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 장 (2/7)

제 2 장

  여름방학을 시작해서 일주일 동안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해 마다 그렇듯이 올해도 방학을 하자마자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에 왔다.

  방학 첫 날 나는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고 한 낮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가자 금년에 50세가 되시는 할머니가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자그마한 키에 호리호리하고 아담한 몸매를 지닌 할머니는 나이에 비해 매우 젊게 보여서 

이제 겨우 서른 두서너 살 된 아줌마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와 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길을 가면 모두들 내가 할머니의 아들이고 엄마는 이모

나 고모로 알았다.

나도 엄마보다는 할머니가 엄마 같았고 엄마는 큰누나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금년에 75세이신데 할머니와는 나이 차이가 25살이나 되었다.

대대로 가난에 쪼들리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한이 맺힌 할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돈을 버

느라 느지막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다.

"아이고, 내 강아지 이제 일어났니?"

할머니는 늘 나를 이렇게 부른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그게 싫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는데 내가 투정을 부리면 할머니는 

나를 꼭 끼어 안고 내가 낄낄거리며 항복을 할 때까지 온 몸을 더듬어 간질이곤 하셨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는 과수원에 가시고 엄마는 시내에 갔다. 배고프지? 내 얼른 밥 차려주마..."

할머니는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 가셨다.

          *            *             *

  대청마루 한쪽 편에 걸려있는 아주 고풍스런 벽시계가 종을 두 번 쳤다.

오후 두 시.

담장 옆 높다란 미루나무 가지에서 매미가 제철을 만났다고 목청껏 노래를 한다.

오전 내내 암탉의 등을 올라타던 커다란 수탉도 이제 더위에 지쳤는지 두엄 옆 싸리나무 그

늘 아래서 꼬박꼬박 졸고있다.

한 낮의 더위가 스물 스물 온 몸을 휩싼다.

서랍을 뒤져 손전등을 찾아들고 운동화를 신으며 설거지를 마치고 안방에서 낮잠을 주무시

려는 할머니를 향해서 커다랗게 소리쳤다.

"할머니, 잠깐 뒷산에 갔다 올께요!"

"물가에 가지 말고 바로 들어와...."

할머니의 곱고 맑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대문을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나른한 하늘에 뜨거운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쪼이고 있다.

  나는 잰걸음으로 뒷산 중턱을 향해 올라갔다.

장군바위를 돌아 개울을 끼고 조금 오르자 너럭바위가 보였다.

너럭바위 옆으로 가서 은폐물을 치우고 암벽에 난 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장방형의 석실이 나타났다.

  해마다 들어와 보는 곳이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재작년 겨울 방학 때 들

어와서 문득 이곳이 인공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겨울 방학 내내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고 확실히 누가 어

떤 목적을 두고 만든 것 같다는 확신만 굳어졌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여기에 들어 올 때마다 꼭 어떤 신비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

곤 했다.

  손전등을 켜고 벽면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동쪽 면은 항상 돌이끼가 끼어 있어서 무심코 지나치곤 했었는데 오늘은 전과 달리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전에 보지 못했던 커다란 손바닥처럼 생긴 자국이 다섯 개가 나란히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내가 전에는 이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해보다 장난 삼아서 "열려라 참깨!"하고 외치며 이끼로 뒤덮여 

잘 표시가 나지 않는 그 중 세 번 째 손바닥자국을 힘껏 후려쳤다.

  그 순간!

우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동쪽 벽면 전체가 회전문처럼 빙글 돌며 회전하는 탄력에 의하여 

내 몸 전체가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돌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잠시 멍청한 상태가 되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려서 주변을 휘둘

러보았지만 캄캄한 암흑 속에는 정적이 감돌고 저만치에서 손전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써늘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손전등을 주워 들고 사방을 비추어 보았다.

안쪽으로 구부러진 통로가 하나 나 있었고 내가 들어온 석실 벽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

미를 뚝 떼고 굳게 닫혀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나 석벽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이리 저리 있는 힘을 다 하여 밀어 보았지만 석벽은 꼼짝 달싹을 하지 않은 채 요지

부동이었다.

밀고 당기고 별 별 짓을 다 해 보았지만 시간만 흐를 뿐 내가 들어온 벽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는 수 없이 통로를 따라 손전등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가보았다.

한 모퉁이를 꺾어 돌자 조그마한 석실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석대 위에 마치 조그마한 석관처럼 생긴 돌로 만든 함이 놓여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이자 나는 조심스럽게 함을 열어보았다.

  함의 뚜껑을 열고 손전등을 비춰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제발 무섭거나 이상한 것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며 시선을 내려트리자 안에는 

호리병 모양의 조그마한 붉은 색 옥병과 푸른 색 옥병이 각각 하나씩 있고 바닥에는 집에 

있는 족보 책의 네 배쯤 되는 두툼한 책이 들어있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에 얼른 책을 꺼내어 바닥에 놓고 펼쳐보았다.

  누르스름한 색깔의 표지에는 올챙이처럼 생긴 부적 비슷한 네 자의 글자가 커다랗게 써 

있었고 모두 다섯 장의 가죽처럼 생긴 두꺼운 양피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장에는 벌거벗은 남녀의 상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이 그림을 잠시 들여다보았는데 남녀의 모습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

다.

그리고 남자의 상에는 핏줄처럼 생긴 빨간 선과 파란 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빨간 선은 배꼽

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으로만 그려져 있었는데 왼쪽 불알을 지나 왼쪽 다리와 발가락 끝을 

돌아 옆구리와 왼팔로 올라와서 돌은 후에 목을 통과하여 왼쪽 눈과 머리 꼭대기에서 한바

퀴 감돌고 다시 가슴으로 내려와 배꼽에서 합쳐졌다.

파란 선은 빨간 선과는 반대로 오른쪽으로 돌아 결국에는 배꼽에서 빨간 선과 합쳐졌다. 

여자의 상에는 빨간 선과 파란 선이 남자와는 정 반대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잠시 왜 이런 그림을 그렸나 의아해 하며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두 번째 장에는 한 쌍의 남녀의 상에 그려진 그 핏줄처럼 생긴 선을 따라 탁구공처럼 생

긴 붉고 푸른 한 쌍의 둥근 물체가 이동하는 듯한 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이런 그림이 무었을 뜻하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장에는 손과 발의 움직임이 마치 코렐이나 포토샵에서 애니메이션을 나타낼 때처

럼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고 핏줄 같은 선을 따라 이동해온 둥근 물체가 손가락 끝이나 발가

락 끝으로 퉁겨져 나가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그림 속의 손동작을 똑같이 따라 해 보았지만 손가락 끝에서는 아무 것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실소를 머금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네 번째 장에는 빨갛고 푸른 구슬이 핏줄 같은 선을 따라 움직이자 얼굴의 모양이나 몸의 

크기와 모양이 변형되는 것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다소 호기심이 일어나 손전등을 더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자 어떤 그림에는 남자의 성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여자의 성기로 변하는 그림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의 모양이 점점 변하여 말이나 새처럼 짐승으로 변화되는 그림도 있

었다.

핏줄처럼 생긴 경로를 따라 빨갛고 파란 구슬을 움직여 이리저리 변화를 일으키면 여러 가

지 모양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나타낸 그림 같았다.

나는 실제로 이렇게 될 수만 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마지막 장을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남녀의 몸과 손바닥, 발바닥 등 몸의 곳곳에 붉은 점과 푸른 점, 검은 점들

이 작게 찍혀있는 큰 그림 밑에 작게 세 줄로 작은 그림들이 빼곡이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그림들은 빨간 점들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그림이거나 성기가 꼿꼿이 발기되는 

등의 그림들이었고 그림들마다 군데군데 표시를 해 놓고 알 수 없는 글자처럼 생긴 것들이 

조그맣게 써있었다.

아마도 그 빨간 점들이 사람의 몸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번째 그림들은 푸른 점들로 움직이던 사람이 점점 움직임이 둔화되거나 굳어지는 등의 

그림들인데 별로 이로운 그림은 아닌 것 같았다.

세 번째 그림들은 검은 점들이 찍힌 그림들인데 고통을 호소하거나 몸부림치는 등 그 점들

은 사람에게 아주 해롭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강렬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 도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려고 열심히 들여다보

았다.

  나는 청보위 아무개 검사처럼 머리가 좋지도 않았지만 얼마동안 열심히 들여다보자 누가 

보아도 아주 이해하기 쉽게 그려놓은 덕분에 그 그림들은 내 머릿속에 또렷이 입력이 되었

고 그런 난해한 도해들이 과학시간에 배운 행성의 궤적처럼 인체의 어떤 일정한 운행의 경

로를 상징하고 그 경로에 따라서 빨갛고 푸른 구슬을 움직이면 어떤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

을 알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경로를 따라 붉고 푸른 기운을 운행을 하면 어떠한 무형의 힘이 손

끝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떠한 무형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나온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게 생각되어 그렇게 

해보려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열심히 흉내를 내 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는 문이 닫힌 것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후닥닥 다시 내가 들어온 석벽 쪽으로 뛰어가서 나가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힘만 

빠지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나는 손전등의 빛이 희미해져 가는 것과 배가 몹시 고픈 것을 느끼고 시간이 많이 흘러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이대로 이곳에서 죽어야하나 하는 불길한 생각에 젖어들었다.

  벌써 시간이 상당히 흐른 것 같았다.

배가 고픈 것 보다 목이 말라 더 못 견딜 상태였다.

어디 물이 없나 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꽉 막혀서 뽀송뽀송 말라있는 암석 동굴의 석실 속에 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때 옥함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병들을 생각해내곤 얼른 그곳으로 달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우선 붉은 색 옥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어 보았다.

  뚜껑을 열자 말 할 수 없이 기분이 아주 좋은 향기가 석실 안에 가득 찼다.

옥병 속에는 붉은 색의 액체가 들어있었다.

병을 입에 대고 약간 기울여 맛을 보자 아주 감미로운 맛이 났다.

목이 한참 마르던 때이라 앞 뒤 생각할 겨를 없이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마실 때는 몰랐는데 두 서너 모금의 액체가 식도를 통과하자 마치 뜨거운 물을 삼켰을 때처

럼 뱃속이 별안간에 따뜻해졌다.

  몇 모금을 들이마시는데 갑자기 뱃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차, 이거 독약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끓는 기름가마 속에 빠진 오징어 튀김처

럼 

전신이 불타올랐다.

뜨거운 고통 속에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탁구공 만한 뜨거운 공 한 개가 몸 속에서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느낌에 살풋 정신이 들었

다.

뜨거운 공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마다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손전등은 꺼졌지만 석실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고통과 함께 심하게 입술이 타며 목이 말라왔다.

  어쩌다 독약을 잘못 먹어 아직까지 죽지는 않았지만 아주 심한 극독에 중독 되어 이제 얼

마 안 있으면 죽게 될 것 같았다.

이제는 이 캄캄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갈 생각을 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한 참의 시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뜨거운 공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몸 속을 튀어 돌아다

니는 고통과 목마름만이 더해 갈 뿐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혹시 푸른 색 옥병에 들어있는 것이 해독약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옥함 속에서 푸른 색 옥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시원하고 청량한 향기가 석실을 맴돌았다.

그 향기를 들이마시자 몸 속의 뜨거운 공이 날뛰던 것이 주춤해지는 것 같았고 머릿속이 시

원해지는 것 같았다.

해독제가 틀림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 뱃속으로 스미자 그렇게 미친 듯 날뛰던 뜨거운 공이 움직임을 멈

췄다.

  '아하! 이게 틀림없는 해독약인가 보구나!'

  이제는 살았다 싶어 서슴없이 몇 모금을 들이마시는데 갑자기 오싹하고 한기가 들더니 뱃

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차 싶어 마시기를 그만두었으나 이번에는 냉동창고에 갇힌 것처럼 매서운 한기가 온 몸을 

휘감아왔다.

전신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뒤로하고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또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번에는 뜨거운 공과 차가운 공이 몸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제멋대로 날뛰어 다녔다.

이상하게 목마름과 배고픔이 없어졌지만 고통은 두 배로 심해졌다.

  뜨겁고 차가운 두 개의 공이 간이며 허파며 머릿속이나 내장 등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다니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으랴!

그것들을 꺼낼 수도 뱉어낼 수도 없어 석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주먹으로 바닥도 치고 

소리도 지르며 발광을 했다.

그러나 고통은 멈출 줄 모르고 더욱 더 심해져만 갔다.

  그러다가 문득 책에서 본 그림을 생각해냈다.

머릿속에 그 구슬의 이동경로를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구슬이 날뛰는 것을 멈추고 내가 생각

하는 경로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고통이 잠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빨간 핏줄과 파란 핏줄의 경로를 생각하자니 무척 힘들었다.

잠시 정신이 흩어지자 또 다시 구슬들이 경로를 이탈하여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났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다해서 구슬의 경로를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구슬이 경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고통이 사라졌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한 바퀴씩 몸 속을 일 주 할 때마다 구슬들이 조금씩 작아지고 몸이 점점 편안해 지는 것

을 느끼고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어느 사이에  켜져 있던 손전등의 빛이 점점 약해지더니 이윽고 힘을 잃고 꺼져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내 몸 속에 있던 탁구공 만 한 것이 점점 작아져서 콩알 만 

해지고, 다시 깨알 만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물체가 몸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에 없이 상쾌한 느낌으로 눈을 떴다.

몸이 매우 가벼워지고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캄캄했던 주변이 대 낮처럼 환하게 보였고 저만치 빛을 잃은 손전등이 뒹굴고 있었다.

무었인가 알 수 없는 변화가 내 몸 속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자 갑자기 몸이 붕 뜨더니 머리가 돌로 된 천장에 부딪쳤다.

무의식 적으로 "아야!"하고 소리쳤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고 아무런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석실 천장의 돌이 부셔져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얼래? 이제 내가 아주 돌 머리가 되었나?"

나는 다소 황당하여 얼떨떨해졌다.

  그리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전과는 다르게 머릿속이 맑아진 것을 느낌과 동시에 옥병 속에 들어있던 액체가 내 몸 속에

서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먹으로 약간의 힘을 주어 벽을 쳐보자 마치 진흙으로 만든 벽을 후려친 것처럼 석벽에 주

먹 자국이 생겼다.

"야호!!!"

나는 엄청난 힘이 생긴 것에 환호를 했다.

손전등을 집어들자 밀가루 반죽을 집는 것처럼 아무런 힘없이 손잡이가 일그러져 버렸다.

나의 조그마한 동작에도 주변의 사물들은 힘없이 부서지고 깨어졌다.

신발은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들조차 견디어 내지를 못하고 삭아버린 볏짚처럼 부서져 내렸

다.

  돌로 만든 상자 속에서 꺼내어 놓은 책을 보려고 책장을 만지자 그 두껍던 책장이 마치 

밀가루처럼 가루로 되어 버렸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마이다스 왕처럼 만지는 것마다 황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버리는 제어 할 수 없는 너

무나 큰 힘이 갑자기 생겨나자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          *           *

  모든 행동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익히기 위해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배

울 때처럼 오랜 동안 연습을 했다.

어느 정도 힘을 제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책을 보려고 책장을 만지자 그 뻣뻣한 책

장이 또다시 밀가루처럼 가루로 되어 버렸다.

"오잉? 이거 조심해야겠는데!"

  나는 다시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힘을 뺀 채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책 속

의 그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림 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비밀들은 베일을 벗고 홀연히 그 모습

을 드러내며 나의 머릿속으로 각인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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