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89.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인데 ... =========================================================================
박하나가 며칠 전에 정수에게 전화를 해서 같이 만났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그녀는 지난 주에 중국에 출장 갔던 이야기를 했다. 또 그녀는 정수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었다.
박하나는 정수에게 차가 없어서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를 물었다. 사실 정수에게 차가 없는 것은 제법 심각한 문제였다. 정수는 이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정수에게 후원금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정수에게 차를 사주겠다며 어느 차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정수는 아직은 멀리 다닐 일이 없으므로 액센트나 벨로스터 정도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자기 거래처라는 곳에 전화를 해서 주문을 해버렸다.
또 박하나는 정수의 계좌에 따로 500만원을 입금을 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정수에 대해서 걸고 있는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요새 내가 정수한테 기대를 엄청 크게 하고 있거든요."
"누나, 나한테 바로 그게 부담이라서 ..."
"웃겨. 너한테 부담 주려는 것이 아니야. 쓸데없이 그런 부담 따위나 가질 생각하지 말아요. 이런 기대는 나 혼자만 갖는 것도 아니잖아? 황제나 퀸이 너한테 그렇게 잘 해주는 것도 그 사람들이 너에게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 아니야?"
"그런 분들의 기대에 대해서 부담을 갖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데요."
박하나는 한달에 한번 미국 아니면 중국에 출장을 나간다. 이번 여름부터는 유럽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전에는 그녀가 해외에 나가면 자기 일만 하고 돌아왔는데, 정수를 알고 나니까 그 쪽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 그쪽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이 먹는 음식, 듣는 음악, 보는 영화나 드라마, ... 이런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고 했다.
"이게 바로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얘기겠지?"
"그런 것은 모르겠고, 누나 생활이 그만큼 풍요로워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 뭐. .. 아무래도 문화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꺼야. 그런데 중국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쪽에서 한류가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대요."
"중국은 인구가 있잖아요. 요새는 TV드라마가 중국으로 많이 나간다는데요."
"그래서 정수 너도 미국이나 중국 시장도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어."
"에이. 누나도 참. .. 난 아직 우리 나라에서도 무명인데요?"
"저렇다니까. 미래를 준비하기에 무명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 오히려 잘됐죠. 지금 착실하게 준비하라고. 예를 든다면 드라마가 잘 나간다면, 드라마 OST 를 따내든가 해서, 나중을 위해 미리 뭔가를 심어 두는건 어때?"
"누나도 알다시피, 드라마 OST는 하늘에 별따기잖아요? 그렇게 겹쳐주기만 한다면야 나한테는 완전 대박이죠. 또 저한테는 일년이라는 준비기간이 아직 한참 남아있거든요."
"내가 찌라시에서 감시한다는 것도 잊지마. 너 만일 이상한 스캔들이나 일으키고 하면 나하고는 완전 끝이야."
"그게. .. 나한테 기획사가 없다는 것이 큰 장점이기도 해요. 그런데 또 나를 감싸주는 파워가 없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눈에 더 잘 띄는 것도 부담이고 ..."
"지금 반란을 일으키냐? 혁명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사춘기도 아니고 뭐야? 이 나라에서 황제랑 퀸보다 더 파워있는 기획사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것은 전혀 아니죠. 저는 그 두분을 부모님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쓸데없는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말고, 넌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착실하게 준비하는 거야. 언젠가 내가 미국이나 중국에 갔을 때 정수 앨범을 거기서 살 수 있는 것을 볼 날이 곧 오겠지? 물론 그 정도려면 우리나라에서도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놨어야 하고."
"그건 ... 아직은 꿈같은 얘기지만, 열심히 할께요. 누나한테 걱정 끼치지 않도록 노력도 하고 .."
"정수야. 나는 ...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작도 해보지 못했거든. 내가 네 나이 때에는 지금 정수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정수가 하나씩 해내는 것을 보면 엄청 신기해. 너에게서 내가 대리만족을 엄청 느끼는 것 같아."
"누나가 하고 싶었던 그것이 뭔데? 혹시 여성 대통령? 하하하"
"이 나라 최초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대통령? ..하하하. .. 그건 농담이고, 절대 비밀이야."
이 자리에서 정수는 이번 토요일에 같이 만나서 저녁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토요일에 정수는 박하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이유는 녹음 대문이기도 하지만, 미라라는 여자애와 아반떼녀와의 점심식사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수는 그녀들과 헤어져 녹음실로 갔다. 스태프들과 함께 녹음을 시작했지만, 녹음한 곡이 10 곡도 안되는데 벌써 저녁이다. 스태프들은 정수때문에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까지 녹음실에 나와야 하므로 불만이 많았다. 정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그의 팬사인회를 위해서 제작할 앨범을 위한 곡이기 때문이다.
녹음실을 나온 그는 박하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박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통화에서 박하나가 오히려 정수를 다독거린다.
"누나, 정말 죄송해요. 녹음 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늦어버렸어요."
"그래. 녹음은 다 끝냈어?"
"오늘은 도저히 더 이상 진전이 없어요. 내일 계속 해야해요."
"스트레스 받지 마. 나, 지금 퇴근해서 너네 학교로 갈께. 너도 천천히 내려와. 30분 후에 도착할꺼야."
"누나, 화난 것 아니죠?"
"화가 나기는 했지. 하하. 그런데 정수 때문은 아니고, 다른 일로. 회사일이야."
"오늘은 꼭 누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어차피 지금은 아직 차가 나온 것도 아니니까, 다음 주에 또 만나면 되잖아. 오늘 저녁은 집에 가는 길에 먹으면 되거든. 뭐가 걱정이래? 나 지금 출발할꺼니까, 이따가 봐요."
그는 박하나와 같이 과천으로 내려와서 저녁을 먹었다. 그는 박하나에게 어제 녹화한 <토요 카페>가 오늘 방송되므로 10시부터 TV를 보라고 말해주었다.
"같이 보면 안될까?"
"누나, 정말 미안해. 내일 녹음 때문에 오늘은 정말 일찍 들어가야 해요."
그녀는 그를 산타페로 오피스텔 앞에 내려주고 자기 집으로 갔다. 그는 박하나에게 거짓말을 해야했다. 그가 일찍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녹음 때문이 아니었다. 저녁에 안명수랑 같이 <토요카페>를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저녁 9시까지는 집에 들어오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안명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안명수를 기다릴 겸 TV를 켰다. <토요카페>가 나오는 LBS에 채널을 맞춘다. 그런데 그에게는 잠이 쏟아진다. 아침 일찍부터 무리를 한 결과이다. 피곤한 몸에 배까지 불러서 그런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이 잠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그는 잠을 참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지만 결국 그의 눈은 감겨버린다.
안명수는 집으로 오는 길에 조금 늦는다고 정수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고 계속 부재중이다. 그녀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박하나에 대한 불쾌한 생각 때문이다. 그녀는 오피스텔에 도착했으나 정수가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다. 그녀는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정수의 텔로 건너간다.
그는 거실 소파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TV를 켜놓고 잠이 든 것이다. 정수는 이번 <토요카페>무대를 학교에 과제로 제출해야 한다며, 안명수에게 동영상파일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편집실에 부탁을 해두었었고, 오늘 그 파일을 편집실로부터 이메일로 받았다. 깜빡하고 있다가 집에 올 무렵에야 그 생각을 하고, 그 동영상 파일을 USB 에 담아온다고 조금 늦었다. 그런데 그는 한가하게 뻗어서 잠이나 자고 있다.
이 장면을 본 안명수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또 그가 곤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좋지않다. 새벽에 그를 몸으로 깨운 것도 마음에 걸린다. 박하나와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은 것 같은데, 혼자 오해를 한 것도 미안하다. 윤희랑 녹음한다고 그 답답한 녹음실에서 하루 종일 낑낑거렸을 생각을 하면 불쌍하기도 하다.
안명수에게도 오늘이 녹녹한 하루는 결코 아니었다. 아침부터 서울과 인천으로 동분서주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왠지 항상 불안했고, 공허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정수가 박하나와 만날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질투일까도 생각했었다. 그럴 리는 없다. 안명수가 생각할 때 자신이 박하나에 대해 질투를 느낄 일은 없다고 보다. 다만 정수가 얄미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질투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만은 없는 것 같다. 정수가 이제는 안명수에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소유만 하고 싶은 존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루에도 수십번을 <결혼이냐> 와 <결혼은 말이 안된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고민이 전혀 없는 삶이 있을 수 있나? 약간의 고민은 삶을 더 알차고 충실하게 해준다. 나는 지금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고민하면서도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질투하면서 행복한가?
지금 그를 보는 순간 마음은 아프지만, 몸은 엄청 피로하다. 나이 어린 이 연하남에게 당장 안기고 싶고, 또 그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다. 자신의 등을 토닥거려줄 그의 손길이 기다려진다. 그가 키스해주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하루의 피로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자고 있다.
그의 입술도 안명수의 입술만큼이나 메말라있다. 박하나가 얄밉다. 여기까지 태우고 왔으면 키스나 해서 들여보내지. 이 남자의 입술이 이렇게 마르도록 왜 그냥 두었을까? 그녀에게 정수의 입술 말고 다른 입술이 있다는 말인가? 정수가 박하나를 유혹하지는 않았을까? 벼라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런데 그 중에 쓸만한 생각은 단 한가지도 없다.
안명수는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잠자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한 손을 뻗어서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자신의 뺨을 그의 다른 뺨에 댄다.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댄다. 두 입술이 닿을 때의 이 짜릿함. 빨거나 핥지 않고, 이렇게 닿고만 있어도 좋게 느껴지는 이 촉감. 이 짜릿함과 이 촉감이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것 같다. 한정수의 입술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그의 입술을 살며시 빨았다. 혀를 꺼내서 혀끝으로 그의 입술을 스치듯 핥기도 했다.
갑자기 그가 안명수의 입술을 빨면서 한마디 한다.
"여보야 왔어?"
"미안해. 곤하게 자는 사람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다고 하지 마. 깨워줘서 고마워."
"건너와."
안명수는 자기 텔로 건너와서 샤워를 하고 원피 잠옷을 걸친다. 어느새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TV 를 켜고, 그녀는 맥주를 꺼내온다. <토요 카페>가 곧 시작한다.
전에는 그가 <여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 너무 어색하고 기도 안찼는데, 요새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오히려 그가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색할 정도이다. 안명수의 엄마 아빠에게 그가 <장인어른>, <장모님> 하고 따르는 것을 보면 귀엽기도 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