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78)

엘프를 범할대로 범하고 놓아준것은 8시간 뒤였다. 그 이후로는, 집안에 들어와서도 계속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니, 미묘하다기보단 이미 노골적으로…….

"있잖아, 왜 구석에 들어가있는거야?"

"요,용서해주세요!"

"……뭘?"

엘프는 바들바들 떨고있다. 정신이 돌아온 이후 내가 앞에 있는것이 그렇게나 두려운건지.

나로서도 놀랐다. 타이즈의 정력효과는…… 정말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액으로 웅덩이를 만들만큼 많이 해댔지만, 슬슬 인간의 이성이라는것으로 겨우 절제할 수 있었다.

……이래선 말 그대로 완전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정액의 용사였다.

"이,일단 가볍게 자기소개부터 할까?"

"………"

엘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나에대한 경계심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처음과는 달리 그녀도 쾌감에 같이 따라주었으니 마음도 통한것일까.

한번 심호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름은 김진혁이야. 지금은 이런옷을 입고있지만, 꽤 정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내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엘프는 조금 당황한듯한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정액맨, 이요?"

"………아니, 김진혁."

"그러니까, 정액맨이요?"

뭐라는거야.

자꾸 내 이름을 대는데, 그녀는 뭔가 잘못알아들은듯 날 정액맨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액맨이 아냐, 김진혁이라고!"

"……자,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저,정액맨이죠?"

"야!"

"으앙!"

엘프가 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그보다, 내가 왜 정액맨이야. 왜! 이름을 제대로 불러줬잖아! 빠득빠득빠득.

이대로 화풀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펜 비슷한것을 가지고와서 종이위에 큼지막하게 「김진혁」이라고 썼더니

"헉……."

글씨는 금방 왜곡되어, 필체까지 내것으로 변환되 [정액맨]이라고 쓰여지는것이 아닌가.

"………"

이,이것도 타이즈의 저주중 하나인건가…….

정력과 1시간 투명에 인간으로서 소중한것을 하나하나 팔고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이……!"

바닥에 누워서 절규한다.

"내가 정액맨이라니…… 내가 정액맨이라니이이이……! 어흫헣흐허허헣……"

내 이름이 이태껏 여기까지 그리워졌던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울면서 신세한탄 하고있을 무렵, 그녀가 멀찌감치 나를 바라보며……

"저,정액맨 씨?"

"아니라고오오오오오!"

"히익!"

다시 거북이 등껍질에 숨듯이 구석으로 파고드는 엘프.

"근데 정액맨이 뭐야 대체, '정액' 이라고 불러도 '액맨'이라고도 불러도 '정맨'이라고 불러도 완전히 병신같은 이름이잖아………."

어떻게 조합해도…… 나는 정액맨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글씨가 바뀌는걸보면 말도 바뀌어서 들렸단 소린데, 그럼 난 아까부터 [정액맨이 아냐!, 정액맨이라고!] 라고 지껄인거나 마찬가지잖아.

흑흑흑…….

"그래!"

좋은생각이 떠오른 난, 엘프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엘프는, 뭔가를 생각하는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윽고 눈을 감고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 아냐!"

"!!"

호통하자 엘프가 큰 눈망울을 다시 뜨고, 서로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앞으로 날 '에쿠'라고 불러. 따라해봐, ' 에 - 쿠 '"

"에쿠……"

"좋았어!"

새 이름, 합격! '에크젠'이 하고싶었지만 그건 정액맨이라고 다시 바뀔 것 같아서, 겨우 타협선을 본 것이 에쿠였다.

발음을 미묘하게 흐트러트려서 새 이름을 정한다. 내가 생각해도 멋있는 아이디어야.

"그럼, 네 자기소개를 해봐."

서로 8시간동안 몸을 섞은 사이라 그런지 반말도 가볍게 술술 나왔다.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엔나에요. 이 숲에선 혼자 남은 프릴이구요. 활을 조금 쓸 줄 알아요."

간략한 자기소개. 하지만 생소한 단어가 하나 있었다.

"프릴? 너는 엘프가 아닌거야?"

엔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가 뭐에요?"

쿠궁.

엘프가 아니었다! (정액맨은 충격을 받았다.)

엘프가 아니고서 이렇게 예뻐도 되는거냐, 신의 조형물이냐, 이건 뭐하는 생명체야!

내가 살던곳에 있던 '여자' 라는 개념이 송두리째로 뽑히는 느낌이었다.

"그럼 넌 사람인거야?"

"아,아니요……. 유사인종중 하나인 「프릴」이라는 숲의 수호종족이에요."

"…………"

아무래도 이 곳은, 내가 알던 판타지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숲에사는 미소녀 = 엘프라는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보니 귀도 안 길어. 난 바보였던건가…… 가장 중요한걸 체크안하다니!

그저 예쁘다는 사실에 눈이 멀었던 것 같다.

"근데 왜 너 혼자밖에 남지 않았던거야?"

"그건……."

엔나가 말끝을 흐렸다.

"……인간에게 전부 죽임을 당했어요."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니?"

엔나는, 이 숲에 관련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쿠씨같은 사람이랑은 다른 사람이었어요. 프릴이 지키는 곳에는 인간들의 화폐를 많이 늘려주는 원천지가 있었어요.

 프릴이 선조대대로 여기고있던 생명의 샘. 그 끝에있는 광맥이에요.

 그곳에선 희귀한 광석이 생겨요. 그래서, 사람들은 프릴과 타협을 하려했지만 불평등한 계약들 요구해왔기에 프릴은 당연히 거절했어요.

 그래서 무력으로…….

 이후 긴 세월이 지나, 광맥에선 더이상 광석이 나지 않게 되었고, 숲은 버려졌어요."

"……흠."

판타지 세계라 현실에선 그리 생각하기 어렵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가슴이 아파왔다.

"그게 네가 말을 안하는 이유이기도 한거야?"

"……언니가 말했어요.

「인간은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말하면 말할수록 그들은 원하는것을 드러낸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않는것이, 그들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자라면 손을 내밀고 그렇지않다면 화살촉을 향해라.

  인간이란 존재는 그저 무력만으로 모든것을 이해할 수 있는 똑똑한 생물이기도 하다.」"

그 말이, 뼈저리게 스며들어왔다. (방금전까지 욕망에 충실했던 정액의 용사.)

그래서 엔나는 말을 하지 않았던것이지만 행동으로서는 날 도왔다. 그건 경계를 반정도만 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반대로 지금 말하고 있는것은, 나한테 마음을 털어놓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후아."

말을 오랫만에 길게 꺼냈는지, 가느다랗게 쉼호흡하는 그녀.

난 아무래도 이 세계를 살아남고, 나머지 999명의 여성을 범하기위해 힘이 필요하다는걸 느꼈다.

"엔나."

나는 엔나의 손을잡고, 진지하게 바라본다.

"네?"

"나에게 활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줘."

999명을 범한다는 누가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 여정.

그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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