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녀 (妖女) - 14. 무 협
원저자진경룡 번역,각색천연자석
14. 회한 悔恨.
약간의 소란...거세게 소리치는 여인의 분노한 목소리가 쨍! 울렸다.
“또...네년이...!”
“쿡쿡쿡...화나셨나요”
으드득! 이빨을 갈며 싸늘히 노려보는 데도 려화는 흥얼흥얼 유쾌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아니 지금 려화는 긴 의자에 앉은 요화궁주의 삼단 같은 머리칼을 정성을
다해 빗겨주고 있었다.
“빠득! 망할 계집...무슨 장난이지”
“장난이라뇨 흐으응...그보다 머릿결 아주 좋으신걸요 쿠쿠쿡...”
나직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머리를 다 빗긴 려화가 사르르 손안에 흘러
내리는 요화궁주의 머릿결을 가지고 놀 듯 쓰다듬었다.
살짝 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릿결은 자르르 윤기가 흐르며 매끈거리는
감촉이다.
“계집! 죽고 싶은가본데...좋아! 소원대로 해주지...어쨋거나 빨리 혈도나
풀지 못해”
려화는 대충 요화궁주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는 살짝 눈을 흘겼다.
“어머나...정말 성급하시네요...쿡쿡...그나저나, 몸이 안 움직이시니 불편
하시겠어요...쿠쿠쿠쿡...“
“네년이...정말...”
울화통 터진 요화궁주가 폭발할 것 같이 화를 냈다.
“휴우우...궁주님! 막힌 혈도는 궁주님 스스로도 풀 수 있어요...이전이었다면
어렵겠지만...잘 생각해 보세요...분명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을 테니...“
“뭐...”
요화궁주가 어안이 벙벙해 졌다.
몸 안의 진기를 움직이려 해도 요지부동...혈도를 풀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불편하거나 막힌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때 보다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몸...이전까지 무언가 답답하고 곽 막힌
듯한 기분이 확 풀리고 전신이 가볍기까지 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문득 머릿속을 더듬었다.
별로 떠오르는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
퍼뜩 요화궁주의 몸이 떨렸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소한 구결 하나...심법 한 가지에 내공을 운용하는 요령과
운기법이 생각난 것이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려화를 한번 노려본 뒤 조용히 내식을
일깨우며 정신을 집중했다.
“......”
언제 그랬냐는 듯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운...잠시 몰아지경에 빠진 요화
궁주가 눈을 떴다.
팔다리가 움직인다.
느릿하게 신중한 몸짓으로 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 가득 힘이 넘쳤다.
내식이 안정되어 있고 이전보다 공력 역시 상당수준 는 것 같았다.
더구나, 왠지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린 것이 후련하기 까지 한 느낌...
후우우...숨을 몇 번 내쉬고는 스윽! 한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는 려화를 노려보았다.
“제 말이 맞지요”
“......!”
울컥!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파지직! 전류가 퍼지는 손이 위로 치켜 올려
졌다.
그러나...
“후우우...관두자...너 같은 계집...”
제풀에 탁! 맥이 풀리며 손을 늘어뜨리고 만다.
그런 그녀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라보는 그녀...려화가 가볍게 눈웃음
쳤다.
“궁주님께선 역시...제게 노여움을 품으신 게 아니었군요...아니, 정확히
말씀드릴까요 ‘지나친 사랑은 증오로 변한다’...가 아닐지...“
퍼뜩! 앉았었던 긴 의자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던 그녀...요화궁주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무슨 말이지”
타박타박 다가온 려화가 스윽 요화궁주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주인님을...아니 대종사님을 좋아하시는 것이지요 아주 많이...하지만,
대종사님께선...“
“......!”
살짝 말끝을 흐리는 려화...요화궁주는 쿵! 가슴에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크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요화궁주를 향해 려화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진다.
“무엇보다도...궁주님...그 좋아하는 마음...한번이라도 전해 보신 적 있으
신가요 제 느낌이지만...속으로 앓아만 오셨을 뿐...지금까지...한번도...“
“닥쳐!”
“짜악!”
순간...려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콰다탕! 거칠게 나뒹구는 려화...한쪽 뺨을 손으로 감싼 려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든다.
“하아...정곡을 찔렀나요”
“......!”
화가 났다기보단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려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간다...역시...음모와 간계보단 힘으로 밀어붙이시는
성격...현재 마도의 100대 고수에 드는 평판은 그 때문일 것이겠지요...“
툭툭...려화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일어났다.
“아야! 또 입 안이...후우우...벌써 몇 번째인지...”
려화는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아닌게 아니라 핏줄기가 입가로 가늘게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
퍼뜩 놀란 눈으로 려화를 살피는 요화궁주...이전까지와는 달리 왠지 풀이
죽은 모습이다.
슬쩍 입가의 핏자국을 핥은 려화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부들부들 덜리는 손...여태까지의 요화궁주답지 않은 모습이다.
“미...미안...해,,,”
“......”
려화는 자신의 살짝 멍이 든 한쪽 볼에 닿은 요화궁주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천녀는...이전, 정파에 몸담았던 때...마도의 인물들은 모두 피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마귀들인 줄 알았었지요...하나, 제가 틀렸던 것이었어요...“
려화...그녀는 물기를 가득 담고 있는 요화궁주의 눈 가를 조용히 훔쳤다.
“가볍게...술 한 잔 하실래요 때마침 제가 담근 과일주가 익었는데...”
요화궁주...그녀는 머뭇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렁술렁...요화궁과 불마전의 시녀들이 놀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급 무사들...특히 요화궁주를 지척에서 경호하는 금화단 무사들 사이에서
빗발치듯 전음이 오고갔다.
심지어 급할 경우에나 쓰는 전서구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요화궁주와 불마전주가 사이가 좋아진다...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곳은 불마전의 본전...시녀들이 바싹 귀를 들이대고 문틈의 소리를 엿듣는
가운데...금화단 무사들마저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요화궁과 불마전 뿐만 아니라 악령마세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여자는 가벼운 차림으로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순하면서 감칠맛이 도는 과일주...이전 아미파의 여승 시절에 약주 담그는
법과 함께 배운 것이다.
탁! 요화궁주의 잔이 놓였다.
쪼르르...잔을 채워주자 그대로 쭈우욱! 넘어간다.
벌써 몇 잔인가...이미 술항아리 하나하고 절반이 빈 상태다.
“후우우...조금 천천히 하시는 게 어떤지...안주도 좀 드시면서...”
“시끄러!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인데 술이나 따러!”
‘주기(酒氣술기운)’을 배출하지 않은데다 순한 술이라도 상당히 급하게
마셔 댄 요화궁주는 꽤나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하면 사람의 본 모습이 보인다던가...지금의 요화궁주는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종사님...훗! 아니 나의 ‘사형’이시기도 하지...원래 위로 두 분의 사형이
더 있었고...사저 사매들도 몇 명 있었지만 남은 것은 나랑 그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음양궁주...그리고, 현 대종사님 뿐...크크크...후후훗...“
“......”
비칠비칠...요화궁주는 쓰게 웃었다.
열명이 넘었던 사형제들...그 중에 현재까지 남은 인물은 세 명...그나마
요화궁주와 음양궁주는 현재의 악령마종과 세력을 다투지 않았기에 살아
남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정파와 사파 어느 문파든 그렇지만 한 문파의 정점에 서기 위해서는 수많은
간계와 세력다툼...피와 철의 가시밭길을 헤쳐가야 가능한 것이다.
요화궁주...‘벽력선자’ 혹은 ‘요화신모’ ‘남 소영’...
음양궁주...‘음양인’ ‘진 림’...
그리고, 현 악령마종인 ‘진마서생’ ‘이 정’...
이들 간의 얽히고설킨 애정관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던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악령마종은 악령마종대로 나머지 둘은 둘대로 정신없이
살아온 터라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악령마종이 오랫동안의 ‘참오’끝에 마공을 완성하고 더구나
전설상으로 전해오던 마공의 한계를 벗어나게 됨으로서 다시 수면위로
불거진 것이다.
그나마 음양궁주의 경우 ‘양성’ 이란 문제와 상대적으로 조용한 성품 탓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요화궁주의 경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악령마종...그는 조그만 알력이나 세력다툼도 용인
하지 않고 완전히 정리해 오며 현재의 악령마세를 반석 위에 일구어 놓았다.
그 조그만 알력에는 자신을 사이에 둔 애정문제 역시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전에 악령마종을 사이에 두고 암투를 벌였던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정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희생된 세력들의 우두머리...그들은 모두 악령마종의 사매들 이었다.
“사형은...무서운 분이야...크큭...피도 눈물도 없는...이전, 사형께서는 자신
에게 자리를 넘긴 사부님까지 죽여 버렸지...물론 아주 조용히...사부님의
친딸...가장 어린 사매도 함께 말이야...“
“......!”
애증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터억! 술잔을 비운 요화궁주...남소영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했다.
“네가 아까 한 말이 맞아...난 사형이 어떤 때는 무섭고 싫어...아니, 솔직히
증오스러워!...이런 괴로운 마음...차라리...콱 죽어버렸으면...사형의 손에...
후훗...날 죽이면 사형은 어떤 기분을 느낄까 가끔...궁금할 때가 있지...
크크큿...후후후...깔깔깔...“
“......!”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웃음 속에는 듬뿍 한과 증오가 배어 있었다.
섬칫...려화는 손끝을 떨었다.
폭발 직전의 벽력탄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그만큼 쌓인 게 많았으리라...어디 이 요화궁주 뿐이겠는가...악령마세...
악령마종의 엄청난 힘과 조금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철권통치로 유지해
오고 있기는 했으나 내부에는 발산되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불만과
증오가 쌓여있을 것이다.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
“......”
려화가 불쑥 요화궁주에게 빈 술잔을 내밀었다.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요화궁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픽 웃었다.
“너란 아이는 참 재미있단 말이야...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별나긴 했지만...”
투덜대듯 말하면서도 요화궁주는 술 주전자를 들고 대충 쪼르르 려화가
내민 잔을 채운 후 자신의 잔 역시 채웠다.
잠시 그녀가 술잔 안의 액체를 바라본 후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갈 찰나...
훌쩍 잔을 비운 려화가 탁 술잔을 놓고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가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궁주님...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어요
궁주님의 모든 것을 말 이예요...“
“.....!”
요화궁주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수 없는 이야기가 두 여자의 시선 사이에 오고갔다.
후우...낮게 숨을 내쉰 요화궁주가 잔을 들어 훌쩍 마신 후 려화를 노려
보았다.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로군...하지만 재미있겠어...”
“......”
섬뜩한 안광이 요화궁주에게서 폭사되었다.
방금 전까지 술에 취했었다는 것이 거짓말 이었던 것처럼...
실제 요화궁주가 어느 정도 술에 취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달리 마도의 고수라 칭해지겠는가
순식간에 공력을 움직여 술기운을 깡그리 날려 버린 후 맑은 정신으로
려화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네게 맡겨라...후훗...그래...좋아! 한번 해보자...뭐 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테니까...그런데...어떻게 무엇을 하겠다는
거지“
“절대 궁주님의 신상을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절대로 말이지요...”
의미심장한 미소...천천히 려화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어른대기 시작했다.
“너...또...나를...”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이것은 제게도 중요한 선택이기도 하니까...”
“......”
요화궁주는 나직이 숨을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영롱한 붉은 보석같이 변한 려화의 눈...점차 요화궁주의 정신은 아득히
먼 곳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