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112. 신예원의 고백 =========================================================================
정수는 촬영장에 도착해서 신예원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 있어?"
"주차장. 방금 도착했어."
"기다려. 금방 갈께."
그는 차 밖에 서서 신예원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제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도 촬영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주차장에도 차들이 계속 들어오고 나간다. 그런데 이것은 정수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이제 그가 여기에 왔었다는 말이 안명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야! 한정수!"
저 앞에서 신예원이 사람들과 같이 이쪽으로 오다가 정수를 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온다. 한 쪽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로 가서 가방을 받아서 들었는데, 제법 꽤 묵직하다. 하루 밤 사이에 신예원이 야윈 것도 아닐 텐데 초췌한 얼굴이다.
"엄마가 안계셔서 너무 부실하게 먹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고 했잖아."
"그럼 오늘 촬영은 다 했어?"
"응. 이제 이틀 정도는 여기에 안 와도 돼. 출발하자."
그의 차는 세트장을 천천히 빠져 나왔다. 신예원은 길 안내를 한다. 한강변으로 나가서 서울 쪽으로 달리다가 신예원은 식당을 가리켰다. 차를 주차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신예원은 창가로 자리를 잡고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신예원은 떡칠을 한 화장을 지운다면서 팩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창 밖으로 겨울 초저녁이 보인다. 도로도 한강도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뻔 했지만, 노란 불빛은 그 어둠을 조금은 밀어낸다.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은 춥고 어두운 겨울 밤을 가르고 서두른다. 신예원도 자리로 돌아오고, 스테이크와 샐러드가 나왔다.
신예원은 스테이크를 썰어서 한 조각 입에 넣고 입을 오물거리면서 씹는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별 것 아니야."
"내가 많이 부담스럽니?"
"약간. 많이는 말고."
"나도 나름대로 힘들게 내린 결정이야."
"너 .. 많이 힘들텐데 .."
"힘들어도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 내가 책임 져야지.
그런 걱정 하지 말고 와인 한 모금 하자.
잔을 드시오!"
"야아. 나까지 마시면 운전은 어쩌라고?"
"여기서 우리 집 멀지 않아.
대리운전 있잖아?"
두 사람은 와인 잔을 들어 건배한다. 신예원의 빨간 입술은 와인 잔을 문다. 빨간 와인이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간다.
신예원은 후식으로 나오는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깨끗이 먹어 치웠다. 신예원 앞에는 빈 접시밖에 없다. 그제서야 만족한 듯이 의자에 기대앉아서 와인 잔을 든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배가 엄청 고팠구나."
"하루 종일 김밥 한 줄 먹고 버텼어."
"저런."
"허구헌날 이러고 살아도 앞이 안 보인다."
"아직이야. 학교 졸업하면 뭐가 달라져도 달라지겠지."
"글쎄? .. 그게 그럴까?
예대 들어가면 내 인생이 바뀔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
졸업한다고 별 수 있을까?"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서 신예원의 집으로 갔다. 정수는 소파에 앉고, 신예원은 탁자에 와인을 가져오고 TV를 켜준다.
"미안한데, 잠시 TV 보면서 기다릴래?
나 지금 당장 씻어야 하거든요.
새벽부터 설쳐댔더니 온 몸이 근지러워 미치겠다."
"알았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마."
그는 채널을 드라마에 고정시키고 또 삽입된 음악과 장면의 몰입도와의 관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명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뭐야? 과천에 간다고?'
'수지 누나 따돌리느라고 거짓말 했어요.'
'지금 어디서 뭐 하는데?'
'솔직하게 할까? 아니면 거짓말 할까?'
'맘대로.'
'촬영장에서 신예원 데리고 나왔어요.'
'흥! 진짜 엄청 밉네.'
신예원이 욕실에서 목욕가운 차림으로 나와서 정수에게로 왔다. 머리와 얼굴이 온통 촉촉하다. 저런 리얼한 모습이 두고 보기에 아까울 정도이다.
"너무 춥다. 머리만 빨리 말리고 나올께."
한참 후에 신예원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왔다. 붉은색과 초록색 그리고 하늘색으로 된 굵직한 양초를 접시 위에 세우고 불을 붙인다. 그리고 거실에는 불을 꺼버렸다. 정수는 신예원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신예원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의 잔에 와인을 따르고 귤을 가져와서 껍질을 벗긴다. 귤조각 하나를 정수의 입에 넣어준다.
"피곤하지?"
"그렇지 뭐. 그래도 너랑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엄청 좋네.
안 그러면 지금 이 방에 나 혼자 있었을텐데."
"밖에 나가서 놀면 되잖아?"
"어제 밤에 너 가고 나서 잠이 든 것이 12시 넘어서야.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서 촬영장 갈 준비해서 일곱시에 나갔어.
집에 돈다고 왔는데, 지금이 아홉시야.
이런 내가 무슨 슈퍼걸 원더걸도 아니고,
무슨 에너지가 남아있다고 밖에 나다니겠어?
지금은 조용하게 누구랑 같이 있으면서 ... 나한테 힐링이 필요해."
"이해해."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들이대는지 생각해봤어?"
"아니. 내가 좋으니까?"
"잘 생긴 남자들은 이렇다니까.
여자가 왜 자기를 좋아하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하하."
"듣고 보니까 궁금해지네."
"내가 발정난 암캐처럼 남자를 찾아서 길길이 날뛰다가 너를 찾아냈다고 생각해?
"글쎄.. 내가 그걸 알 수가 있나?"
"내가 이 몸으로 나이트에 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상상이 가니?
내가 이런 말 하면, 미친 공주병에라도 걸린 것 같아?"
"길 수도, 아닐 수도 ..
그런데 너 나한테 이런 얘기를 왜 하는데?"
"예를 들면 오늘처럼 촬영이 끝났잖아?
그럼 나는 다시 혼자가 되고, 내 마음에는 빈 자리가 있는거야.
채워지지 않은 그 빈자리가 싫어."
"일이 끝나면 혼자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래. 그래서 너도 비밀 연애라는 것을 하고 있잖아?
누군가가 나를 기다렸다가 차에 태우고 온다는 것,
또 같이 밥먹고, 지금처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정수라서 더 좋고."
"그럼 한마디로 내가 심심풀이네? 하하."
"분위기 잡고 얘기하는데, 꼭 이렇게 개차반을 내야 속이 시원하니?
나랑 같이 있어주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힐링이 될만한 남자.
나한테는 그게 바로 너라고."
"예원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또 뭔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무서우려고 해."
"내가 .. 여자 관계가 복잡한 것은 알고 있지?"
"아니. 전혀 모르는데?"
"몰랐으면 이제부터 알아두세요."
"정리 안할꺼야?"
"이게 그냥 단순하게 사귀고 만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럼? 너도 스폰 받니? 섹스해주고 돈 받아?"
"아냐. 그런 것은 없어.
그래도 하여간에 복잡해."
"그럼 그렇게 주욱 살을꺼니?"
"당분간은 조심하지만 어쩔 수 없어."
"하긴, 나도 이러는데, 다른 여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이해해줘서 고맙다."
"내가 늦게 타서 차가 만원이면 어쩔 수 없지.
그 사람들 언젠가는 차에서 내리겠지?
만일 사고가 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들 내리겠지만, 그럼 나도 같이 내려야 하잖아?"
"그러니까 아예 만원인 차는 타지 말라고."
"바보야. 내 목적지로 가는 차가 그 한 대 뿐이면, 어쩔 수 없이 타야 해.
배고픈데 먹을 것이 그것 하나뿐이면, 싫어도 먹어야 해.
좋아서 어떻게 하고, 싫으면 이렇게 할 선택의 여지가 나한테 없잖아?"
"내가 그렇게 선발 됐다니 .. 네 필요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거야?"
"내 말을 오해하지 마.
내가 하루를 피곤하게 살았다. 그래서 나한테 힐링이 필요하다.
씨X .. 이게 아니거든."
신예원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고, 신예원의 두 눈이 젖는다.
신예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어깨가 흔들린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 미안해. .. 놀랐지?"
"아니야. . 예원이가 많이 힘드나봐."
"이런 말을 너에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곤란하면 하지 마."
"아냐. 할래. 너도 알 것은 알아야 해.
그 대신에 나 욕하지 마."
"알았어."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사극이잖아?
얼마 전에 왕의 후궁으로 승격됐거든.
밤에는 왕이 오면 술잔을 따라주고, 말을 시키고, 약간 교태를 부린단 말이야."
"그게 왜?"
"더 들어봐.
분명 대본에는 왕이 저고리를 벗기는 것으로 나오거든.
그래서 나도 이 역을 맡기로 한거고.
그런데 막상 촬영 현장에서는 그게 아냐.
PD나 감독은 작가를 불러서 대본을 수정시켜.
그러면 치마까지 벗게 하고, 가슴을 만지게 바뀌는 거야."
"이러언. .. 완전 어이없네."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해?
꾹 참고 그냥 해?
아니면 지금까지 주욱 해온 것이 있는데, 여기서 거절해야 해?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서 짤리고, 내 역은 다른 년이 와서 계속하겠지.
벗으라면 훌훌 다 벗고,
벌리라면 좌악 벌리고,
넣는다면 물 줄줄 흘리고 핵핵거리는 년."
"야아. 사극이 에로냐?"
"주연이나 조연급들은 이렇게 시나리오가 바뀌면 출연료가 엄청 뛰거든.
우리한테는 그런 것도 없어.
하기 싫으면 가라 이거야."
"이건 .. 촬영을 껀수로 잡아서 하는 성추행이잖아?"
"만지는 것도, 그냥 쓱 만지고 마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만지고,
저렇게 만지고,
NG 났다고 다시 하고,
이쪽에서 찍고,
저쪽에서 찍고 ..
이렇게 두 시간이 넘도록 주물탕을 해.
그리고 나서 막상 드라마에 나오는 것은?
없어.
안 나와.
나오면 한 5초 정도?
그렇지 않으면 영상처리를 해서 꼭지가 잘 안보이게 하든가.
아니면 아래에서 자르든가.
아하아. .. 씨X. .. X 같다고."
"......"
"이러고 나서 내가 저녁에 집에 오면 ..
나 어떨 것 같아?
밤에 잠이 올 것 같아?
상상이 가니?"
"......"
"나. .. 더러운 년이지?"
"한심하네.
이거 어떻게 위로 알리면 안되나?"
"씨X.
그럼 나는 이 드라마 끝나고 나면 그것으로 땡이지.
이 분야에 있는 감독, PD들한테 찍히면 은퇴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참나. ... "
"그럼 이게 어디 나만 그러니?
여배우 다 똑같아.
위로 올라갈수록 더 해.
걔네들은 더 비싸고, 더 기도 안차.
가수들은 이런 거 잘 모르지?"
"나도 알만큼은 알아."
"개비시 방송국 홍PD.
그 개새X는 저랑 안자면 아예 캐스팅을 안해."
"그 사람 짤렸지 않나?"
"짤렸으면 뭐해?
그 다음 놈은 안그럴 것 같아?"
"......"
"정수야. 내가 너한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께.
내가 필요할 때, 항상은 아니더라도 내 옆에 있어줄래?"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거야?"
"나. .. 너에 대해 뒷조사 쫌 했어.
미애 시켜서 경식이한테서도 듣고.
네가 윤희, 미라 이런애들한테 하는 것도 들었어.
또 너 소극장 하는 것도 내가 뻔히 보고 있거든.
정신 삐딱하게 글른 사람 같으면 그런 것 하겠어?
나.. 나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남자.
너로 정할꺼야."
신예원은 정수의 목에 팔을 두른다.
두 사람의 입은 서로의 입술을 빨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