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2)

<정 선생님 SIDE>

"이건, 도대체 뭐냐……."

경악의 목소리를 내지른다. 믿기 힘든 현실에 절망스럽게 무릎이 꿇려지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낸다. 하지만 온 몸을 전율시키는, 이 압도적인 기운은…… 틀림없이, 마계의 기운이다.

"어째서, 왜 하필이면 이럴 때……!"

구룡천의 마인들로 용사를 습격, 유지호를 죽이고 용사가 각성해 마인 몇 명을 용사의 손에 쓰러뜨리게 만들면 끝인 용사 이현진의 성장을 위한 작전이 실행되기도 전에, 난데없는 변수가 발생했다.

이건, 흡사 그 '마물대습격'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이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한참 담력시험 중이다. 담력시험 때문에 안으로 들어간 학생이나 학부모들도 많이 있다. 그들이 마물에게 습격당한다면 시말서 3, 4장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현진도 용사로서 비교하면 많이 약하고, 삼족오의 대장 최광후의 그의 딸, 최주희가 있다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수를 막아낼 순 없다.

언제나 임무에는 변수를 조심하라 하지만, 이건 너무 심각한 변수다.

"어쩔 수 없다."

내 정체가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싸울 수 밖에…….

그때, 심장을 관통하는 섬득한 느낌에 몸을 돌려 자리에서 피한다. 그러자 그 자리에 꽃이는, 검은 색의 창…… 창이 날라온 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하늘을 날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귀공자풍의 소년이…… 마족이 있었다.

그 마족을 보고 전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식으로 밖에 들은 적 없는, 상급 마족의 증거인…… 순수한 마기로만 이루어진 검은 안개 같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설마 상급 마족까지 와버렸단 말인가!"

경악스럽게 외친다! 마족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없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상급 마족이 세상에 나타날 때는 오직 하나, '마왕'이 지상 침략의 뜻을 나타냈을 때 뿐이다.

이건 일개 요원에 불과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서 상부에 연락을 취하고 모든 지원을 이 곳으로 돌려야한다. 그리고 보고해야한다. 상급 마족이 지상에 나타났다고.

"인간인가."

쿵!

"컥!"

조심스럽게 일룡에게 보고를 하려고 무전기를 고쳐잡았을 때, 나는 복부에서 강한 통증을 느끼며 울컥 피를 토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새 땅바닥에 볼썽사납게 쓰러져 내 배 위로 소년의 모습을 한 상급 마족이 발을 올려놓고 마치 벌레를 보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하찮은 인간이여, 최근 그대들 중에서 마인들을 연구하고 있는 자가 있다지? 묻겠다. 놈은 어디에 있지?"

마인 연구자? 당연히 짐작하는 대가 있다. 아니, 확신하고 있다. 지금 저 상급 마족이 말하는 이는…… 바로 구룡천의 일룡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곧 의문이 생겨버렸다. 대체 왜? 어째서 지금에 와서 일룡을 찾고 있는거지? 일룡이 마인 연구를 시작한 것은 10년도 더 지난 옛날부터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등장해 그를 찾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크윽…… 어째서…… 커헉!"

"인간이여, 그대는 질문할 자격이 없다. 묻는 말에 대답하라."

"모, 모른다!"

"모른다면 할 수 없지, 죽어라."

상급 마족은 손에서 창을 생성시켜 나에게 내리꽃으려 했다.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미안해, 혜라야…… 좀 더 함께 있어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난 아직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 상급 마족은 창을 멈추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서 검은 인영이 스쳐지나갔다.

"무사합니까, J."

"크으윽…… 33호냐?"

"예, 아버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다행이 지원이 늦지 않았다. 마인 33호, 일룡이 만들어낸 마인 중에서 틀림없는 최상급 마인이다. 그녀의 힘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게다가 마인 33호는…… 대마족병기(對魔族兵器)니까…….

"마인이로군. 거기의 마인이여, 묻겠다. 그대를 만들어낸 자를 말하라."

"아버님을 말씀이십니까? 절 이긴하면…… 생각은 해보지요."

"버릇이 없구나. 고작 마인 따위가, 마족의 은혜를 받은 인간 따위에 불과한 마인 따위가, 감히 마족에게 대드는가? 쿡쿡, 버릇을 고쳐주지."

상급 마족이 양 팔을 쫙 펼치자, 동시에 허공에서 나타나는 수십개의 흑창(黑槍)……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33호에게 걱정을 담아 묻는다.

"이길 수 있겠냐?"

"안심하십시요. 아시다시피 아버님이 만드신 저희, 마인들은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한 병기로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마천군(魔天軍)들이 전원 출동했습니다. 안심하십시요."

"마천군들이?!"

마천군, 33호를 포함한 일룡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들.

그들만큼 믿음직스러운 자들은 없었다. 안도감을 느끼며 빠르게 몸을 돌렸다.

"저 상급 마족은 너에게 맡기겠다."

"가십시요. 저 자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오만하구나. 마인이여…… 마족의 정점, 상급 마족의 힘을 뼈저리게 느껴보도록 해라!"

33호가 상급 마족을 향해 날아가고, 상급 마족이 뿌리는 검은 창들과 33호의 주먹이 부딪치며 큰 소음이 하늘에서 울려퍼졌다.

상급 마족, 큐리스는 강하다. 애초에 상급 마족이라 함은 모든 마족들이 동경하는 상위 계층, 그리고 그에 걸맞는 오만함과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 오판이 있었다면…… 인간의 가능성과 교활함을 너무 얕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은 발전한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그 과거를 딛고 일어서 마족도 질릴만큼 끔찍한 희생을 겪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인류, 인간이다.

큐리스가 아는 인간이란, 마인이란, 마계에서 들은 지식이 전부다. 즉, 현대판 마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나 급격하게 과학이 발달되어 변혁을 이룬 현대에서 옛 지식만 가지고 싸우는 건 무모했다.

그는 상급 마족다운 힘과 능력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오만했지만 그 오만을 누구도 비웃지 못할 정도의 재능과 노력의 흔적이 보였기에 누구도 그 오만을 오만하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경험부족'이란 이유 하나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나름 그럴듯한 변명거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이다!"

큐리스의 손짓에 무수한 창들이 쏘아진다. 하지만 거기에 33호는 큐리스를 비웃듯이 움직이며 그 창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며 지극히 평온한 표정으로' 큐리스에게 날아갔다.

"이럴리가…… 이럴리가 없어!"

"뭐가 이럴리가 없다는 건가요?"

33호는 어느 새 큐리스의 지척까지 다가와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는 것으로 절망에 빠진 큐리스에게 큰 굴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큐리스는 자신이 상급 마족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상급 마족인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는 오직 마왕족, 혹은 자신과 같은 상급 마족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찮은 인간 따위가, 마족의 은혜에 빌붙어 살아가는 마족의 천한 노예 따위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긴 듯한 진한 미소를 짓고 있다.

큐리스에게 이 이상의 굴욕은 없었다.

"날…… 내려다보지 마!"

"소용 없습니다!"

33호는 양 손을 펼쳐 날아오는 두 자루의 창을 잡았다.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기로 이루어진 두 자루의 흑창은 안개처럼 흩어지며 33호의 양 손 손등에 돋아난 흑진주 같은 구슬에 흡수되었다.

"젠장, 왜냐! 왜냐! 난 상급 마족인데, 네 까짓 마인 따위를 어째서 이길 수 없는거냐!"

"가르쳐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큐리스의 좌절 어린 외침에도 33호는 흔들림없이 명령에 충실하게 큐리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큐리스가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마인 1명에게 저렇게 밀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마인!

인간이 말하는 마인과, 마족들이 말하는 마인은 의미가 조금 달랐다. 마족들이 말하는 마인이란 인간이 마족에게 영혼을 주는 댓가로 마족의 힘을 빌리는 마족의 노예…… 기껏해야 그 정도 수준이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된 이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마족에게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졌다. 특히 용사와의 전쟁으로 마족들의 마계로 쫒겨난 이후로부터 마인은 인간들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 존재로 변모했다.

마족이 없어도 마인은 만들 수 있다. 그건 수없이 마족들과 마인들을 납치해 버젓이 생체실험을 해왔던 구룡천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야였다. 마인이란 그들에게 '병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구 시대의 마인은 마족의 힘을 빌리고 그 마족의 영향을 받아 특기나 기술도 변한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나의 색마기로 만들어낸 마인인 아스를 예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구룡천의 일룡이 만들어낸 신(新) 마인들은 다르다. 수많은 마족들의 피와 살, 마기와 모든 것을 빼내어 축척시키고 실험과 연구를 걸쳐 이루어낸 인공 마기…… 그 인공 마기를 통해 일룡은 양산형 마인들을 생성시켰다. 비록 그 마인들의 재료가 될 인간은 납치라는 방법으로 모아왔지만.

그리고 그 양산형 마인들 중에서도 수많은 실험을 거쳐 버텨온 특출난 존재들이 바로 일룡의 마인들, 마천군(魔天軍)이다. 더 이상 마인은 마족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인형도, 노예도, 꼭두각시도 아니다.

마인은 엄언한 인간병기, 마족의 영향이라고는 거의 1% 정도 밖에 들어가 있지 않는 99%의 순수를 자랑하는 인공제작형 마인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능력이나 기술이 마족들의 아래라 말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아아아아아!"

"인간은, 계속 용사에게만 의지해왔습니다."

발악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 그녀에게 창을 날리는 큐리스를 차갑게 노려보면서 무표정하게 창을 막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들을 상태가 아닌 큐리스에게 듣든 듣지 않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용사, 혹은 신기 사용자들…… 혹은 성인. 저희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오로지 그들만이 마족들을 쓰러뜨리고 마왕을 봉인시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라 믿어왔습니다. 오직 용사에게 의지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면서, 그저 마족들의 장난에, 마족들의 폭주에, 마족들의 악행에…… 공포심에 몸을 떨고, 불안감에 몸을 떨고, 증오심에 몸을 떨면서 그저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용사가 어서 마왕을 쓰러뜨려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기만을 기다리며 마족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상처입고, 소중한 고향이 파괴당하고, 소중한 나라가 혼란에 빠져도 그저 당하기만 하며 기다려 왔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나약하게! 용사에게만 의지하는! 약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딘가 힘껏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외치며 큐리스의 앞까지 다가와 양 손바닥을 큐리스의 가슴 부위에 올렸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이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한 노력의 증거."

쾅!

"쿨럭!"

밝은 섬광이 큐리스의 가슴을 꿰뚫고 큐리스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인간의 원한, 슬픔, 증오, 공포, 절망, 광기…… 그 모든 것이 실린 공격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큐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몸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곧장 마물처럼 몸이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비록 마물 1마리가 사라진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양이었지만, 이 마기는 곧장 마계로 흘러나 마계의 공기가 되어버리겠지.

그렇지만 그건 좀 아깝다.

"고맙다, 33호."

마침내 조용히 몸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던 내가 밖으로 나가 재빨리 '흡수'의 힘을 이용해 사라지려고 하는 큐리스의 마기를 전신에 흡수해 나아간다. 들어온다! 큐리스의 마기, 기술, 능력, 지식,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밀려들어온다!

"2호 씨……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군요, 비겁하게."

"헷, 싸움에 비겁이고 뭐고 있을 것 같냐?"

솔직히 둘의 싸움을 발견한 건 우연에 가깝지만…… 33호와 의외의 인물이 있길래 나도 모르게 지켜보았던 것 뿐이다.

큐리스, 첫째 형님의 시종에 불과했던 녀석이 어느 새 상급 마족으로 나타나다니…… 큭큭큭, 정말 많이도 컸군.

"방금 보여주신 그 능력은…… 아버님께 들었던 그것이군요. 2호 씨의 특수능력, '흡수'의 체질……."

"보아하니 너도 나랑 비슷한 힘인 것 같은데?"

"……정답입니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세포와 자료들을 모조리 저에게 쏟아부어 저 역시 흡수의 체질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요. 역시 자신의 능력이라 곧바로 아시는군요."

혹시나 해서 찔러봤는데 역시였나…… 내 본.신.의 능력은 아니지만 내가 자주 애용하는 능력이라 눈치채지 못할레야 못할 수가 없었다. 마기, 마력, 기, 성력…… 어떤 기운이라도 '먹어치우는' 흡수의 체질이 가진 능력…… 너무도 강대해서 '그 녀석'도 완전하게 다룰 수 없었던, 지금의 나도 많이 부족할 뿐인 능력…….

그렇기에 큐리스가 당한 것이다. 아무리 공격을 해봤자 마기만 사용할 뿐인 능력…… 그 마기를 전부 흡수당하니 설사 큐리스가 '전투 전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뭐, 방심도 한 몫 했지만.

"그럼 10초 내에 널 쓰러뜨리고 다른 마인을 찾아서 모조리 지워버릴까? 그럼 네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님'이란 작자가 나오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을테니까."

"너무 오만하신 것 아닙니까? 10초 내로 절 쓰러뜨리신다니…… 저도 당신도 같은 흡수의 능력자입니다. 이긴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호오, 그렇다면 내기 할까? 10초만에 내가 널 무릎 꿇리지 못하면 살려주지. 대신, 10초만에 널 무릎 꿇리면 난 네 목숨을 가져가겠다!"

"마음대로 하십시요."

나는 내 힘을 몸에서 극도로 끌어올리며 전투 준비를 끝냈다. 33호 역시 날개와 꼬리를 힘껏 최대한으로 펼치며 나에게 맞서는 기세를 펼쳐냈다.

재밌다. '그 녀석'의 능력을 똑같이 배낀 마인이라니…… 이건 못 참겠다. 매우 탐스러워서 한 입에 꿀꺽 삼키고 싶어진다. 일단 저 33호의 건방진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게 하고, 그 다음에 천천히, 야금야금 먹어주지.

희열에 차 내가 압도적인 힘의 일보를 전진하려고 하는 그 순간.

수풀 속에서 어느 인영이 튀어나와 나와 33호의 발걸음은 멈춰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난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경악 할 수 밖에 없었다.

"누님……?"

그 인영은 바로 현진이의 어머니…… 누님이셨다. 누님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보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 난 그냥…… 아이들을 찾으러 왔는데……."

"쳇, 일반인입니까?"

느낀다. 생각한다. 행동한다.

3박자를 1초만에 해결한 나는 즉시 누님에게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33호도 누님에게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크…… 윽!

내가 누님을 대피시키는 것보다, 33호가 누님을 공격하는 것이 좀 더 빠르다. 애초에 내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 그렇다면……? 대피시키려 하지 않으면 된다.

퍽!

"큭!"

"꺅! 지호…… 야?"

"2호 씨?!"

내 행동에 당혹스럽게 내 옛 이름을 부르는 33호와, 비명을 지르는 누님……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33호에게 휘둘렀으나 33호는 빠르게 백 스텝으로 뒤로 물러서 피했다. 동시에 내 등에서 33호의 손에 빠져나가면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지, 지호야! 괜찮니? 응?"

"아아…… 정말이지 갑자기 나타나선…… 누님도 참 불행하십니다."

혀를 차며 손을 펼쳐 큐리스의 능력 중 하나인 흑창을 생성시켜 통증을 참으며 33호를 노려보았다. 33호는 손에 묻은 내 피와 내 얼굴을 번갈아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럼 진작에 말씀해주셨으면 넘겼을것을……."

"큭, 그게 발견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즉시 죽이려고 한 녀석의 말이냐?"

"지호야! 피, 피가!"

쓴웃음을 짓는다. 아무래도 난 운이 더럽게 없나보다. 이런 장면을 들켜버리다니…… 이렇게 되면 난…….

"어이, 이거 아냐?"

"뭘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 난 말이다…… 최고의 도주 능력을 손에 얻었다는 것을."

큐리스의 본 능력은 전투 기술도, 흑창을 날리는 단순한 공격도 아니다. 큐리스의 진정한 능력은 바로 '도주 능력'이다. 큐리스는 오만함과 방심 때문에 죽었지만, 솔직히 능력만 잘 활용했으면 그렇게 어이없게 죽진 않았다.

"싸움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앗, 2호 씨……."

33호가 나에게 손을 뻗으며 입술을 움직여 말하는 것을 보았지만 점점 내가 만들어내는 안개에 가려져 소리도, 형상도 모두 삼켜졌다.

큐리스의 특기는 도주 능력, 그것도 최상급에 달하는 '그림자 이동술'이다.

나와 누님의 몸이 그림자에 빨려들어가고, 곧 나는 그림자 밖으로 나왔다. 좋아, 이걸로 일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제 누님에게 천천히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드리고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게 하는게…….

"……헐."

눈 앞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현진이, 이야~ 다시 만나네!

어째서 여기에 있냐는 듯한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주희, 오! 너도 있었구나!

나보다는 내 뒤에 있는 누님에게 더 시선을 보내고 있는 주희 아버지, 왜 댁이 여기에 있는겨!

이거 망했지. 망한 거 맞지?

"끌끌끌, 이거 누구야. 나의 둘째 아들이 아닌가!"

순간 머릿속에 떠올린 24가지 변명거리가 모조리 휩쓸려 사라져버릴 만큼 내 마음을 북극보다 싸늘하게 만드는 목소리를 듣자 나는 삐끗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돌렸다.

변하지 않았다. 저 새하얀 가운도, 듣기 힘든 웃음소리도,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사물로만 보는 무감정한 눈동자의 그토록 찾았던, 그토록 만나 죽이고 싶었던 노인의 모습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난 희열에 몸을 떨었다. 어머니, 드디어 원수를 갚게 됬어요.

그 즉시 나의 몸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내 이성에서 벗어나 내 감정에 충실하게 따르며……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흑창이, 노인을 꿰뚫는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푹!

"쿨럭!"

하지만, 나는 창을 꺼내는 것, 딱 거기까지 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창을 막 허공에 띄워 쏘아보내기 직전에 그걸 방해하는 손길이 내 몸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어……."

무표정하게, 과거의 밝게 웃어주시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모습으로 주먹을 뻗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내 가슴에 뚫린 구멍은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니."

나의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아니, 과거 나의 어머니였음이 틀림없는 육신의…… 마인의 비정한 눈빛을 마주치며, 생각했다.

인간이란, 정말로 너무 잔혹한 존재라고…….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죽음을 맞이했다.

마계에서, 결코 평범하지 못한 마왕족이 태어났다.

그 마왕족은, 놀랍게도 존재할 리 없는 저주받은 종족으로 그들을 가리켜 말하길 반마족(半魔族)…… 인간과 마왕족 사이에서 태어나 불행의 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아이가 마계의 중심, 마왕성 한 가운데서 태어나고 말았다.

수많은 이들이 저주받은 아이를 내쳐야한다고 외쳤지만 그 아이는 무사히 마왕성에서 자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마왕이었고, 마왕이 그 아이를 내쫒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온갖 멸시와 핍박, 구박, 괴롭힘은 마왕으로서도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마족은 저주받은 존재, 특히 마왕족의 피를 이었으면 그건 마왕족의 수치이자 굴욕! 차라리 즉시 목을 베었다면 그 아이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 삶이란 고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한 마왕족 아이가 호기심에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그 아이를 대동하고…….

밖으로 나온 마왕족 아이와 반마족 아이가 뿌리는 마기는 당연하게도 정부에게 들키지 않을리가 없었고 마왕족 아이는 반마족 아이를 미끼로 삼아 간신히 마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댓가로, 반마족 아이는 인간들에게 잡혀 온갖 끔찍한 실험을 당해야만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애타게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좋겠다 싶었을 때……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반마족 아이를 찾기 위해서 인간들의 사회에 나와 자신의 아이를 찾으며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반마족 아이가 있는 장소를 발견해 그 비밀기지를 단신으로 습격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반마족 아이는 몇몇 실험체 아이들과 함께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댓가로 반마족 아이는 가장 소중한 여인을 잃었고,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실험만 당해온 반마족 아이는 그 조직의 정체도,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때문에 결국 갈 곳이 없었던 반마족아이는 마계로 돌아간다. 실험체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마계에서의 생활로 강해진 반마족 아이의 일행은 마왕성에 당도하고, 아버지였던 마왕이 죽고 왕위를 사이에 두고 다투고 있었던 두 형님들에게 제안을 내건다.

자신에게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를 달라. 그러면 뭐든지 해주겠다.

두 마왕족은 다투느라 그 반마족 아이에 대해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귀찮다며 대충 승인해주고 반마족 아이의 일행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반마족 아이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야한다고.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몰아넣은 세상에 반드시 복수해주겠다고 맹세했다.

친구의 약속으로 친구의 행세를 하며 인간 사회에 묻혀살며 그 비밀 조직에 대해 알려고 계획을 세운다. 도중에 용사의 후손을 만난 것은 '우연'의 발로였지만, 그는 그 우연을 기회로 삼아 연극을 하며 친구가 되었다. 이 녀석이 용사의 후손이라면 틀림없이 비일상의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테고 비밀 조직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믿고, 4년간 계속 인간 행세를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너무 인간 행세에 물이 올랐던 것일까? 자신이 진짜 인간인 양, 정말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의 우정, 선생님의 따뜻한 말씀 한 마디, 좀 복잡하지만 나름 가족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추운 곳에서만 살아가던 그에게 평범한 일상의 밝은 햇빛은 너무도 따스했다.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다고 무심코 생각해버렸을 정도로.

그런 달콤한 꿈은, 금방 깨어나버렸지만.

마물대습격…… 이라고 했던가?

나름 그렇게 명명했던, 마계에서 마물 부대을 보냈던 사건은 혹시 마계에서 날 의심해 감시하기 위해서 보낸 첩자인가 싶었지만, 그 여인을 본 순간 나는 모든 일과 사건을 2번째로 미룰 정도로, 오직 한 명의 여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살아있지 않은 기계마냥 움직였고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달콤한 환상에 젖어 더없이 멍청하고 어이없고 황당하며 한심해빠진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복수!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나를 천대하고 무시했던 마왕족들을 제치고 마왕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납치했던 인간들을 모조리 멸살시킨다는 맹세를 잊어버린 자신을 책망하며…… 이현진을 이용해 최종 병기로 사용할 계획을 세우며, 이를 갈았다.

모든 것은, 어머니와 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였다.

죄송해요, 어머니. 저…… 지금 당장 달려가 저 자식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데, 복수하고 싶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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