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부 (16/18)

16부

모처럼 데이트에 들뜬 연희는 꽃단장하고, 호텔에서 묵을 준비를 하느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밤을 새서 27일 새벽이 들어왔던지라 잠을 좀 더 청하고 싶었지만 연희는 이런 내맘을 모르는지 아님 모른 척 하는 건지 점심쯤 준비가 완료되자마자 밖으로 나가자고 성화였다. 

2시쯤 되었을까?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게 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나는 할 수 없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밖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는 벌써 지났지만 새해를 기다리는 분위기에 거리는 붉은 조명들로 아직도 환화게 빛나고 있었다. 체크인은 3시부터였지만, 우리는 좀 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체크인 한 방은 아담한 더블베드 객실이었다. 큰 침대와 조그마한 소파하나 그리고 데스크, 평면TV...조그만 공간에 알뜰하게 필요한 것들만 배치되어있었다. 

“뭐... 상당히 아담하네...”

내가 주변을 흝으며 덤덤하게 여기저기 열어보기 시작했고, 연희는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준비한 원피스를 꺼냈다. 목선과 허리선이 강조된 원피스는 청초해 보이는 연희의 분위기에 아름다운 여성미를 더해 주는 것만 같았다.

“이 방이 하루에 얼만진 알아? 현주가 그러는데 여기는 잡고 싶어도 연말에는 예약이 꽉 차서 힘들데.”

연희가 거울을 보며 그 속에 비추어진 내 모습에 말을 건냈다.

“뭐...그러던지 말든지...”

잠시 후 내가 털썩하고 침대에 눕자 연희는 일어나 팔을 잡아 당겼다. 

“눕지 말구 얼른 나가자.”

 “그래..그래...그럽시다. 그리고....밥만 먹고 얼른 올라오자.”

 “참...여기까지 와서 이럴 거야? 정말?”

마치 귀찮다는 듯한 나의 말투에 연희는 기분이 상했는지 눈을 흘겼고, 바로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어여 가시지요. 마님.”

말없이 계속해서 흘겨보던 연희.....잠시 후 살짝 풀렸는지 연희는 눈웃음을 짓고는 먼저 복도로 나섰다. 근사하게 입고 먹겠다고 준비한 원피스가 그녀의 뒷 라인을 한층 고혹스럽게 만들어 줬다. 길고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 탱글하게 솟은 엉덩이 그 안에 은밀한 그것들....사뿐히 걸어가는 연희의 뒷모습을 한 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빠? 않와?”

 “어..어..응? 가야지”

***

로비에서 예약한 이름을 대자 아가씨는 20층에 있는 고급바로 안내했다. 단순히 숙박하고 식사를 이용하는 상품권인줄만 알았던 나는 1층 레스토랑이 아닌 20층으로 안내에 당황했다.

“저희는 식사를 할려고 했는데요.”

 “아.. 오늘부터 연말까지 이벤트 행사로 20층에서 식사와 음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상품권도 해당이 되나요?”

 “고객님께서 체크인 하시면 20층으로 안내하라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건 무슨 일이지?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봤다. 연희는 기쁜 듯이 미소가 얼굴에 가득 번졌다. 

“연락이요? 어디서요?”

 “고객님 회사라고 들었습니다.”

 “제 이름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고객님.”

로비의 아가씨가 엘리베이터로 에스코트하는 도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연희는 그런 내가 부끄러웠는지 팔장을 끼고 있던 손으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단둘이 되자 연희는 기쁜 표정으로 밖을 바라봤다. 엘리베이터 한쪽 면이 유리라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야...오빠네 사장님께 고맙다고 전해야 겠는걸?”

 “그..그러게...”

 “정장차림의 원피스 준비해오길 잘했어. 정말...”

나는 아직도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어느새 20층에 다다랐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찬 고급스런 실내인테리어와 유리벽 사이 너머 눈부시게 아름다운 서울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멋진 광경에 넋을 놓을 새도 없이 정장차림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 죄송합니다. 예약하신 곳이 아직 세팅이 되질 않아서요.”

둘러보니 테이블이 20개 정도 놓여있었고, 남는 자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바(bar)로 안내했고, 식전 술을 한잔씩 건냈다.

“도수가 높지 않고, 달콤해 식욕을 돋구시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두운 조명아래 바에 나란히 앉아 술은 조금씩 들이켰다. 맛과 냄새가 달콤한 술은 맞긴 했지만, 생각보다 독해 목이 싸한 느낌마져 들었다. 어쨌든 이제야 기분이 조금씩 들떠졌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이런 고급스러운 곳에서 이런 술과 분위기를 맛 볼 수 있을까? 나는 연희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잠시 후 술을 다 마신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아까 살짝 긴장을 한 탓인지 손에 땀이 차서 손이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며 메무세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과장님. 여기 계셨네요.”

화장실로 나와 자리로 돌아가는 중 등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깜짝 놀라 자리에 우두커니 서버렸다. 등 뒤에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이 서있던 것이었다.

“최..최비서님?”

평소(?)에 회사에서 보던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실례를 무릅쓰고 위에서 아래로 사람을 흝어 보았다. 길고 얇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목 옆으로 어깨가 파여잇어 평소보다 더욱 더 섹시해 보였다. 물론 회사에서나 여기에서나 아름답기는 마찬가지 였지만.

“최비서님 여기는 어떻게?”

 “아..저는 사장님께서 저녁 사주신다고 하셔서...”

 “사장님이랑요? 단둘이?”

아차! 단둘이 먹는다는 말을 괜히 내뱉은 것 같았다. 자칫 사장님과 둘이 왔다고 단정하면 뭔가 부적절한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 거란 오해를 줄까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저는 그냥 식사만.... 사장님은 다른 분과 함께 오셨습니다.”

 “아..그...그러시군요.”

 “사실 사장님께 오늘 과장님도 오는 날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찾으시더라고요....그래서...”

그 말을 들은 직후 나는 열심히 주위를 살폈다. 연희와 술을 마시던 곳에서는 이 쪽부분은 보이지 않아 사장님이 계셨을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이쪽입니다. 저기 안쪽에 계세요.”

그녀는 나를 사장님이 계신 곳으로 이끌었다. 사장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좀 더 안쪽에서 어떤 여성과 식사를 하고 계셨다. 

“오. 유과장. 오늘이었나?”

 “죄송합니다. 계신줄 몰랐습니다.”

 “아냐. 아냐... 어떻게 알겠어. 신경쓰지 말게.”

꾸벅 인사를 건내는 내게 사장님은 일어나 내 어깨를 토닥였다. 

“참.... 여기있는 여자분은 알테고?”

사장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분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당히 예쁜 아가씨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녀를 알 수가 있을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정말 왜그러세요. 저 모르시는 것 같은데...”

 “하하하.. 그런가? 이 사람 참....”

 “직원들 너무 일만 시키시는 거 아니예요?”

 “이 사람 문화생활을 하나도 않즐기는 사람이구만.”

아...그러고 보니 문뜩 주말인가에 하는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잠깐 본 것 같았다. 그럼 영화배우인가? 나는 그녀를 기억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아녜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요. 우리 아저씨가 짓궂죠?”

 “...아...죄..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영화를 못봐서...”

사장님은 즐겁다는 듯이 와인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켰다.

“이 녀석 대학생때부터 알던 꼬맹인데, 어느날 떡하니 영화배우 되었다고 자랑을 하지 뭐야? 그래서 오늘 밥이나 사줄려고 했지.”

사장님은 평소와 다르게 호탕하고 유쾌한 듯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꼬맹이요? 제가 어딜봐서 꼬맹이예요?”

 “내 눈에는 그랬다는 거지..하하하”

사실 외모는 청순해보여 어려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몸매는 절대 그래보이지 않았다. 육감적인 바디라인과 아찔한 허리 곡선은 120% 완숙한 여성미를 한껏 뽐냈다. 돈이 많으니깐 최비서나 이 여자처럼 엄청난 사람만 만나는 구나... 한편으로 오늘따라 유쾌하게 들리는 사장님의 웃음이 수긍이 되었다.

“참. 자네 오늘 여기서 자고 가겠군.”

 “네. 신경써주신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냐. 아냐. 더 좋은 곳으로 예약해줬어야 되는데.....참...

“아..아뇨..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그래....그럼 저녁에 잠깐 올텐가?”

그가 나를 지긋이 올려다 보며 말을 건냈다. 

“딴 건 아니고, 요 아래층 스위트룸에서 있다가 술 한잔 할건데 시간되면 오라는 걸네.. 뭐 딴게 아니라 외국에 있는 친구한테 모처럼 좋은 술을 선물 받아서...... 이런걸 아무데에서나 마실 수 있나? 마침 자네도 오면 좋을 것 같고..”

 “물...물론입니다. 영광이지요.”

나는 한 템포도 쉼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는 만족한 듯 미소가 가득넘쳤다.

“아...물론 아내도 함께오게. 아내가 술을 잘 못마시면, 또 다른 것도 준비해 놓을테니...”

 “알겠습니다. 아내도 좋아할겁니다.”

 “그래 좋아...알겠네. 나머지는 최비서한테 일러 놓겠네.”

그렇게 그곳을 빠져 나왔고, 10시에 19층에 있는 로얄 스위트룸에서 찾아뵙기로 약속을 잡았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연희에게 어떻게 이야기 해야될지 난감했다. 연희가 싫어하지 않을까? 우리끼리 왔다고 좋아했는데...아니야. 연희도 사회생활을 해봐서 이런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해할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동안 나는 벌써 바에 다다랐다. 은은한 조명 아래 연희는 오늘따라 청초하게 보였다. 

“아? 오...오빠!”

그녀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연희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 자세히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군요, 다행히 일행이 있으시겠죠.”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커다란 체구의 중년의 남자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 일어나 나에게 다시한번 목례를 건낸뒤 자리를 떠났고, 연희는 자신의 앞에 놓은 칵테일을 한모금 머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그건....아니 그것보다.. 저 남잔 누구야?”

나는 그가 떠난 자리 위에 있는 술잔을 가르키며 연희에게 바라봤고, 연희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나한테 술 한잔 사주고 싶대...헤헤”

 “그래서? 아무남자한테나 술 얻어 먹는거야?”

 “그래~! 어차피 오빠 올거고, 술 한잔 꽁짜로 마시는 거지 뭐.”

 “참내..얘 봐라...”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의 모습, 아직도 물론 처녀처럼 보이는 그리고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이 나같은 평범한 회사원하고 결혼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나는 씁쓸한 현실을 받아드리며 애써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 때 종업원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자리가 준비되었으니, 이곳으로 오시죠.”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아 자리로 향했다.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매우 전망이 좋은 자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기나긴 밤의 여정의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