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95. 자기 인맥에는 왜 항상 여자들만 들끓어? 남자는 인맥에 포함 안시켜? =========================================================================
정수는 윤경식과 함께 학교를 출발했다. 그런데 윤경식이 자기 차에 정수를 태우고 갔다.
"너, 아무래도 도망칠 것 같아. 하하"
"딱 걸렸네. 하하"
그들이 옐로우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둘이 커피 한잔씩 놓고 생각에 잠긴다. 윤경식은 오늘의 파트너에 대해서 누가 걸릴지를 궁금해한다. 시작하기 전에 궁금해 하는 이것이 바로 미팅의 재미가 아닐까? 막상 파트너가 정해지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정수는 방금 전에 학교 연습실에서 경식이와 했던 랩이 엄청 마음에 들었다.
"경식아, 발라드랑 랩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해볼 수는 없을까?"
"글쎄. .. 내 상식으로는 그건 아니라고 봄."
"아닌 것은 맞지만, 그래도 ..."
"이건 뭐. .. 엉뚱해도 너무 엉뚱하잖아?"
"이번 여름에 함 해보자."
"아무래도 미친 짓 같은데."
"우리가 해내기만 하면 세계 최초라는 사실. 하하"
"너도 세계최초병에 걸렸니?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도 부러워? 하하"
여자애들 3명이 들어온다. 경식이가 정수에게 그녀들을 한명씩 소개해서 인사를 했다. 여자애들이 한마디씩 말했다.
"일찍 온 보람이 있네."
"너 지난 겨울에 김익환 감독이랑 뮤지컬 했지?"
"생각보다 잘 빠졌구만."
이제 나머지 학생들이 모두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10명이 되었다. 양쪽 대표들이 소개를 해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신예원이 한마디 했다.
"한정수가 너네 간판이라며? 우리 간판은 나야. 그럼 간판끼리 미리 빠져주면 어떨까?"
그러자 남학생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럼 그게 미팅이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선택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해."
"나중에 너네끼리 약속해서 따로 만나면 되거든."
"꼭 저렇게 티를 내야 속이 시원하냐?
"그럴 껄 뭐하러 왔냐? 걍 밖에서 따로 만나지."
그렇지만 여학생들은 모두 찬성했다.
"눈꼴신 애들 미리 빼버려."
"그래야 우리도 빛을 좀 보는 것 아니야?"
"맞아. 애당초에 얘네들 없이 시작했어야 했는데."
결국 남녀 대표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남학생 대표가 이겼다.
신예원이 말한 것은 없던 것으로 하게 된다.
가위바위보를 또 한번 했다.
이기는 쪽이 간택하기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학생 대표가 이겼다.
따라서 여학생들이 남학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대표들이 미리 준비해온 남학생들의 네임카드를 확인해서 야구모자 안에 넣고 뒤섞었다. 여학생들이 한장씩을 뽑는 것이다.
"이상하다. .. 왜 거꾸로 하지?"
"요새는 여자들이 남자를 간택하는 시대야. 몰랐니? 하하."
남녀 모두의 관심은 신예원이 누구를 뽑았는가에 쏠려있다.
그런데 신예원은 윤경식을 뽑았다.
정수는 윤경식의 얼굴에 잠시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신예원의 옆자리가 비워지고 윤경식이 건너간다.
그 다음은 계속해서 짝이 맞추어졌고 자리 이동이 있었다.
불평 불만이 태산같이 터져나온다.
"야아아! .. 하필이면 왜 너니?"
"이럴 줄 알면서도 나온 내가 바보지."
"다음부터 나한테 미팅 얘기만 꺼내봐. 콱 없애버리겠어."
정수는 맨 마지막에 이미애의 손에서 나왔다.
정수는 윤경식을 보았다.
그가 두 손으로 정수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만들었다.
아마도 이미애가 경식이가 마음에 든다는 애인 것 같다.
정수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래도 정수도 이미애랑 합석을 했다.
이미애가 정수에게 물었다.
"왜 인상이 그 모양이야? 내가 마음에 안든다 이거야?"
"아냐. 들어. 나야 영광이지."
"그런데 너 자꾸 예원이 쳐다보잖아?"
"아니야. 경식이 쳐다본거야."
"얼씨구. 아직 대낮이구만 거짓말까지? 바른대로 말 안해?"
"알았어. 알았어. 그럼 예원이 쳐다봤다고 해. .. 참나."
"자. 그럼 내가 너를 간택했으니까, 너는 짐의 수청을 들라. 하하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리하여 우리는 이만 침소로 들까 하노라. 다들 잘 놀고 와!"
이미애는 정수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들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본다. 그러나 이미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유유히 옐로우를 빠져나갔다.
"한정수. 너 차 없어?"
"내 차는 학교에 있고, 여기 오면서 경식이 차로 같이 왔는데."
"이러언. .. 진상."
정수는 태어나서 이런 험악스런 애는 처음인 것 같다. 진상이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듣는다.
이미애는 자기 차로 정수를 데려갔다.
"타."
"어디 갈껀데?"
"음. .. 미사리나 갔다오자."
"거기는 또 왜?"
"거기 꼰대들 오는 라이브카페 있다며? 거기 가서 네가 노래 한 곡 땡겨."
"그럴까? .. 그런데 내가 꼰대냐? .. 그러지 말고 차라리 ..."
"차라리 뭐?"
"신촌에 가서 영화나 한편 보고.."
"컴컴한데서 손붙잡고 가슴만지고 하려고?"
"절대 안함. 약속."
"좋아. 그럼 영화로 하자."
"그런데 ..."
"또 뭐야?"
"너 혹시 신예원 파트너 마음에 안들어?"
"너네 대표 윤경식? 왜?"
"경식이가 너를 그렇게 원했는데."
"그래서 네가 경식이를 쳐다봤다는 얘기였니?"
"그래. 내가 신예원을 쳐다봐서 뭐하게? 우리는 방송국에서도 만나거든요."
"고민되네."
"네가 나랑 뭐 어떻게 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
"뭐라는거야? 우리 사귈껀데?"
"야아아. 건전한 미팅 문화를 망가뜨리면 어떻해?"
"그렇게 해서 너는 예원이가 원하니까 그리로 가고, 경식이가 나를 원하니까 ... 흐으음."
"나름 좋은 생각 같은데? .. 사귈때 사귀더라도 오늘은 일단 그렇게 가보자."
"그래? .. 잠시만 대기!"
이미애는 신예원에게 전화를 해서 둘을 불러냈다. 영문도 모르고 신예원의 뒤를 따라 나오는 윤경식이 엄청 딱해 보인다. 이미애가 신예원에게 한마디 했다.
"야, 신예원! 나랑 체인징 파트너. 어때?"
"와아아. 완전 대박이네. 왜 그래? 한정수한테 뭐가 맘에 안들어서 그러는데?"
"그게 아니고. 경식이가 나를 열열히 사모한다는데. 이 누나가 그 말을 안들었으면 몰라도, 들었으니까 구제의 손을 뻗어줘야지. 안그래? 하하하"
"진짜 열받네. 너는 너를 열열히 사모하는 남자랑 나가면, 나도 나를 열열히 사모하는 남자랑 나가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가 함 볼래? .. 야. 한정수! 너 나 열열히 사모해? 하하하. 말하고 보니까 엄청 웃기네."
경식이의 기도하는 손이 또 정수에게 향한다.
"알았어. 까이꺼 열열히 사모 하면 되는 것 아냐? 할께."
"이 진상, 말하는 것 봐라. .. 진짜, 어이없네."
"하겠다는데 왜 난리야?"
"시끄러워! 나 신예원이 이 자리에 기껏 이미애 둘러리로 온거야?"
"영광으로 알아라."
정수는 진상이라는 말을 또 한번 들었다.
결국 신예원이 양보했다.
경식이가 이미애랑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수에게 차가 없다.
신예원도 엄마가 태워와서 내려주고 가는 바람에 차가 없다.
"이 진상. 날더러 어쩌라고?"
정수는 본의 아니게 신예원의 짜증본능을 자극해버린 것이다.
이미애가 해결사로 나섰다.
"정수는 신촌 가서 영화 보겠대. 우리가 너네 둘 신촌에 떨어뜨리고 갈께."
"누구네는 차가 두대, 누구네는 한대도 없거든. .. 야, 한정수, 반성해!"
정수는 경식이 차에, 신예원은 이미애의 차에 탔다. 두 대의 차가 출발했다.
신예원과 한정수는 신촌에서 만났다. 예원이나 정수 모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영화를 고른다면서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신예원이 정수에게 영화 선택권은 자기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예원이 표를 사고, 정수가 팝콘과 콜라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신예원의 결론은, 자기는 볼만한 영화는 이미 다 봤으니까, 볼 영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카페로 갔다. 정수는 아이스크림 두개를, 신예원은 커피 두잔을 사기로 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어딘가에 마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신예원이 정수에게 물었다.
"너는 파트너에 관심도 없으면서 오늘 왜 나왔어?"
"경식이가 간판하라고 미는 바람에... 너도 마찬가지라며?"
"나는 말은 그렇게 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온다니까 나왔지."
"나? 나를 어쩌게?"
"우리 사귀자."
"어떻게 사귀는데?"
"얘가 왜 이래? 남자 여자 어떻게 사귀나 몰라서 물어?"
"둘이 만나서 영화 한편 보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사귀면 참 좋겠다. .. 하하"
"아마 뮤직쇼 보러 같이 가기도 힘들껄? 하하하"
"그런데 너는 왜 나랑 사귀자는 말을 해?"
"남들 다 있는 것이 나한테는 없으니까. 하나 있으면 어떨까 싶어서."
"골치아플껄. 찌라시에나 오르내리고 .."
"맞네."
"그래도 앞으로 보면 아는 척이나 하자."
"그래. 사귀지는 않더라도 사귀는 것처럼 하기."
"그건 또 뭐하는 건데?"
"서로 필요할 때 부르면 나타나주기."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어쩌고?"
"죽음이지. 나 신예원이 부르는데, 한정수가 딴 소리 하면 내가 살려둘 것 같아?"
"에이. .. 그건 쫌. .."
"이건 .. 뭐. .. 이 좋은 나이에 연애를 제대로 할 수가 있나. .. 참. .. 한심스럽다."
"그래도 너 요새 제법 잘 나간다며?"
"잘나가? 주연도 조연도 아닌데, 잘나가긴 뭐가 잘나가냐?"
"그렇게 시작 하는 거죠. 앞으로 더 잘 되지 않겠어?"
"말이라도 고맙다. 그니까. 우리 사귀는 것 처럼 하기. .. 할꺼야, 말꺼야?"
"목숨 걸고는 못하죠."
"그건 농담이고. 시간 되는 대로라도."
"조건. 블도저처럼 밀어붙이기 없기."
"콜."
"이래도 찌라시에는 뜰텐데."
"뜨라고 해. 난 겁 안나. 우리가 뭐 나쁜 짓이라도 하냐?"
"하긴. .."
정수는 신예원과 합의했다. 둘이는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사귀는 것처럼 하면서 필요할 때에는 부르고 나타나기로 하기로 한다. 그 대신에 상대방의 일정은 최대한 존중하기로 한다.
정수는 이렇게 해서 신예원의 말을 들어주지만, 그녀가 부를 때에는 정수가 자신의 바쁜 일정을 앞세우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신예원이라고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짜 남친아."
"어?"
"엄청 배고프다. 이제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자."
"어디로 가지? 차도 없고 ..."
"어딜? .. 여기서 너네 학교 가깝잖아?"
"알았어."
정수는 신예원과 함께 택시로 학교에 간 후에 정수의 차에 탔다. 이들은 다시 옐로우로 가서 저녁을 먹고, 정수는 신예원을 그녀의 집 앞에 내려준다.
“미팅 참 더럽게 했네. 안그래? 하하하”
“더러운 것은 아니고 이상하게 한 것 같아. 하하하
그가 집에 왔을 때 안명수는 아직도 TV 앞에서 졸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정수는 식탁에 앉아서 안명수가 따라주는 맥주를 마신다. 안명수가 조용히 그를 바라본다. 정수는 안명수가 조용하니까 갑자기 무서워진다.
"남편은 보고하시오."
"무슨 보고?"
"미팅보고."
"누나, 궁금해? 하하"
"야아아. 남편이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고 왔는데 궁금해하지 않을 마누라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얘기가 엄청 길거든."
"밤샘하고 내일 월차내자. 하하하"
정수는 윤경식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체인징 파트너, 차가 없었던 얘기, 신예원과 합의한 사실 등등.. 이번 미팅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다 했다. 끝까지 듣고 있던 안명수가 물었다.
"사귀지는 않지만 사귀는 것처럼 하는 사이를 이제 어쩔꺼야?"
"글쎄. 나도 너무 황당해서 .."
"그런 일이 생기면 왜 단호하게 자르지 못하냐? 여자가 그렇게도 궁해?"
"에이. 설마. .. 나도 이리저리 인맥을 쌓아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러죠."
"소극장 때문에?"
"그것도 그렇고 ... 앞날은 모르잖아요?"
"맞아. 내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인맥이 없다는 거야. 그것은 내 성격상 어쩔 수 없나봐. 자기라도 그런 것을 잘 하면 좋지. 그런데 문제가 딱 한가지 있어."
"무슨 문제?"
"자기 인맥에는 왜 항상 여자들만 들끓어? 남자는 인맥에 포함 안시키는 거야?"
"윤경식이 남자야. .. 난 랩이랑 발라드를 어떻게 맞춰볼 수 없을까 하고 .."
"핑계는 좋아요. .. 참나."
"핑계인가 아닌가는 나중에 보면 알죠."
"맞아.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안무섭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