의 그런 대화가 마사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마
사오는 그저 기품 있고 서정적인 유리코의 옆얼굴만을 홀깃홀깃
흠쳐보다가 유리코의 시선이 자기 쪽을 향하면 황급히 미국인이
피아노 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마사오는 유리코의 아름
다운 용모에 마음이 설레면서도 점점 그것이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고 있었다.
이윽고 호리구치가 웨이터에게 위스키를 한 잔 더 주문한 후 말
을꺼냈다
'실은 네게 용무가 있어서 여기로 부른 거야."
'너 말이야,생활태도를 좀 바꿔 보는 게 어떻겠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꺼내는가 하고 눈을 끔뻑거리는 마사오에
게 호리구치의 말이 이어졌다
'학교를 그만둔 후부터 아직 하릴없이 빌빌거리고 있잖냐.폐게
는 의욕이라는 것도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