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
달타냥은 힘겹게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보려 했다.
"알겠소? 꼭 나를 찾아오도록 하시오."
명령하듯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말에 달타냥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아...네...꼭..그렇게..할께요...라스푸틴..님..."
그녀의 대답을 듣자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인 라스푸틴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더 말해주었다.
"...."
달타냥은 그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뇌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각인을 시켰다.
그것은 또다른 최면암시였다.
그녀의 뇌리에 깊숙히 틀어박힐 또다른 악마의 명령 말이다.
"으으으...!"
-털썩!
그리고 그 라스푸틴의 암시가 끝내자마자 그녀는 곧 의식을 잃고 다시 한번 기절을 하고 말았다.
정신이 혼미하다.
달타냥은 눈을 뜨자마자 낮선 방의 천장이 보이자 두눈을 껌벅였다.
(여긴 어디지..?)
그녀는 지금 천장이 보이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우우...어지러워...)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났다.
달타냥은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다 잡으며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하였다.
(여긴 어딘가의 방인가 보군.)
그녀가 그렇게 정신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추리를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벌써 깨어났나 보구나?"
(으음...누구지...?)
달타냥은 그 목소리가 생전 처음듣는 사람의 목소리라 의아해했다.
"넌 꽤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기 때문에 아직 눈이 부실게다."
상대의 배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타냥은 아직 흐릿한 시야를 바로 잡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빤히 응시하였다.
그러자 어림풋히 보이던 상대의 모습이 점차 뚜렷해졌다.
"..."
상대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평민처럼 보이는 간편한 옷차림.
푸짐해보이는 몸집과 얼굴을 가진 여인은 곧 자신을 소개하였다.
"안녕? 난 이 여관의 주인인 네네라고 한단다."
네네는 활기차게 웃으며 말을 했다.
(여관의 주인이라고?)
"어디 아픈데는 없니? 배는 고프지 않고? 정말이지 널 해코지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더구나. 아무리 근위대라도 그렇지, 사람이조금 밉보였다고 그렇게 아직 어린 여자아이를 발가벗기고 온 도시의 구경거리로 만들다니 ...최근 근위대가 욕을 들어먹는게당연하다고 생각되더구나."
그녀는 달타냥을 동정하듯 말했다.
"정말이지 다 큰 어른들이면 말이지,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보호해주진 못할 망정, 시집도 못 가게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
"..."
그녀의 말에 달타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일단 네네의 말이 너무 빠른데다 그녀가 달타냥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그녀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단어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린 여자아이...?'
달타냥은 그 말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몸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여자의 몸인 걸을 깨닫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아...이럴수가...)
아직도 가녀린 여자아이의 몸.
그저 악몽이라 생각했던 일은 진짜였던 것이다.
(그럼 아직도 그 이상한 마법이 풀리지 않은거야...?)
그녀는 자신의 불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절망했다.
-쾅! 쾅! 쾅!
바로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네네! 그 꼬맹이를 그만 내놓지 그래?"
"맞아 맞아! 우리는 그 계집을 한번씩 따먹어 봐야겠단 말이야!"
술에 취한 듯한 남자들의 고함소리.
그들은 달타냥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킬킬킬~! 근위대에게 밉보인 걸로 이미 인생 종친 년 같은데, 우리가 잘 보살펴줄테니 걱정말고 당장 내놓으라고."
"물론 마음에 들면 우리 아내로도 키워주고 말야! 푸헤헤헤!"
욕정이 가득찬 돼지들 같은 목소리.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그동안 자상하기만 하던 네네의 쌍심지가 치켜져 올라갔다.
"아니 저 양반들이!"
그녀는 풍만한 몸집에서 나오는 엄청난 목소리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다들 닥쳐요! 당장 이곳에서 꺼지지 않으면 전부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뜨러줄테니 그렇게 알아요!!"
네네는 그런 남자들의 농짓거리에 욕설과 함께 호통을 쳤다.
"케헥! 저 미친 뚱보 네네가 화났다!"
"어이, 어서 튀어!"
"아이구, 맙소사! 저 미친 뚱보년은 정말로 우리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릴지도 몰라!!"
음담패설과 행패를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남자들은 네네가 화가 난 듯 보이자 '다리야 날 살려라' 하며 꼬리를 숨기고 도망쳤다.
(푸훗!)
달타냥은 그런 남자들의 반응을 보며 실소를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남자들의 그런 반응으로 보아하니 네네는 정말 한성질을 하는 것 같았다. 또한 이 주변에서 꽤나 영향력이 세고 말이다.
천상 여장부 스타일이랄까.
만약 네네가 아니었다면 달타냥은 기절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알몸 노출쇼를 구경하고 군침을 흘린 남자들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구나. 꼬마야. 저렇게 보여도 저 치들도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란다. 그저 조금 여자에게 굶주렸을 뿐이지."
저 정도가 조금 굶주린 거면, 더 굶었다간 길가던 여성도 바로 덮칠지도---달타냥은 네네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관두도록 했다.
대신 그녀는 네네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자신의 짐이 어디있는지 물어보았다.
만약 이곳이 그 창고 앞에 보이던 여관이라면 자신의 짐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곤 말이다.
"아, 그 부러진 칼과 말안장 말이니? 여기있단다."
그녀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 듯, 바로 침대 근처에 있던 짐들을 건네주었다.
(응?)
하지만 불행하게도 짐 안을 뒤져보니 그녀의 가장 중요한 돈주머니와 편지는 들어있질 않았다.
네네에게 보답을 하려고 했는데, 그럴만한 돈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혹시 네 돈주머니라면 그 빌어먹을 근위대 중에 있던 뚱뚱한 사람이 가져갔단다. 그가 기절한 널 겁간하려던 걸 그의 상관으로보이던 칼자국의 사내가 호통을 쳐서 막아냈지. 그 대신 그는 네 짐 속에 있는 돈주머니를 빼내도록 명령하더구나. 정말이지 말만근위대지 강도가 따로 없는 놈들이었지."
네네의 그 말에 달타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돈이야 그렇다쳐도 그녀의 아버지의 편지는 왜 가져갔단 말인가?
총사대에 들어가려면 꼭 필요한 추천장을 말이다.
"혹시 그 안에 여비가 전부 들어있던거니? 그렇다면 정말 안됐구나. 나라도 도와주고싶긴 한데 요즘 워낙 장사가 안되어서 말야."
네네는 달타냥의 표정을 보며 되려 그녀가 도와줄 수 없음을 미안해했다.
"그래도 혹시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이 돈을 주도록 하마. 원래 이건 칼자국 사나이가 전해준 돈이거든."
그녀는 그러면서 그 칼자국 사내가 준 돈과 함께 그의 전언을 전해주었다.
"그는 이대로 파리로 갈 생각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더구나. 파리로 오면 이번엔 정말 용서하지 않겠다며 말이야."
"!"
달타냥은 네네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칼자국의 사나이는 어떻게 그녀가 파리로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혹시 내 짐 안에 있던 편지를 읽어본 것일까? 그리고 왜 나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는거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달타냥은 선의 아닌 선의와 악의 아닌 악의를 베푸는 칼자국의 사나이가 너무나 이상했다.
"저기 네네, 혹시 그 근위대라는 칼자국의 사나이와 일행은 벌써 떠났나요?"
"아니. 그는 아직 이곳에 있단다. 네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난 탓에 아직 떠나지 못했지. 하지만 그는 지금 누군가를 만난 뒤 바로 마차를 타고 이곳을 떠날려고 하는 듯 싶더구나."
"!"
달타냥은 그 말을 듣자, 부러진 자신의 검을 들고는 바로 침대 위애서 튕기듯이 뛰쳐나갔다.
"아직 움직여선 안돼! 그리고 지금 네 실력으로는 그 남자들을 이길 수 없단다!"
네네는 그런 달타냥을 보면서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충고는 달타냥의 귀에는 들리지를 않았다.
( 빼앗긴 돈과 편지를 되찾아야 해! 그리고 구겨져버린 내 명예도 찾아야 하고! 무엇보다 다시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선 꼭 놈들을 잡아야 해!)
그녀는 황급히 뛰어가며 라스푸틴이란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왠지 그리우면서도 증오스런 이름.
그녀는 현재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뒤바꾼 존재라는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억이 엉망이 된거지? 바로 아까까지의 기억이 잘 생각나지를 않아...)
미칠 노릇이지만, 달타냥은 수치 노출 조교를 당했던 기억과 여성이 되어버린 것, 그리고 칼자국의 사내에게 져버린 것까지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상하게 라스푸틴과 관련된 기억만 부분 부분 끊겨서 온존히 기억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모르겠어. 하지만 왠지 그 사람을 만나면 알 것 같아.)
다급한 마음이 들어와서 그녀는 현관 쪽으로 뛰쳐나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와서 도저히 결투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고 상대의 얼굴이라도 기억해놓기 위해서 그녀는 내달렸다.
-탁 탁 탁!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창을 내다보자 과연 현관 앞에는 한 대의 마차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칼자국의 사나이와 어떤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정말이지 이곳에선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지르셨어요. 로슈포르경."
여인은 마차 안에서 창 밖에 있는 칼자국의 사내에게 말했다
책망을 하듯한 그녀의 말에 로슈포르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후우~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밀레디."
그는 밀레디라 부르는 여인에게 미안해했다.
"어찌됐든 이 일은 추기경님의 귀에 들어가게 될거랍니다. 미리 각오를 해두시는 편이 좋으실거예요."
아리따운 귀부인은 칼자국이 난 사나이를 바라보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스물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신비로운 블루베리의 눈동자에, 장밋빛 입술, 백옥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갈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전형적인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그건 나도 각오하고 있소, 밀레디, 당신은 어서 하루빨리 영국으로 다시 되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버킹검 공작이 런던을 떠났는지 확인하고 추기경님께 보고를 하도록 하고요."
"예, 그러도록 하죠. 그럼 백작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실건가요?"
"나는 파리로 돌아갈 거요."
로슈포르는 밀레디란 레이디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백작님이 아까 이야기한 그 버릇없는 아기 고양이는 그대로 놔두실 건가요?"
"그녀를 아기고양이라 부르지 마시오. 밀레디. 그녀는 얼마 전까지 남자였던 아이요."
불쾌하다는 듯 로슈포르가 말했다.
그의 과반응에 밀레디의 두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뭐 백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러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 라스푸틴인가 하는 늙은이의 힘은 진짜인가 보군요."
"으음...그의 힘이 진짜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지만 나는 왠지 그 힘이 꺼려지는구려.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우리는 그런 위험한 힘에 의지해서는 안된다오."
라스푸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로슈포르가 말했다.
"그거야 우리가 아닌 추기경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요. 우리는 그저 대의를 위해 추기경님을 따르면 됩니다."
그녀가 그렇게 로슈포르의 우려를 진정시킬 때였다.
"거기 기다려, 이 비겁한 놈아! 감히 내가 기절한 틈을 타서 내 돈과 편지을 훔쳐 달아나다니!"
달타냥이 드디어 계단을 다 내려와 현관 앞에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비겁하게 도망치지말고 나랑 정정당당히 다시 승부를 내자!"
"후후, 곧 죽어도 재잘거리는 건 여전하구만."
칼자국의 사나이는 그런 달타냥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곧 얼굴을 굳히고는, 밀레디란 여인에게 가벼운 인사만을 남긴 채 자빨리 말을 타고 사라져갔다.
사나이가 떠나는 걸을 의미심장하게 본 밀레디의 마차 역시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달타냥의 모습을 뇌리에 강하게 기억해뒀다.
"하아...하아...젠장!"
달타냥이 현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양쪽 모두 뿌연 먼지만을 남긴 채 멀리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녀는 칼자국이 난 사나이를 따라 뛰기 시작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상처가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탓이었다.
결국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다시 여관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칼자국의 사나이를 눈 앞에서 놓친 달타냥은 여관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그녀는 그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하지?)
돈도 잃어버렸고, 편지도 잃어버렸다.
뚱보에게 찢겨진 옷이야 여유분이 있으니 된다 해도, 하나 밖에 없는 칼이 부러져 버려서 난감했다.
(정말 최악이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최악인 것은 내가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고...)
달타냥은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였다.
정말이지 울고만 싶어졌다.
칼자국의 사나이가 남긴 돈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그걸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지, 적이 동정심에 남긴 돈 따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아~ 정말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나?)
달타냥은 고향으로 돌아가야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았다.
(안돼, 안돼!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녀는 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칼자국의 사내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다면 어떻하지? 그 빌어먹을 놈들이 내 돈을 다 가져가 버려서 여행경비도 없는데...)
파리로 어떻게든 간다해도 당장 생활을 할 생활비조차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돈을 받아다가 파리로 갈까?)
그렇게 할 경우, 입단식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한 지금 이 상태로 고향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갑자기 여자가 되어버린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파리로 보낸지 며칠되지도 않았는데 적에게 진 뒤로 여자가 되었다고 하면 아마 기절하고 마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여자가 된 그녀의 모습은 오랜 죽마고우인 그녀의 친구들도 믿지 않을 것이다.
(왠 미친 여자인가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