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녀 (妖女) - 1. 무 협
작자 소개 진 경룡 (陳 慶龍가명) 대만 태생...현재 홍콩과 대만을 오가며
무역업 종사 중. 프리랜서 작가, 평론가 생활도 겸하고 있음.
1980년대 - 9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생활...한국에서 생활할 당시
인천 거주. 대학도 한국에서 마쳤으며 초창기 야설, 판타지 문화에 상당히
심취한바 있음.
한국에서 사설 BBS를 운영한 바 있으며 대만, 홍콩지역에 별로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전문가. (마왕, 환상루주 등 아이디로 활동)
오히려 중국 쪽 작가들보다 한국의 무협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며
극동 아시아(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대단히 박식함.
- 요녀 (妖女) -
1. 발단 發端.
처참한 모습이었다.
눈을 부릅뜬 남자의 머리가 굴러다니는 앞에 어머니와 자식으로 보이는
여인과 남자 아이의 사지가 절단된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친 흔적이 역력한 하녀로 보이는 두 여자들의 시체는 목이
아무렇게나 뒤틀려진 채 꺽여져 나뒹굴고 있었다.
생전에 풍모가 좋았으리라 생각되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은 눈이 파여지고
혀가 잘리워진 목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그나마 온전한 몸뚱이 역시 팔
다리가 절단되고 배가 갈라져 내장이 드러내진 꼴로 탁자위에 눕혀져 있었다.
더군다나 어디 갔는지 몇몇 장기들이 파내어져 보이지가 않았다.
저벅...묵직한 느낌의 걸음 이었다.
흔히 사자의 걸음이라 불리는 절대자의 위세가 풍기는 걸음걸이...
미끈하고 앳된 잘 생긴 서생의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태산을 보는 듯 장중한
기색과 무게가 실려 절대 보통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
살짝 찌푸린 이마와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대단해...누가 보면 본좌나 휘하 ‘악령종 (惡靈宗)’의
장난인줄 알겠군...”
“......”
스윽...손을 내밀자 어디선가 검붉은 무복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복면인이
나타나 하얀 면 수건을 내밀었다.
면 수건으로 송글거리는 이마의 땀을 톡톡 찍어내듯 닦은 후 다시 돌려주며
느릿하게 주위를 살펴보는 미 서생의 눈가에 이채가 띄었다.
저벅저벅...다가간 미 서생이 무언가를 들어 올린다.
독한 ‘화주 (火酒)’ 가 담긴 술잔...술잔엔 아직 반 정도의 술이 찰랑이며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뒹굴고 있는 몇 개인가의 술병들...바로 옆의 접시에는 어딘지
수상쩍은 살덩이가 몇 점인가 놓여 있었다.
피식...서생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하얀 미소가 어린다.
“용천검(龍泉劍) 아래 원수의 머리를 두고 심장과 간을 꺼내 제사지낸다...
인가...허어...대단한 풍류로군...쯧쯧...‘마군자 (魔君子)’여...그러길래 그
시덥쟎은 정파무림인의 흉내는 내지 말랬쟎는가...끌끌끌...“
안타까운...그러면서도 소름끼치는 진득한 살기가 배인 음성이었다.
꿀꺽...한 모금에 독한 화주를 털어 넣은 그가 손을 내밀어 누군가 썻던
젓가락을 움직여 몇 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움켜 태연히 우적우적
씹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나뒹굴던 두 눈이 파내어진 긴 수염 노인의 머리를 쳐들어
올려 탁자 위에 놓고는 손수 아직 술이 반 정도 남은 화주 병을 움직여
주르르 부어 준다.
“어찌되었든 편히 가시게...쯧쯧쯧...금분세수를 마치고 고고하게 초야에
은거해 유유자적하던 자네가 이 무슨 꼴 이련가...한 점 고깃덩이...그 것도
냄새나는 비구니 계집의 술안주로 전락하다니 말일세...“
투르르...핏물이 섞인 술이 흘러내리며 진한 술 향기가 퍼진다.
“잘 먹었네...마군자...대신, 술과 안주 값은 톡톡히 받아 내 주지...이자까지
쳐서 말일세...“
하얀 미소...소르르 소름끼치는 미소가 진득하니 퍼지는 얼굴...꿈 많은
소녀나 여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서생의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미소가 퍼져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흠칫 등골을 시리게 할 붉은 광휘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화르르 넘실거리는 불꽃에 삼켜지고 있는 한 채의 장원...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바라보던 서생의 시선이 힐끗 한쪽을 향했다.
칭칭...천잠사와 소의 힘줄을 섞어 짠 포승에 단단히 결박된 한 사람...억지로
꿇어 앉혀 있었지만 오연한 표정을 지은 채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냘픈 몸매의 한 명의 비구니였다.
이십대 중반 쯤 옥을 깍아 만든 듯한 성숙한 아릿다운 얼굴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
매캐하게 시체 타는 냄새 속에 넘실대는 불길에 무너져가는 장원의 전각을
바라보는 비구니의 얼굴엔 추호의 후회나 잡념 같은 것은 없었다.
나타난 것은 오직 담담함...그리고, 초연함이 전부였다.
느릿 느릿 미 서생이 몸을 돌려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묶인 비구니를 지키고 섰던 복면의 무사에게서 한 자루 검을 받아들고는
살펴보던 서생이 예의 그 하얀 미소를 머금었다.
“아미파의 전승에 전해지길...‘면리장침’ 솜 안에 숨긴 바늘은 꼭 쥐지 않으면
손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마군자...저 인물은 마도에 몸 담았
지만 정파의 나부랭이들 보다 더 격식과 의리를 따졌던 인물...더구나,
금분세수를 마치고 무림과 연을 끊었는데...그런 사람을 죽이고 그 배를
갈랏으니...그 검은 ‘백정의 칼’ 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그리고...“
킥킥...약간은 비웃음을 머금은 서생의 목소리였다.
채앵! 섬뜩한 푸른 검 날이 뽑혀져 나왔다.
“칼은 제법 쓸만 하긴 하다만...미혼약에 산공분까지 사용하다니...하오문의
잡졸들이나 사용하는 수법인데...거기에...무림에서 은퇴한 인물을 일가족
모두와 같이 도륙 한다...도대체 아미파가 ‘불문 (佛門)’의 한 갈래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군...“
“다...닥쳐랏! 마두!”
“......!”
“너희 같은 사악한 마물들에겐 강호의 도리나 인정 같은 것은 오히려 사치!
단 하나의 해악이지만 쓰레기보다 못한 너희 악적 중 한 명을 처단한 것은
하늘을 대신한 것으로 전혀 꺼리낄 것이 없다! 죽일테면 어서 죽여랏!“
앙칼진 목소리...째앵! 유리가 깨진 듯 섬뜩하면서 맑은 음성이었다.
“그만! 손을 멈추지 못할까!”
“존명...!”
부르르...격정을 참지 못하고 어느 새 소리도 없이 뽑아든 검이 비구니의
목을 향해 그림자처럼 다가갈 때 나직한 서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서생의 입에서 거센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사가 한줄기 분기를 참지 못하다니...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당분간
근신 하도록 하라...그리고, 빈 자리는 10호가 대신하도록...“
“존명!”
스륵...사라져버리는 복면인...그리고, 다른 복면인 하나가 나타나 얼른
빈 자리를 메꾼다.
미 서생이 가만히 다가와 비구니의 얼굴을 살핀다.
“사악함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쯧쯧...아이야...그럼 이 세상에는 어둠이
없이 오직 빛 만 있어야 되겠구나... 그리 된다면 잠은 어찌 잘 것이며...
모든 생명은 하루의 피로를 어찌 풀 것인가...게다가 말이다...“
스윽! 비구니의 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는 검광...섬뜩한 느낌과 함께
한줄기 가느다란 혈흔이 생겨난다.
“윽...”
살짝 아미를 찌푸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내는 비구니를 바라보며
미 서생이 싸늘히 비웃는다.
어느 틈엔지 내밀어진 검 날이 비구니의 목덜미에 와 닿는다.
“인간은 누구나 화내고 슬퍼하며 웃고 괴로워한다...아이야...네가 ‘신(神)’이
아닌 이상...사람을 심판할 권리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더구나, 정파고
사파 고를 떠나 강호의 원한과 은혜를 모두 잊고 초야에 은거한 노 선배를
처단할 권한 같은 것은 더더욱 없느니...네 비록 ‘마군자 이군무’와 원한이
있다고는 하나...강호에는 강호의 법이 있는 것이니라...어디 보자꾸나...네
과연 인간의 ‘희노애락 (喜怒哀樂)’의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만일에 네가 인간의 감정을 극복하였다면...‘석가모니’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색욕(色慾)’의 관문을 이겨낸다면 내, 정중히 사과함과 함께
할 수 있는 한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허나, 그게
아니라면...흐흐흣...일생 네년은 그 아랫도리를 벌려 나와 내 후계들의
‘악령마공(惡靈魔功)’을 연성하는 ‘노예’로 살아야 할 것이다...네년은 물론
네년의 후손 대대로 말이다...“
으스스한 말소리와 함께 서생의 손 안에 들린 장검이 뚝 부러지고 만다.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시퍼런 예기를 발하는 장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러뜨린 것이다.
그와 함께 자신을 노려보는 서생의 삼엄한 눈초리...
“......!”
비구니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에 소르르 소름이 돋으며 아랫도리가 야릇하게
질척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살짝 실금이라도 한 것일까...
“가자...”
서생은 느릿하게 뒷짐을 진 채 허공에 떠 오르며 명령했다.
능공허도...허공을 밟아 올라가는 절정의 경신술이었다.
잠시 후...잿더미가 되어가는 장원이 바라다 보이는 이 곳에는 부러진 장검
한 자루가 뒹굴고 있을 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