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92 91. 내가 부탁할께. 원한다면 너랑 잠자리에도 갈께. (92/116)

00092  91. 내가 부탁할께. 원한다면 너랑 잠자리에도 갈께.  =========================================================================

오후 수업을 모두 마친 정수는 지금 나가서 아반떼녀를 만나야 할지를 망설였다. 그는 1층의 입구에 있는 매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종이컵에 담아서 들고 건물을 빠져 나온다. 그 때 윤경식이 정수를 뒤에서 불렀다.

"다음 주 목요일에 미팅 어쩔래?"

"뭐야아. 미팅은 무슨 미팅? 난 전혀 모르는데?"

"게시판에 붙여놨는데, 몰랐다고? 정화예대 연극영화과 여자애들이랑 5 : 5 야."

"아휴. .. 내가 살떨리게 거기를 어떻게 가냐?"

"걔네들 콧대 진짜 엄청 도도해. 그거 꼬시느라고 너를 간판으로 밀었거든?"

"너네들 정말 딱하다. 날더러 어쩌라고?"

"어쩌긴? 한정수 네가 나와야지. 너, 신예원 알지? 이번에 LBS 주말 드라마에서 뭐 하나 맡나봐.  신예원이 그쪽 간판이던데, 걔가 너 꼭 나오래."

"신예원 아니라도, 내가 갈 수 있다면 가야 할 것 같은데 .."

정수는 윤경식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주차장 쪽으로 걸어나오 있었다. 다른 애들은 벌써 모두 다 빠져나가고 이들 둘이 마지막이다.

윤경식은 정수와 입학동기이고 지금 2학년이다. 그는 M7 오디션에 나갔는데, 초반에 미끄러졌다. 그런데 그는 실용음악과의 뉴스메이커이다. 항상 뭔가 사건을 만들고 다닌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팅이란다. 

정수는 실용음악과 1학년 중에서도 복학생이다,. 그는 지금 신입생인 1학년들과는 서먹서먹하다. 신입생 OT에도 가지 않았고, 다른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학동기들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윤경식 같은 2학년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는 편이다. 

정수는 윤경식과 작년에 입학하면서 바로 교내그룹을 만들었다. 교내그룹이란 주로 과제를 같이하는 정도이지만, 과제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에 주욱 같이 있으므로 엄청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런데 윤경식은 나중에 랩으로 빠지면서 정수와의 교내그룹은 해체된다. 

정수도 랩을 어쩌다 한번씩 하기는 하지만, 그 때에 그는 이미 방향을 작곡과 발라드, 록 그리고 재즈로 굳히고 있었다. 윤경식은 정수의 음악이 마음에 들어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정수가 하는 방식이 너무 고지식하다면서,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정수에게 랩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윤경식은 정수에게 랩을 같이 하자고 엄청 권했었다. 그렇지만 정수는 랩을 자기 전공에서 삭제해버렸고, 윤경식과의 교내그룹은 결별을 선언했다. 

지금도 윤경식과는 엄청 친하다. 윤경식은 정수에게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정수를 간판으로 밀고 미팅을 주선한 모양이다. 더구나 정화예대 연영과라면 정수도 호감이 가기도 했다.저쪽 간판 신예원은 연기는 엄청 몰입해서 잘하는 편인데, 성깔이 고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다 방송국에서 둘이 마주치면 인사는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있다.

"일정 때문에 목요일에 불가능하다면, 우리 쪽에서 날짜를 늦출 수도 있는데.."

"주말 지나고 다시 얘기해보자. 이번 CF 때문에 요새는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

"아휴.. CF 그거 하루 종일 찍어도 겨우 몇 초 건지던데."

"나는 그런 중노동을 하는데, 지금 날더러 미팅 어쩌고 하는 너네들이 진심 부럽다."   

그들의 앞에 아반떼녀가 버티고 서서 그들 쪽을 보고 있다. 윤경식은 주위를 둘러보고, 그의 주변에 정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정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저 여자가 지금 너 기다리는 거야?"

"응."

"저 여자 누군 줄은 알지?  너 지금 누구를 만나는 줄 알고는 있겠지?"

"전혀 모르는데?"

"아휴. .."

"너 왜 그래? 뭔데? 저 여자 누군데?"

윤경식이 마지막에는 아반떼녀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난 바빠서 이만 간다. 너 정말 몸조심하고, 꼭 살아남아라. 이건 나 윤경식의 진심이야. 하하"

"뭐라는거야? 내가 죽기라도 한대?"

"CF 찍을 때는 다들 목숨 걸고 하던데? 하하"

그런데 그는 말을 돌리는 것 같다. 정수가 지금 촬영을 준비하는 CF 는 목숨을 걸 정도의 위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윤경식은 아반떼녀에게 간단히 목례만 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쳐서 자기 차 있는 곳으로 갔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두 분 서로 친하세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셨을까?"

"같은 과에 있으니까, 학과 내에서 있는 일들이죠. 그런데 이건 내 사생활 아닌가?"

"한정수씨에게 관심이 있다면, 한정수씨의 사생활에도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럼 혹시 지금 저를 스토킹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그럴 시간은 없는데,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할 수도 있죠. 내가 못한다면 다른 전문가들을 시킬 수도 있고. 하하"

"와아. 소름 돋네요. "

"걱정 마세요.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오늘은 나를 위해서 내실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죠?"

"글쎄요. 무슨 일이신지를 알면 .."

"고무줄이네. 그럼 지금 이후로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건 아니거든요."

"알았어요. 그럼 가실까요?"

"어디로 가는데요?"

"점심도 안드셨다던데, 우선은 저녁을 먹어야겠죠? 방향을 일단 강남 선능역으로 잡고 그리로 가요. 아니면 제 차로 저랑 함께 가시든가."

"내일 아침 때문에 안되는데요."

"이따가 여기까지 모셔다 드릴테니까 걱정 말아요."

아반떼녀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정수는 아침밥도, 점심밥도 먹지 못했다. 그는 오후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토스트 두 쪽을 먹었을 뿐이다. 갑자기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백팩을 자기 차에 넣어두고 그녀의 차에 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그는 야구모자의 챙을 눌러썼다. 그녀의 차 안에는 봄냄새처럼 향긋한 냄새가 가득하다. 이것은 방향제에서 나는 냄새는 아닌 것 같고,  아반떼녀의 몸에서 나는 여인의 향기인 것 같다. 

그녀는 선릉역에서 뒷길로 접어든 후에 레스토랑 앞에 차를 주차했다. 그녀는 스테이크를 주문하면서 정수에게 동의를 구했다. 정수를 위해서는 와인도 같이 주문했다. 

"무슨 일로 저를 만나시는지 이제 말씀하시죠?"

"무슨 일은 궁금하고, 내가 누구인지는 몰라요?"

"글쎄요. 죄송합니다."

"서운하네."

"혹시 <비와 바람> 이라는 노래 알아요?"

"예?"

걸그룹 <화이트>는 8명인데, 그녀들의 나이는 모두 20대 초반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은 멤버 교체가 너무 잦아서 골탕을 먹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탑 텐에 들어가는 상위권의 걸그룹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계층에서는 돋보이는 걸그룹이다. 이들도 노래보다는 선정적인 안무에 치중한다고나 할까?

"그럼, 걸그룹 <화이트> ?"

"8명 중에서 누구 같아요?"

"리드보칼은 분명 아니고 .. 다른 분들은 이름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아. .. 할 수 없네. 모른다는데 어쩔꺼야?  윤수지예요."

"예에에? .. 수지 누나가 왜 저한테 ..?"

"당장 누나 소리가 저절로 나오네. 참나. .."  

"선배 누나를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선배는 무슨 선배? 누구인 줄도 몰랐으면서 .."

"그건 죄송하고. 수지누나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돼요."

"김미라 때문이야."

"그 미라씨가 무슨 ..?"

"난 화이트를 떠야 해.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벌써요?"

"화이트는 많아야 25 이거든. 그런데 난 지금 벌써 27이야. 지금까지는 내가 약간 동안이라서 화장발로 버텨왔는데, 이제 더는 안돼."

"솔로로 전향하시면 안되나요?"

"나도 내 노래 스타일이 있고, 내 음색이 따로 있거든. 그런데 화이트에서는 나를 죽이고, 화이트라는 성격에 맞춰서, 거기서 백그라운드 역할을 했어. 그러니까 거기서 내가 부른 노래들은 화이트의 노래였지 내 노래는 절대 아니었어. 그래서 화이트에서 나오면서 바로 솔로로 독립하려고 매니저랑 얘기해보니까, 그 기획사에서는 나를 솔로로는 밀어줄 수 없대. 쉬운 말로 전망이 없다 이거지. 그 사람들 생각에는 댄스그룹에 있던 여자가 솔로로 크게 된 일이 아직은 없잖아?"

"그럼 기획사를 옮기면 되지 않나요?"

"너는 기획사랑 하지 않고 혼자 하니까 모르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소속을 옮기려면 웬만한 실력이나 기반이 없으면 되는 일이 아니야. 실력 없이 어찌어찌 해서 들어가봤자, 곧 비참한 길을 걸어서 바닥으로 떨어지게 돼있어."

"음 .."

"나는 화이트 하면서 저 기획사에서만 3년 정도 있었어. 진짜 이런 저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거든. 그런데 미라 요게 문제야."

"미라는 수지누나랑 어떤 사이죠?"

"이모네 딸이야. 이종사촌인가? 이게 어려서부터 노래한다고 엄청 설치고 다녔거든.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하더니, 글쎄 들어간다고 들어간 것이 그 망할 인거야."

"그쪽 애들은 기획사에서도 아예 포기하는 것 같던데 .."

"그니까.  나한테 미리 물어보기라도 하든가, 아니면 여기저기 알아보기라도 했어야 하잖아. 이게 나한테는 말도 없이 저 혼자 대형사고를 친거야.  그럼 그 다음에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내가 내 입으로 말 안 해도 알겠지?"

"예."

"정윤희라는 애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미라 얘는 끝까지 독종 짓을 했대. 매니저가 가라고 보내는 곳에 안간거지. 처음에는 안간다고 말하고 안가고, 나중에는 알았다고 하고 안가고. 뭐 계속  이러다보니까 왕언니가 애들을 시켜서 미라를 공군거야."

"그러다가 두달을 버티고 결국은 나왔다구요?"

"내가 알고 난리를 쳤는데, 처음에는 이게 나를 외계인 취급하더니, 나중에는 별 수 없잖아? 내가 나와야 하니까, 화이트에 말해서 오디션을 보자고 했지. 그런데 화이트 매니저는 미라가 Girls 시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안된대. 화이트 애들은 당연히 안된다고 난리지. 화이트는 그야말로 천사의 마스크를 유지해야 하거든."

"음. 미라씨가 Girls 시대에 있었다는 말을 안했어야 하는데."

"말을 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어. 걔네들은 벌써 이 걸그룹 바닥에서는 걸레로 찍혀있거든."

"그 기획사도 이상하네. 그런 걸그룹을 왜 데리고 있죠?"

"처음에는 걔네 엄마가 돈으로 그 기획사에 떡칠을 했지. 나중에는 얘네들이 갈데 안갈데를 막 다녔고.  만일 그 소속사에서 얘네들 내보내면, 얘네들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그 동안 당한 것이 어디 한두번이었겠어? 그런 곳에 내보내려면 자기네들이 가르친다면서 먼저 간을 볼텐데 .."

"흐으음. .."

"미라는 애당초 첫 발을 잘 못 들여놓는 바람에 이 바닥에 아예 발을 부치지 못하게 된거지."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솔로를 할 생각을 하죠?"

"미라의 롤모델이 바로 정윤희거든. 미라 엄마는 내막도 잘 모르면서 나한테 허구헌날 전화질이고.." 

"무슨 전화를 해요?"

"날더거 글쎄 김미라를 정윤희처럼 만들라는 거야. 그니까 한정수를 구워삶아라 이거지."

"그런 전화 정도야 누나가 응해주지 않으면 되잖아요?"

"한정수씨.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면, 너도 하는 그런 간단한 생각을 내가 왜 안했겠니? 사실은 나한테도 아픈 과거가 있고, 그 일을 미라엄마가 나서서 해결해줬고, .. 뭐 그런 지랄 같은 일이 있어. 한마디로 내가 그 여자한테 약점을 콱 잡혀있어. 그 여자가 입만 벙긋하면 화이트고 블랙이고 난 끝장이야."

"음 ..  그렇다고 알 것을 다 아시는 수지누나가 나한테 나타나서 다짜고짜로 곡을 내놓으라고 하시면 어떻해요?"

"우선은 한정수가 나를 몰라볼 것이라는 생각을 내가 미처 못했지. 그 다음에는 미라랑 같이 한정수를 만났고, 내가 해야 할 얘기를 했고 또 거절 당하는 것까지 미라가 같이 전부 다 봤으니까, 나도 내 할 바는 했다는 것이잖아? 그럼 그 쪽에서도 포기를 해야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한정수!"

"예?"

"나랑 딜하자."

"무슨?"

"너는 미라한테 곡만 주고 끝내는거야."

"그게 될까요?"

"정윤희한테도 너는 곡만 주고 끝냈잖아?"

"음.. 그게 .. "

"너희 둘 사이에 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관심 밖의 일이야."

"누나, 그런 말이 아니라. .. 내가 내 곡을 줬으면, 연습하는 것도 봐줘야죠."

"그건 아직 미라나 나는 모르는 일로 하면 되지. 너는 그냥 정윤희에게 했던 것처럼 김미라에게도 곡을 열개 정도 주고, 어쩌나 두고 보는 거야."

"누나, 노래 열곡이 어디.."

"아아. 공짜는 없어. 나도 너한테 노래로 강도짓은 안하거든. 돈은 아마 충분하게 줄거야."

"돈도 돈이지만요. 김미라씨가 내 곡을 부른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있는 곡을 그냥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김미라씨에게 맞는 곡을 따로 만들어야 해요. 그러려면 김미라씨는 어떤 노래를 어떻게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인지를 내가 알아야 해요. 이런 정도는 누나도 아실 것 같은데?"

"그야 그렇겠지."

"그럼 10곡 만드는데 짧게 잡아도 일년 정도는 걸려요."

"그냥 있는 것 던져주면 안돼?"

"제가 만든 곡이 쓰레기인가요?  어떻게 아무데 나 막 던져요?"

"으음 .. 그럼 미라 노래를 녹음해서 달라고 할까?"

"그건 이론상 그렇고요. 제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 많은 곡들을 어떻게 들어요? 그럴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요새 노래가 발성 연습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

"정수야. 그래도 해보자. 내가 부탁할께. 원한다면 너랑 잠자리에도 갈께."

'누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 지금 화나려고 해요."

"미안해. 너도 나를 오해하지마. 내 말은 그만큼 지금 내가 절박하다는 뜻이야."

“협박이 심한가요?”

"나 이제 얼마 안남았어.  이 생활 한두해 한 것도 아닌데.  좋게 끝내고 싶어."

윤수지는 몇번아고 참았던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흐느끼기 시작한다. 수지의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보고 있는 정수의 마음이 움직인다. 그녀의 좁은 어깨가 흔들린다. 

"누나. 울지 마세요. 우리 같이 어떻게 해보기로 해요."

"어떻게?"

"미라씨 연습실은 있어요?"

"걔네 집 지하실에 빵빵하게 해놨지."

"그럼... 누나랑 제가 같이 시간을 내서 거기 가봅시다."

"어머머. 정말이야?"  

"제가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을 누나는 다 알고, 나에게 눈물을 보이는데, 제가 어떻게 끝까지 거절해요?"

"아아... 완전 감동이다. 가슴 떨리는 것 보여?"

"그건 안보이고, 누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들려요. 그 대신에 지금은 곤란해요." 

"뭐야아. 그러면?"

"제가 방학할 때 까지 기다리셔야 해요."

"두달 정도는 기다일 수 있을거야. 그건 괜찮아." 

두 사람은 개인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