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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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이 예약한 레스토랑에 앉아 철근 부부를 기다렸다. 생각해보니 민철은 철근이 부인을 데리고 모임에 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저런 남자랑 살까…. 궁금했다.

[여~민철이~ 먼저 와있구나. 여긴 내 와이프.]

철근과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민철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철근에게 민철이 여자 다루는 법을 물어봤을 때 검사실에 들어와 추행당하며 흥분했던 신민아였다. 철근에게 나직이 귀속말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새 결혼이라도 한거냐]

[무슨. 사실 와이프랑 그날 네 앞에서 놀아본 거지. 남들한테 보이는 걸 좋아하는 년이거든. 설마 그렇게 쉽게 여자가 몸을 내주는 줄 알았냐? 후후]

뒤통수를 맞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안녕하세요. 민철씨.]

민아가 특유의 눈꼬리를 만들며 민철에게 미소를 줬다. 아내와 다른, 섹시함이 물씬 풍기는 모델 스타일의 여자가 민철의 눈을 빤히 바라보자 민철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윤지와 인사를 나누었고 철근에게는 딱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남편에게 속삭였다.

[자기야. 더 안와?]

그 말을 엿들은 철근이 다른 부부들이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자 윤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식사가 나왔고 어색한 공기 속에 민아만이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유독 철근마저도 굳은 표정으로 간혹 윤지에게 눈길을 줄 뿐이었고 윤지는 눈을 내리깔고 화난 사람처럼 식사만 말없이 하였다. 

민철은 목이 탔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민아가 말했다.

[어머 민철씨. 목 마르셨나보다.]

아까부터 민철에게 말을 걸던 민아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민철 옆으로 가 민철의 잔에 물을 따랐다. 민아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민철의 코끝을 간지럽혔고 샴푸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너무 다가온 철근 와이프에게 놀란 민철은 당황해 고개를 돌리자 허리를 굽혀 늘어진 옷 속으로 그녀의 젖가슴의 보였다. 순간 그날 검사실에서 벗고 있었던 민아의 섹시한 가슴이 떠올랐다. 민아는 이어 철근에게도 물을 따라주었다. 민철은 자신에게 따라준 것과 달리 철근의 팔에 팔짱을 끼며 물을 주는 민아를 보며 질투를 느꼈다. 철근의 팔에 은근히 눌리는 민아의 가슴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 와중에 여전히 윤지는 어디에도 눈길도 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했는 지 그릇만 내려보고 있었다. 

민철은 눈이 자꾸 민아의 가슴 쪽을 향했다. 

[흠흠… 난 화장실 좀……]

민철은 화장실로 피신했다. 

잠시 후 민아도 먼저 일이 있다고 일어섰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민아가 하이힐 소리를 또각거리며 나가자 돌연히 윤지와 철근 둘만이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윤지는 눈을 내려 깔고 남편이 빨리 돌아오길 바랬다.

그동안 윤지는 그날 이후 철근의 끈질긴 전화와 메시지를 받았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아예 그날의 기억을 지우려 노력했다. 간혹 떠오르는 기억을 애써 무시하며 지냈고 그렇게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철근과 마주친 순간까지도 그 기억의 봉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를 보면서도 담담한 자신에 놀라며 안도했다. 이렇게 마음 단단히 먹고 내 자리로 돌아가리라. 

그 때 말 없이 밥을 먹던 철근이 갑자기 윤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윤지씨!]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의 몸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고. 

크고 억센 그 손이 자신의 손을 부여 잡자 그 거칠고 강한 느낌이 손을 통해 전달되었고 윤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고 온 몸이 짜릿한 것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윤지씨… 힘드시죠.]

철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윤지에게 또다른 반전이었다. 

[네…네? 무..무슨….]

자신을 유혹할 줄 알았던 철근이 수영장에서 시술에만 집중하던 얼굴로 돌아가 걱정스레 말을 걸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그것만큼 힘든 게 없습니다. 무슨 뜻인 줄 알아들으실 거에요.]

[철근씨 그날 일은 제 실수 였어요. 죄송해요. 잊어주세요.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윤지가 서둘러 힘주어 말했다.

[당연하죠. 실수였을 겁니다. 제 잘못이 큽니다. 그리고 실수가 아니었다 해도 잊는 게 이미 남편도 있는 유부녀인 윤지씨를 위해 없던 일로 하는 게 서로 맞지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윤지는 그 일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할 줄 알았던 철근의 태도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약간 드는 걸 억눌렀다. 

[왜…… 제가 설마 그런 일로 윤지씨 어떻게 하려는 못된 마음 먹었나 의심한 건 아니시죠. 뭐 여자들은 그런 거 약간 기대하기도 한다던데. 하하 농담입니다. 어쨌든 그 날 일은 제 잘못이니 윤지씨야 말로 잊으시죠. 전 없던 일로 한 지 오래입니다.]

그 동안의 속마음이 들킨 윤지가 당황해서 아니라고 강하게 둘러댔다. 그 동안 철근을 오해했다는 생각에 미운 감정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뺨까지 때릴 것 까지야. 저 덕분에 공연한 거 잊으신 건 아니죠?]

[아……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공연은 정말 감사합니다.]

철근이 아직도 뺨이 얼얼한지 자신의 뺨을 만지며 말하자 윤지는 이제 자신이 너무 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동조한 면이 있었기에 전적으로 철근 탓도 아니었고 공연장에 다시 섰던 것은 너무도 행복했다.

철근은 윤지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윤지씨. 하지만 윤지씨한테 제가 필요한 일 있음 언제든 부르세요.]

[네에..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빈말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뭔가 안 될 때에는 쌓아 놓아봤자 해결될 건 없어요. 마음에 병 나면 그 끝은 없습니다.

여기 명함……]

윤지에게 건네진 명함은 철근의 병원 정신과 의사의 것이었다. 

[이런 것 드렸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일단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사실 전 와이프와 사이가 안 좋습니다. 애들하고도 그렇구요. 그래서 밖으로 돌았지만 공허하더군요. 열심히 일만 하는 기계 같고 내 존재감은 집에 없고. 그러다 그게 점점 커지면서 힘들더군요. 이 친구한테 술 마시며 이 얘기를 털어놓았는데 다음날 진료실로 부르더니 이런 저런 말 해주더라구요. 그 이후 정말 전 새사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윤지씨 그날 공연장에 서서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지금 말하기에는 좀 그런 일도 있었고. 그건 저역시 실수 주부들에게 흔히 있는 어려움입니다. 힘들 때 한 번 가보세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제가 말해놓을 테니 알아서 해줄거에요. 비밀 보장이야 철저하구요.]

윤지는 ‘그런 일’ 이란 말에 다시 흠칫 놀라며 철근을 바라보았다. 

철근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윤지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윤지는 그 까칠한 그의 손이 주는 느낌에 잊고 싶었던 일이 생생히 떠오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늘름한 그의 어깨에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수영장에서 보았던, 그리고 청소함에 갇혀 온 몸으로 느꼈던 그의 근육이 보였다. 그리고 마주치는 눈빛 속에서 그의 야성이 느껴졌다. 

한 마리 강인한 수컷의 힘이 떠올랐다.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고 순간 그에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황당한 자신의 생각에 놀라 윤지는 황급히 손을 빼었고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저으며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연거푸 찬 물에 세수를 해서야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았다. 그러나 비로소 자신의 아래가 젖어있음을 깨달았다. 

[아……여기가 왜……]

황급히 치마 아래로 벗어본 팬티가 축축히 젖어있었다. 오히려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로해주고 걱정해주며 잊자고 말해주었건만 자신은 겨우 그의 손에 그날 일을 떠올리며 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철근은 이미 잊은 듯싶건만 그 지난 며칠 동안 그녀 자신은 그날 일을 간혹 떠올리며 온 몸을 휘감는 열기에 놀라 찬 물에 몸을 담그며 열기를 식혀야 했다. 

부끄러웠고 자신만 마치 발정난 년 같이 느껴졌다. 

윤지는 남편이 떠올랐다. 

한없이 자신만을 위해 애쓰고 사랑하는 남편 민철의 선한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변기에 주저 앉아 젖어 있는 자신의 속옷을 잡고 큰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자기 미안해. 오빠 내가 나쁜 년이야.]

윤지는 이를 깨물었다. 눈물을 쓱쓱 닦은 뒤 일어서며 결심했다.

나가서 남편에게 솔직히 말하기로.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구하기로.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자신의 마음과 몸이 어땠는 지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남편의 처분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그것만이 부부 사이에 작은 비밀로 벌어지고 있는 자신의 부정함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아내와 철근의 와이프는 자리에 없었다.

철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 네 와이프 화장실 갔다. 나 먼저 갈 테니 데꾸 집에 잘 가라]

[뭔 일 있었어?]

나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철근을 보며 초조해졌다. 철근이 가고 아내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심각한 표정의 아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자기…. 나 할 말 있는데…]

[어… 그래? 일단 집에 가자]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창백한 아내를 일단 집에 데려가야겠다.

아내와 아파트 앞에 도착하였다. 

[까악!!!]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났다. 

[우둥탕..]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 하나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101호 여자였다. 평소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다니던 아주머니. 그녀에 대한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야이 썅년아!!! 어디서 좃질이야!!! 이런 쌍년을 확!!!]

101호 남자가 뛰어내려오더니 바닥에 쓰러져있는 부인의 뺨을 후드려 갈겼다. 며칠 전 와이프 생일이라면서 케익과 꽃을 사가지고 집에 가던 그가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어 겨우 뜯어말렸다. 나도 말려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 여자가 불쌍했지만 며칠 전 남자의 애쓰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씁쓸했다. 

[에이… 미친 년….]

나도 모르게 중얼 거리고 고개를 돌리자 아예 사색이 된 아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아내를 부축하다시피 해서 들어갔지만 아내는 나에게 할 말이란 걸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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