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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녀 (妖女) - 15. 무 협
원저자진경룡 번역,각색천연자석
15. 선택 選擇.
악령마종은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경공을 전개하고 싶었지만 그놈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럴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의 업무는 자질구레한 것부터 중요하고 굵직한 것들까지 엄청난
양이었다.
마도의 네 하늘 중 하나인 ‘수라마종’ 세력이 봉문에 들어간 뒤, 강호에서는
한바탕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
바로 수라마종이 봉문에 들어감으로서 비게 된 여러 이권과 먹음직한
공백지역들...
‘마교’는 소극적이었고 무림맹은 여러 세력이 모여 있었는지라 단일 세력
으로 가장 신속히 행동했던 악령마종이 이번에 상당한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점포, 주루, 숙박업, 수운, 각 지역의 산물이 오고가는 크고 작은 시장...
더구나, 마도방파의 특성 상 각종 밀매와 밀조 심지어 홍등가와 도박사업 등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널리고 또, 널렸던 것이다.
“......”
희미하게 아름다운 미 서생...‘악령마종’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이번에 대충 처리해야 할 일들은 깡그리 해결했으니 며칠 푹 쉴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새로이 얻게 된 즐거움...‘불마요미’ ‘려화’를 생각하면 입가의
미소는 더욱 진해진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주군...‘금화단’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뭐라...”
악령마종은 전 악령마세의 수장이며 중심이다.
때문에 그 자신만의 친위세력이자 그의 은밀한 손발이 되어주는 이들이
존재했다.
악령마종의 그림자...‘무영혼(無影魂)’
모두가 한 문파의 장문인 급 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오직 악령마종 본인의
명령만 듣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막고 있는 이들...여자들로만 구성된 악령마세의 무력집단
‘금화단(金花團)’ 여 무사들...
물론 ‘무영혼’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전력임에는 분명했으나 특유의
치밀함과 단결력...그리고, 영원한 악령종의 안식처라는 ‘요화궁’의 배경에
힘입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만약 두 세력이 충돌할 경우 좋게 보아야 ‘양패구상’ 이랄까...
“본좌가 가 보겠다...물러서거라”
“존명!”
“.....”
저벅저벅...나직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발걸음...지극히 평범한 듯 했으나
거기엔 절대자의 위엄과 자연스런 기세가 듬뿍 실려 있었다.
“...어인 일이냐 왜 본좌의 처소 앞길을 금화단이 막고 있는 게냐!”
잔잔한 말소리...하지만 부복하고 있는 무사들의 몸은 미미하게 떨렸다.
서늘한 한기가 등골을 스치고 지나는 듯 으시 으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맨 앞...부복하고 있던 금화단 단장이 고개를 들었다.
“대종사께옵서는 얼마든지 들어가실 수 있사옵니다...허나,”
“......”
“대종사님 외엔 어느 누구도 저희가 막고 있는 이 안으로는 들어설 수
없사옵니다...“
“......!”
꿈틀꿈틀...악령마종의 눈썹이 움직였다.
의아함과 약간의 노여움...그리고, 호기심...
그 와중에...악령마종의 뒤쪽에 시립하고 있는 무영혼의 무사들...그들 몸
주위로 서리서리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누가 감히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인가...
악령마종의 대종사...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의 금화단 여
무사들을 살폈다.
맨 앞...금화단장은 한 무릎을 꿇고 검례를 취하고 있었고 뒤쪽으로는 빈틈
없는 검진을 구성한 여 무사들이 악령마궁 주 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설령 악령종 휘하 무영혼이라 할지라도 뚫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단단한
검진이었다.
“무언가 일이 있긴 있는 게로군...좋다, 앞장서거라.”
“...주군!”
흑의 복면인...무영혼의 수좌 흔히 ‘1호’로 불리는 이가 낮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우리 악령마세에는 본좌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이 몇 존재한다...
철혈율법을 집행하는 금마궁 집법원, 10대 장로...그리고, 금화단...무언가
이유가 확실하다면 본좌의 앞을 막고 되돌릴 수도 있다...허나 그렇지
않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악령마종의 목소리엔 긴 여운이 흐르고 있었다.
“응”
악령마종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곳곳에 밝혀진 홍등...홍촉...침상에는 화려한 비단...그 것도 원앙금침이었다.
한쪽에 마련된 주연은 정갈하면서도 풍성했는데 그 음식 또한 이채롭다.
새우요리에 마늘 소스, 뱀장어 탕과 구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잉어탕에
접시에는 죽순, 소고기, 인삼 등을 켜켜이 손질해 구워 꼬챙이에 꿰었다.
“허어...”
금화단 무사가 공손히 예를 취해 보인 후 나서자 한바퀴 휘 방 안을
서성이던 악령마종이 자리에 턱 앉았다.
침상 머리맡에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는 향은 용연향과 사향 이었다.
“......”
잠시 후, 불마요미 려화가 나타나 날아갈 듯 예를 올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꽤나 수수한 복장이다.
“역시 네가 꾸민 일이로구나...네게서 전해지는 기억을 더듬어 알아냈다...
헌데...“
악령마종이 양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본좌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나...확실치 않지만 단순히 너 자신을 위해
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 있다고 내 감각이 말해주고 있는데...물론 본좌를
우롱하는 것이라면 넌 오늘 내 손에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말이지...“
“......”
평소 별로 말이 없던 악령마종이었다.
지금 악령마종은 꽤나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천녀에게 주인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물처럼 고요한 음색...얼굴 표정 역시 잔잔하고 평안하다.
악령마종은 양미간을 좁힌 채 려화가 따라준 술을 따라 한잔 마셨다.
“그랬지...바로 너로 인해 우리 악령종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력 말이다...
본좌가 보고받기로는 상당히 잘 해결했다고 하더구나...”
입 안에 감칠맛...싸한 꽃향기가 감도는 술을 음미하며 악령마종이 미소를
머금었다.
“......”
려화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꿈틀! 악령마종이 눈썹을 움직였다.
“무언가 해결이 덜 된 게로구나...그렇지 그리고, 완전히 해결을 보려면
본좌의 결단이 필요하다“
의아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려화와 심령이 서로 연결된 상태라고 하나 상세한
려화의 속 마음 까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현재 려화는 자신의 본 마음을 어느 정도 가리고 있는 상태다.
그때, 려화가 손바닥을 두 어 번 짝짝! 마주쳤다.
한쪽 휘장이 촤르르! 열리고 시녀 둘이 양 옆에서 부축하며 누군가 한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
화려한 금빛 봉황의 수가 놓인 궁장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시녀들이
물러가고 고요히 앉은 그녀의 면사를 려화가 정중히 걷어 내었다.
“......!”
“......”
멍 하니 꿈을 꾸는 듯 초점이 없는 두 눈...폭발적일 듯 아름다운 얼굴에
정교하게 화장까지 되어 그 아름다움이 더했다.
바로 요화궁주...
그 때, 악령마종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경악한 얼굴로 려화를 바라본다.
가슴의 둔탁한 통증...그리고, 폭발적으로 밀려드는 감정과 기억들이 느껴
졌기 때문이다.
크...크윽!...이건...
자신을 향한 애증...분노, 동경, 애틋한 사랑...무엇보다 해를 바라보며 꽃을
피우는 해바라기처럼 살아 온 긴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감정들...
후으...후으으 바닥을 뒹굴며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히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 아셨사옵니까”
“......!”
싸늘한 목소리였다.
“예전 천녀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떠오르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내고
슬퍼하며 괴로워한다고 하셨지요...제가 뵙기로 주인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사옵니다. 언제나 말이지요...허나, 이제 뵈오니 주인님께옵
서도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는 계셨었군요...“
“......”
현재 요화궁주의 심령은 려화와 연결이 되어 있으며, 그 마음은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악령마종은 바로 요화궁주의 마음과 생각을 려화를 통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강도가 너무 강하고 요화궁주가 평소 쌓였던 것이 한 둘이 아니라
악령마종이 그 생각의 폭풍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군...”
볼쌍 사납게 바닥을 뒹굴던 악령마종이 천천히 일어난다.
이마에 땀이 배인 모습이었지만 얼굴 표정은 상당히 후련한 모습이다.
“예로부터...아녀자의 원한이 가장 무섭다고 하였는데...그 말이 맞군...
허헛...그러고 보니 본좌가 뿌린 씨앗인가...“
려화가 얼른 다가와 악령마종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선택은 주인님의 것이옵니다. 어쩌시겠사옵니까 더구나, 이런 일을 천녀
에게 맡기시다니요... 천녀와 궁주님 뿐 만 아니라 악령종 전체에 큰 피
바람이 불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사옵니다.“
“......”
맞는 말이었다.
악령마종은 새삼 그 것을 느껴야 했다.
사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었다.
정 골치 아프면 려화 한명만 제거하면 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불씨는 남는다.
어찌할 것인가...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젊은 혈기에 사랑싸움을 벌이던
여인들과 그 휘하 세력을 전부 박살냈었다.
물론 겉으로는 평안해 졌지만, 그로 인해 악령종의 세력이 상당히 줄었다.
밀려난 세력들은 다른 마도계열의 세력으로 편입되거나 악령종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 중 아직도 악령종을 적대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천녀가 만약 궁주님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손 치더라도 그 것으로
끝나겠사옵니까 만약의 예를 들어 천녀가 어떤 술수를 써서 주인님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서 이 악령종의 다른 분들이 천녀를 인정
하겠사옵니까 주인님...이 일은 그런 일이옵니다...여인네의 ‘정(情)’이란
사소하기도 하오나 때론 가장 강하고 사악하며 잔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악령마종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하던가...그렇군...본좌가 어리석었어...그래, 이제 본좌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풀죽은 목소리였다.
만약 이 자리에 악령종의 다른 누군가가 있어 이 모습을 모았다면 자신의
두 눈을 뽑아버렸을 것이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 것은 주인님께서 더 잘 아실 것이옵니다...아니 그렇사옵니까”
“으음...”
려화가 골머리를 앓는 악령마종을 살짝 바라보고는 심령이 완전히 제압된
요화궁주 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멍 하니 초점을 잃은 그녀의 두 눈과 자신의 눈을 가만히 맞추었다.
“궁주님...자...눈을 뜨세요...이제 깨어나실 시간이랍니다...”
“......”
려화의 두 눈은 붉은 홍보석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으응...으으응...”
가는 신음이 요화궁주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으음...‘악령마안(惡靈魔眼)’...그랬었군! 대대로 악령마공을 극성으로
연마한 자들만이 가지는 팔대능력 중 하나...저 아이가 악령마안을 몸에
지녔기에 요화궁주를 그토록 쉽게 제압할 수 있었어...! 허나, 어떻게)
악령마종...대범한 그였지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요화궁주...그녀는 천천히 닫혔던 눈이 열리고 휩싸였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당한 경험이 있지만 언제나 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이번이야 말로 각별했다.
자신의 밑바닥부터 전부 완벽히 까발려진...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 감정,
비밀스런 기억들...그 것이 모두 드러난 것이다.
얼굴이...전신이 달아올랐다.
“나...나쁜...정말...나쁜....흐흑...흐흐흑!”
방울방울 눈물이 고였다 길게 호선을 이루며 흘러 내렸다.
“궁주님...”
“흑...흐윽...흐흐흑...”
북받쳤던 감정들이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엉엉...이제까지 철이 든 후로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달콤한 내음이 감도는 익숙한 가슴...려화의 품에서 요화궁주는 오랜만에
실컷 울음을 터트렸다.
다독다독...려화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달랜다.
악령마종...그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주인님!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건가요”
“......!”
악령마종이 퍼뜩 놀란 얼굴을 해 보였고 려화의 품 안에서 요화궁주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 마무리는 주인님의 몫입니다. 기나긴 세월...원망과 시름에 잠겼던
한 아녀자를 내치시든 받아들이시든...씨앗은 싹이 터 열매를 맺어 씨를
뿌린 자에게로...주인님께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소서...“
려화는 커다란 새가 나래짓하듯 예를 취하며 뒷걸음으로 물러나갔다.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한 미 서생에게 조금 드센 얼굴의 미녀가 안겨
서로 부끄러워하며 약간은 얼떨떨해 하고 있었다.
“......”
“......”
쑥스러운 침묵...한동안 가만히 안겨있던 미녀가 탁! 손을 내치며 품을
벗어나려 했다.
미 서생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노..놓으세요...”
“사...사매!”
“......!”
퍼득...요화궁주가 악령마종의 품 안에서 전율했다.
‘사매(師妹)’...실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리다.
“사매...내가, 내가 잘못했네...이 내가...”
“......!”
딱딱하게 굳은 그녀...그러나 이내 도리질치며 서생의 품을 벗어난다.
“늦었습니다...예전 그 때...꿈 많던 소녀였던 저를 비롯해...우리 사형제중
남은 이들은 단 세 명...물론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죄없이
스러져간 아이들도 분명 있습니다...그 기억이...차마 대종사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군요...“
“......”
요화궁주는 이렇게 말을 하며 빠르게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귀신처럼 따라붙은 악령마종에 의해 팔이 붙잡힌다.
“놓으세요!”
“...그렇게는 못하겠네...왜냐하면 이 팔을 놓게 되면 본좌는 예전의 그
잘못을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지...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사과했네...이 내가 말이야...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
“또, 자네를 더 이상 놔두지 않겠네...아까 전해진 자네의 마음...기억들...
그 끔찍한 고통...정말이지...더는 겪고 싶지 않더군...절대로 말이야...“
“대종사!”
씨근씨근 얼굴을 붉힌 채 사납게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숨을 멈췄다.
미 서생이 슬며시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대종사 보다는 ‘사형’이 차라리 낫겠군...안그런가 소영...”
“......”
화륵...그녀의 고개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