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91 90. 여지껏 기다렸는데도 소용이 없다는 건가요? (91/116)

00091  90. 여지껏 기다렸는데도 소용이 없다는 건가요?  =========================================================================

정수는 예정했던 팬사인회를 예정대로 4월 17일 일요일에 랏데백화점 과천점에서 열었다. 시간은 오후 2시부터 7시까지이다. 백화점에서는 꾸준히 홍보를 해왔다. 백화점의 후원을 얻어서 앨범도 제작했다. CD 5000장을 백화점의 뮤직샵에 진열하고, 그가 사인회하는 장소에는 1000장을 쌓아두었다.

사인회는 이세영의 고집으로 6층의 세탁소 앞에있는 공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 곳에는 임시 무대가 마련되었다. 백화점에서는 질서유지를 위해서 사설경비업체를 통하여 경비용역 60명을 불러서 곳곳에 배치했다. 

그런데 사람들, 특히 10대의 중고등 학생들은 아침부터 백화점으로 몰려들었다. 비상계단과 통로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사인회장에는 안명수가 이동카메라를 든 LBS 예능국 기자들과 함께 와있다. 백화점 밖에도 줄은 길게 늘어서있다.

정수와 윤희가 세탁소로 가기 위해서  6층으로 올라가야하는데, 계단은 불가능하다. 에스컬레이터로는 6층 까지 갈 수는 있지만 그 다음에 통로를 걸을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면 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은 경비원들의 도움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고, 간신히 길도 만들어졌다.

이세영은 세탁소 안에 안명수와 기자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질서를 맡고있는 경비원들은 임신부, 장애인들을 앞자리로 데려온다. 이 점은 미리 예고된 사항이라서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사인회는 정수가 통키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정수의 옆자리에 앉은 윤희가 CD케이스를 열고 설명서를 꺼낸다. 그러면 정수는 그 설명서에 사인을 하고 CD를 전해주면서 악수를 한다. 다른 사람은 이 장면을 그녀의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는다. 두 사람 사이에 몇마디 말이 오고간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감사해요. 후훗."

이것이 스탠다드이다. 그런데 어떤 여성팬은 앞으로 다가서면서부터 심상치않다.

"어머머. 어쩜. .. TV 에서보다 엄청 잘생겼다."

"앞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그녀는 악수를 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넋을 잃은 사람처럼 바라본다. 정수가 하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정수의 손을 갑자기 치켜올려서 그의 손등에 키스를 해버린다. 그리고 도망치듯 재빨리 빠져나간다. 이 장면을 보고있던 안명수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콩콩친다.

어떤 여성은 포옹을 하기도 했다. 또 정수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붙이고 셀카로 자신이 직접 찍기도 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정수의 뺨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안명수는 속에 천불이 나서 신음한다. 

어떤 여성은 그가 봉사활동하는 것을 TV 에서 봤는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면서 자기도 같이하겠다면서 연락처를 받아가기도 했다.

어떤 여고생은 대놓고 사귀자고 한다.

"있잖아요. 우리 둘이 완전 딱인 것 같은데 .."

정말 용감한 여성팬들이 많았다.

정수와 윤희도 쉬는 시간에는 안명수가 있는 자리로 들어가서 음료수를 마신다. 안명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정수의 손과 뺨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지워준다. 그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난리다. 안명수는 가게에 있는 전신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오늘따라 얼굴이 왜이러지? 갑자기 화장품 알레르기인가?"

한 사람이 시간을 끌면 뒤에서는 불평과 한숨이 쏟아진다.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사인회는 생각보다 엄청 느리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정수는 통키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윤희도 섹시 장구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다. 

저녁 7시까지로 예상헸던 사인회는 계속되었다. 백화점에서는 경비원들을 시커서 7시부터는 사인회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았다. 마지막에는 정수와 윤희가 일어서서 사과를 하면서 억지로 끝을 내버렸고, 조만간에 다시 열기로 약속을 했다. 

랏데백화점 측은 외숙모 이세영을 통해서 정수에게 따로 1000만원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정수가 생애 처음으로 연 사인회가 끝났다. 나중에 연예국 기자들이 안명수에게 항의하는 투로 말했다.

"한정수 인기가 이런 정도면 우리 LBS 연예 뉴스에서 한정수에 대한 보도를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요?"

"내년 이전에 한정수에 대해서 나도 모르는 기사가 나가면 LBS 예능국에 그 기자님들께서는 사표 쓸꺼임!" 

원칙은 원칙이다. 한정수를 키우는 것은 황제의 원칙이었고, 퀸은 여기에 따르는 것 뿐이다. 그 이외의 문제는 원칙이 결정한다. 저러다가 정수가 원칙에 희생되는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은  안명수 개인적인 고민이다. 

앨범이 나오면 뮤직방송에 나가서 얼굴을 내밀어서 홍보를 해야 팔린다. 한정수의 첫번째 앨범이 방송가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수와 윤희는 LBS 뿐만 아니라 다른 TV와 라디오의 음악프로에도 출연한다. 정수의 노래가 방송을 타고,  윤희의 노래도 간간이 들린다.  안명수가 기획하는 야외 음악쇼는 정수의 앨범을 위해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황제는 정수에게는 두번째 앨범을, 그리고 윤희에게는 독집 앨범을 준비하라고 했다. 

정수의 사인회가 끝나고 나서 얼마 후에는 윤현도도 귀국했다.  윤현도와 BY 의 멤버들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건강한 모습들이다.  윤현도와 BY는 여름철을 겨냥한 음료수, 아이스크림, 여름 의류 등에서 CF(상업광고용필름) 여러 개를 찍었다. 그런데 그가 미국 투어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귀국한다는 보도가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떴다. 그들의 귀국 소식에 벌써 그 회사들의 주가도 뜨기 시작한다.

박PD는 옐로우에서  윤현도와 BY에게 조촐한 귀국 환영회를 열어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여름에는 유럽투어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한다. 

"형님, 이번 유럽 투어는 한달 정도 걸리는데, 정수를 데리고 가면 안될까?"

"글쎄.  그 때가 정수 방학이라면 같이 가도 괜찮을껄. 윤희는 아직 안되겠니?"

"글쎄요.  윤희 스타일이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아마도 중국쪽이 .."

"너는 중국에 안가?"

"내년에는 중국 가요제에 나가요. 세계 인구의 거의 사분의 일이 중국에 있다는데 안갈 수가 있나?"

"중국으로 나가는 드라마에 OST는 몇 개나 했어?"

"형님, 지금 나한테 그거 들어오면  정수한테 넘겨주라는 말 아니야?"

"눈치는 빨라졌네. .. 하하하.  정수가 지금 미국이나 유럽에 가도 정수한테는 관광 말고는 별 소득이 있겠어?  윤현도는 록이니까 좀 시끄럽지만, 정수는 시끄러운 쪽도, 조용한 쪽도 소화를 잘 해내거든. 내가 드라마쪽 PD 들한테 OST를 추천해볼 생각이야."

"그러려면 미리 앨범을 몇개 냈어야 할텐데?"

"첫 앨범 성과가 저 정도인데 뭘 망설여? 또 내면 되지.  CF도 몇개 해보자." 

안명수는 4월 말에 야와 콘서트를 열었다. <토요 카페> 의 야외녹화로 봄이라는 계절의 스페셜이다. 이 콘서트는 다양한 연령층을 고려한  일종의 뮤직쇼로 구성했다. 윤현도 뿐만 아니라 정수와 윤희도 여기에 출연했다. 

윤현도는 뮤직쇼의 첫무대에 나와서 자신이 귀국했음을 알렸다. 그 대신에 정수는 윤현도 무대의 끝부분에서 노래 한 곡을 그와 함께 불렀다. 그 뮤직쇼의 마지막에는 정수 혼자 출연했다. 둘 사이에 거리를 두라는 황제의 지시 때문에 안명수가 프로그램 구성을 그렇게 했다. 마치 둘이 가야할 길이 어느 정도는 갈림길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안명수의 야외 뮤직쇼가 끝난 후에 윤희를 맡겠다는 기획사가 몇개 나타났다. 지금 여자들에게는 그룹이 대세이다. 솔로로는 불리하다.  또 솔로인 여자는 남자보다 수명도 짧다. 그래서 황제는 윤희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윤희를 댄스그룹에도 넣고, 또 솔로로도 계속 연습시켜서 두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키우겠다는 기획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건전한 기획사이므로 박PD는 고민하지않고 선뜻 넘겨준다. 윤희도 주저하지 않고 황제의 지시에 따른다. 

그런데 윤희는 당분간은 정수의 노래를 계속 부르겠다고 말한다. 답답한 안명수는 윤희를 말린다.

"그것은 윤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 너도 이제 그 기획사의 방침에 따라야 해."

"언니, 힘좀 써주세요."

"기획사가 엄연히 있잖아? 이제 그런 것은 정수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또 해서도 안되고. 계약을 위반하면서까지 꼭 그러고 싶어?" 

윤희가 윤현도의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들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안명수의 마음이 놓인다.

윤희는 기획사로 갔지만, 정수를 맡겠다는 기획사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안명수는 정수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고 고집한다. 그런데 박PD나 윤현도는 지금 없으면, 나중에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 다음 부터는 어느 누구도 정수의 기획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 새 봄이 무르익어 5월이 된다. 정수는 윤현도와 연습도 해야하고, 또 학교에서는 중간고사로 시험과 과제가 빡씨게 쏟아져 나온다. 그는 바빠진다. 이 기간을 넘기면 또 안명수의 <토요 카페> 에 출연하여야 한다. 이것이 정수가 5월에 해내야하는 일들이다. 또 가을 상품을 기획중인 여성용품 회사들은 정수와 CF 촬영을 준비중이다. 

안명수는 침대에서 투덜거린다.

"이번에도 벚꽃놀이 한번 못가보네."

"누나, 우리 내년에는 꼭 가요."

"내가 내년까지 살아있을 것 같아?"

"뭐? 왜?  여보가 지금 죽을 병이라도 걸렸어?"

"이제 간신히 윤희 보냈고, 또 누구를 쳐내야 해? 내가 내 명대로 못살꺼라는 생각 안해? 도저히 조마조마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잖아."

"걱정마. 내 주변에는 여보 말고는 아무도 없어."

"흥. 입만 열면 뻥이야. 말만 번지르르."

"답답하다.  이 가슴을 열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이리 와.  까이꺼 내가 열고 보면 되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정수는 점심 시간에 윤희를 잠시 만나고 본관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오후 수업 전에 과사무실에 콘서트 참가에 등록할 일로 본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정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정수씨!"

그런데 아반떼녀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하다. 정수는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본다.

검은 아반테 앞에 젖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고 서있는 여인.

그녀는 분명 아반떼녀이지만, 미라는 보이지 않는다.

왜 또 왔지?

미라얘기는 지난 번에 끝난 것 같은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일까?

그는 아반떼녀에게로 갔다. 이미 앨범을 출시한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를 부르셨나요?"

"그래요."

"제가 오후 수업 전에 실용음악과 과사무실에 가서 해야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서 시간이 없으시다?"

"그게 아니라, 들어갔다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시라고..."

'알았어요.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릴께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는 과사무실에서 이번학기 기말시험으로 열리는 콘서트에 솔로로 참가한다는 참가신청서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아반떼녀가 자기가 말한 그대로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다. 수업 시작까지는 아직 20분 정도 남아있다. 점심식사는 이제 물건너간 것 같다. 그는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얀 바탕에 크고작은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가 5월의 바람에 하늘거린다. 향기로운 봄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정수에게로 몰려든다. 그녀의 몸을 바라보는 정수의 숨이 멎는 것 같다. 그는 그녀에게로 갔다.

"바쁘신데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이제 곧 오후수업이라서요."

"여지껏 기다렸는데도 소용이 없다는 건가요?"

"미라씨 얘기는 지난 번에 끝난 걸로 아는데.."

"끝나다뇨? 정수씨가 할 얘기만 하고 바로 갔죠."

"그래요? 그럼 어쩐다?"

"오늘은 학교 수업이 몇시에 끝나죠?"

"5시 30분이면 모두 마칩니다."

"알았어요. 그 시간 쯤에 다시 올께요."

그녀는 약간 화가 난 듯 하지만, 미소를 띈 표정으로 감추는 것 같다. 검은 아반떼는 학교를 빠져나갔다. 정수의 마음에는 아쉬움이 든다. 그도 실용음악과가 수업을 하는 별관으로 빠른 걸음으로 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