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여자일 뿐 - 선생님
By 한강하구 & 미네르바
이 글은 한강하구님의 여섯 번째 작품으로써, 소라사이트에서 완결을 짓지 못한 채 회원탈퇴를 해 버려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아울러 한강하구님은 자신이 글을 사이트에 올려놓으면 자기 컴에서는 다 삭제를 해 버리는 편이라 현재는 소라 사이트에 한강하구님의 글이 한 편도 남아있지 않고 본인조차도 본인의 글을 갖고 있지 않은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미완의 글이 너무 아쉬워서 제가 재편집과 가필을 해서 완결을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본 글을 완결을 지어서 이곳 야문에 게재합니다. 함께 나누기를 원하며 원작보다 더 뛰어난 글이 될지 아니면 원작보다 못한 작품이 될 지는 독자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미네르바 배상
1.
여름방학도 거의 끝나가는 오후의 아파트, 장마철과 삼복더위도 다 지났건만 지겹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늦장마’라고 매스컴에서는 떠들어 대고 있기는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린다.
사실 현주는 이렇게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긴 했다. 비바람이 불거나 혹은 퍼붓는 비보다는 바람도 없이 차분하게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원래 더 좋아 했었다. 왠지 마음이 차분해 지는 걸 느끼고 그러면서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일상들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어서였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던 현주가 잊고 있었던 헤이즐넛이 담긴 커피 잔을 내려 보았다. 식어버린 커피의 처량함이 쓸쓸해 보이는 것이 마치 지금 자신의 처지인양 얕은 한숨을 뱉어낸 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불란서 샹송&칸초네 음악을 들으면서 가만히 거실을 돌아보았다. 늦은 오후의 널찍한 거실의 공간은 침침한 듯 고요했다.
여자나이 45살…, 거의 인생의 절반을 넘겨 살았다 해도 과언(誇言)은 아니다.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뭐하나 부족함 없이 살아왔고, 뿐만 아니라 명문교대를 졸업해서 어렵지 않게 평소 바라던 대로 초등교사에 임용도 되었다. 또 남들에 비하면 자랑할 법도 한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남들이 보기엔 아주 순탄한 삶이었고 그녀 또한 나름 만족한 일상들이었다.
결혼! 돌이켜보면 대단한 사랑 같은 건 아니었다. 지금의 남편은 적당히 좋았고, 평범했으며, 보통 체구였지만 자신을 향한 그의 자상함에 많이 끌렸었다. 대학 졸업 후에 만나 3년여의 시간을 끌어가며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래서 사랑의 결실인 아들 승호도 태어났고…, 너무나 행복했던 날들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차가워진 커피를 습관처럼 한 모금 넘기면서 최근 잦아진 한숨을 자신도 모르게 뱉어내던 그녀가…, 기어이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소파에 앉은 채로 몸을 옆으로 돌려 가슴에 두 다리를 쪼그리고 붙인 채, 그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깊숙이 묻어버리곤 한동안 움직이질 않는 그녀였다.
서 현주, 그녀 나이 45세…, 무남독녀(無男獨女)로 살아왔던 그녀가 2년 전 아빠를 마지막으로, 두 분의 부모님을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면서 이제는 오롯이 남편과 아들만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평소 자상하고 온화한 인상과 성품으로 인해 주위사람들에게 많은 호감을 받고 있던 그녀였고 모든 일에 성심(誠心)과 성의(誠意)를 다하던 그녀이기에 당연히 남편과 아들에게도 사랑과 정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두 남자 즉 남편과 아들은 각각 배신감과 실망감만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한꺼번에 생기는 걸까?’
다정하던 남편 대준, 누구보다 착하게 자라주던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의 아들 승호!
며칠 전에 알게 되어 받은 충격은 쉽게 진정될 수가 없는 큰…, 아주 큰 상처로 그녀의 가슴에 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 대준의 불륜(不倫)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남편인 대준은 원래는 대기업의 건설회사 중간 간부 출신이었지만 일찍이 처가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발판삼아 건축자재와 관련된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그가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그의 회사를 밀어주었고, 동시에 주변 군소(群小)의 거래처들로부터 그의 수완이 좋다고 인정받아서인지 비교적 일찍부터 동종업계에서 자리매김을 하여 탄탄하게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입도 많아 제법 상당한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약간의 부족함이 넘치는 것보다 좋은 것임을 대준의 경우에선 보다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사업은 잘 돌아가고 모든 면에서 어려움보다는 여유가 넘치는 생활이 되다보니 해서는 안 될 곳에 한 눈을 팔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지금 사십하고도 여덟이었다. 그런 그가 친구의 부탁으로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을 배우던 친구의 여 조카와 바람이 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만 20세였으니 중년의 남자가 한 번 빠져버린 그 황홀한 늪에서 헤어 나오기는 더더욱 힘들었을 터…, 대준은 아내인 현주를 정말 사랑했고 좋아했다. 대학졸업당시의 현주는 정말이지 깨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아내 현주가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보고 있으면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랑하고픈 전형적인 여자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었다. 가녀린 듯 슬림한 체형에 크지 않은 키, 그러면서도 교양스럽게 배운 티가 나는 정숙한 모습의 그녀, 무려 열 몇 번의 도끼질 끝에 얻어낸 그 사랑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생의 최대 행복이라고 여길 만큼 큰 기쁨이었다. 그런 아내 현주를 배신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알았다면 얼른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지만, 우연한 일로 인한 친구조카인 영신과의 불륜(不倫)은 대준의 이성(理性)을 맨홀 속에 처박아 버릴 정도로 황홀한 것이었다.
대준은 현주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움츠러들었지만, 그래도 영신에게 하는 것 못지않게 아내를 영신만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가며 한 발 한 발 걸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 늪으로…,
현주는 대준의 배신을 처음 알았을 때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었다. 몇 번이나…, 아니, 밤을 새워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답을 찾을 수도, 진정되지도 않는 마음, 백 번 아니 천 번을 양보해보았다.
‘그래…, 여태까지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이던가?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 아닐 거야, 아냐! 실수로 그런 걸 거야….’
현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이제 앞으로 어찌 해야 할까?’
남편의 어마어마한 배신감에 도리질하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진열장의 양주를 꺼내 양주잔에 한 잔을 가득 채운 후 다시 아까 그 자리에 앉았다. 고개 들어 창문의 빗줄기를 세어보던 현주는 이제 아들 생각에 막힌 가슴이 더욱 타 들어감을 미간(眉間)을 좁혀 찡그린 표정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아들 또한 며칠 전에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 기막힌 사건(事件)이 있었다. 죄명(罪名)은 폭력서클에 가담되어 또래들과 사고를 치다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었다. 아들이 재학하고 있는 학교에서 소위 학교 짱이라는 3학년 학생이 결성한 불량서클에 아들이 가입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아이가 그런 곳에 어울렸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일이 남편일보다 더 애가 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하고야 정말 안 되면 이혼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지만 아들은…, 아들은 그렇게 놔둘 수가 없었다. 자신은 명색이 초등학교 교직생활 23년차인 교사(敎師)가 아니었던가…, 아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야한다는 고리타분한 얘기가 아니었다. 바로 나의 아들이라는 초조함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담 정도가 깊지 않아서 훈방될 거라는 담당 형사의 애기를 듣고 오기는 했지만 현주의 불안함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어디하나 모난 구석 없이 잘 자라주던 아들이 갑자기 왜…?
그날 찾아간 경찰서에선 그 아이들의 리더 격인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도망을 쳤거나 아예 그 일엔 끼어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벌써 5일째 출장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 남편의 문제는 차선이었고, 지금은 아들 승호의 문제해결이 우선이었다. 현관차임벨 소리에 벌떡 일어난 현주는 달려 나가 부리나케 문을 열었다. 거기엔 풀죽은 모습으로 승호가 비를 잔뜩 맞은 채 서있었다. 형사의 말처럼 다행히도 훈방이 된 모양이다.
“아! 아유…, 승호야! 얼른 들어와, 왜 그러고 있었어?”
“엄마….”
“그래…, 일단 들어와, 얼른….”
한쪽으로 비켜서자 승호가 쭈뼛거리며 들어선다.
“우선 씻어!”
현주가 감정을 누르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응….”
승호가 얼른 욕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하는 승호의 행동이나 말투에 현주는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잘 얘기하면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은 기대 때문이었다. 승호는 씻고 나와서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엄마가 앉아 있는 소파의 맞은편에 풀이 죽은 채 앉았다.
“승호야.”
“응….”
“왜 그랬는지 엄마가 물어봐도 돼?”
“뭐…얼?”
“왜 그런 나쁜 일에… 네가 껴 있었냐고….”
“….”
“말하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응…, 괜찮아…, 말해봐, 엄마잖아…, 응?”
“….”
쉽게 얘기하려 하지 않는 승호를 보며 답답해하던 그때, 승호의 스마트폰이 울린다. 승호는 발신자를 힐끗 보고는 주저주저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현주는 그런 승호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승호가 망설임 끝에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 대며 자신의 방으로 빠르게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현주는 답답했다. 분명히 이번 사건에 관계된 전화일거란 확신으로 온 신경을 승호의 방에 집중하며 보고 있었다. 잠시 뒤 승호가 조금 편해진 얼굴로 방을 나왔다. 현주가 조심스레 묻는다.
“누구니?”
“아는… 형!”
“너의 학교?”
“응.”
그리곤 잠시 침묵…
“….”
“….”
“혹…시? 그 너희 모임 회장이니?”
현주는 혹시 승호가 반발할까 몰라 존중해주는 의미에서 회장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승호의 눈치를 보았다.
“응….”
“3학년… 형?”
“응….”
“그 형은… 어떤… 학생이야?”
“그냥… 좋은….”
“그냥 좋아?”
“응.”
“그 형이 너….”
현주는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모임에 가입하라고 협박… 했니?”
승호가 엄마를 쳐다보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형은 그런 사람 아냐!”
“아, 아니… 엄마는… 네가 경찰서에도 잡혀가고….”
“그건 그 형 때문이 아냐, 우리끼리 잘못된 거지….”
현주는 잊고 있던 아까 따라놓은 양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엄마! 나 잠간 나갔다올게.”
“응? 어… 어딜?”
“요 앞에 잠간….”
“비 많이 오잖아, 엄만 너랑 할 얘기가 많은데….”
“잠간이면 돼.”
“그 형 만나니?”
“어? 엉….”
현주는 잠시 말을 끊었다.
“승호야!”
승호가 엄마를 바라본다.
“그 형… 집으로 오라고 해봐….”
“왜에?”
“네가… 좋아하는 형이라니까 엄마도 보고 싶어서….”
“글쎄….”
“얘기해봐…, 응?”
현주는 그 학생이 온다면 정말 부탁이라도 해서 승호를 그들에게서 빼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그런 불량서클을 만들 정도라면 보통 불량한 게 아닐 텐데 하는 마음이었다. 현관문을 나서려는 승호에게 재차 묻는다.
“승호야!”
“응.”
“그 학생… 많이… 불량하니?”
“아니…, 그 형은 우리의 로망이야…, 얼마나 멋있는데….”
“그러니? 암튼 엄마한테 인사나 시켜줘 봐.”
멋있는 것의 기준이 뭐기에 얘가 이럴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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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 영후라고 합니다.”
90도로 머리를 굽히며 의외로 공손하게 인사하는 그 학생의 태도에 내심 당황하는 현주였다. 조금은 불량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그녀이기에 그랬는가보다.
“아! 네, 어서 와요, 반가워요.”
현주도 최대한 친절하게 그를 맞아주었다.
“승호가 어머님을 걱정하시게 했다고 해서… 제가 더 죄송합니다.”
“아, 아니… 학생이… 뭘….”
180cm도 훨씬 넘어 180cm 중반 대에 이를 정도로 큰 키에 건장해 보이는 몸, 반면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참 괜찮아 보이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낯이 많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현주는 받았다.
“승호야! 네 어머님 정말 미인이시다.”
“아이… 무슨….”
뻔해 보이는 칭찬에 현주는 쑥스러웠다. 현주가 음료를 준비해가지고 거실로 오자 영후가 승호에게 들었다며 ‘선생님’이시냐고 묻는다.
“네…, 그래요.”
“아이… 어머님… 말씀 놓으세요, 불편합니다. 제가….”
“으응… 천천히….”
“그런데… 혹시 전에 한성초등학교… 안 계셨었나요?”
“어머! 있었는데… 오래 전에….”
“그러세요? 몇 년도…?”
“음… 한 10년? 11년 전?”
“아! 정말요? 그럼 맞네…, 맞아! 선생님 맞으셔… 허허허!”
“어, 엉?”
“제가 2003년에 한성 초등학교 1학년 3반이었거든요, 선생님 반… 하하하!”
“어머! 정말?”
“네, 어쩐지 처음 뵙는 거 같지 않다 싶었거든요, 하하하!”
“그래…, 나도 좀 그렇다 했었는데… 호호호!”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요.”
“그래…, 나도 정말 반갑네.”
엄청 호탕하게 웃으며 진심 반가운 표정으로 영후가 현주를 바라본다. 현주도 그렇게 말하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거 같았다.
“그, 그럼… 네가?”
“예, 쌤! 잘 지내셨죠?”
“어머! 어머! 어쩜 이렇게 잘 컸니…?”
“뭐야? 형이랑 엄마랑 알아?”
“그래, 임마! 너희 어머니가 이 형의 첫 번째 담임 쌤이라는 거 아니냐, 하하!”
“영후, 너도 정말… 남자답게 컸구나…, 정말….”
“아… 선생님도 정말 여전한 미모(美貌)시네요, 그땐 정말 우리의 우상(偶像)이셨는데…, 하하하!”
“아이… 놀리는 거니?”
영후가 승호는 보지도 않은 채 현주만 쳐다보며 또 한 번 호탕하게 웃는다. 현주도 웃어주었다. 살짝 패인 보조개가 수줍게 도드라져 보이고 있었다. 현주는 몰라보게 달라진 영후의 모습이 대견하게 보인다. 아들보다 두 살 정도 터울 지는 그때의 아이들은 마냥 귀엽고 예뻤었는데… 지금보이는 영후는 뭐랄까? 한 마디로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현주였다. 영후도 너무 어렸기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선생님을 향한 어릴 적 아련한… 돌이켜보면 어이없는 가슴앓이였을 그때의 기억에 한 번쯤 만나고 싶었던…, 수없이 등장했던 상상(想像)속의 여자였기에 지금의 만남은 작은 흥분이 일정도로 설레는 게 사실이었다.
김 영후!
하지만 그의 삶은 비교적 순탄치 않았다. 화목했던 가정은 여러 복잡한 사정에 의해 순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리고 아버지와 엄마를 차례로 여의게 되면서 졸지에 고아(孤兒)가 되어 여기저기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던 게 중1때 무렵이었다. 혼자 세상을 살아왔으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세상이 그를 훈련(訓練)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싸움에서는 절대지지 않는다. 지금은…, 여자도 안을 만큼 안아봤고, 게다가 여자의 몸을 잘 알뿐더러 여자들의 마음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또래의 대장이 된 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승호야! 잠간 방에 가 있어, 형이랑 얘기 좀 더하게….”
“왜 엄마? 무슨 얘기?”
하면서 엄마와 영후를 번갈아 쳐다본다. 영후와 눈이 마주 쳤을 때 영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말없이 승호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로를 외면한 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현주가 술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저기… 영후야….”
“….”
영후는 대답 없이 그윽하게 현주를 쳐다보며 알 듯 모를 듯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그의 표정에 현주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멈칫거리며 들고 있던 술잔을 만지작거려보며 고개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