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86. 명수 너도, 한서방도 이젠 다 내 자식이다. =========================================================================
아침 6시.
정수와 명수의 휴대전화기 두 대에서 요란하게 알람이 울어댄다.
정수의 침대에서 안명수와 정수가 벌떡 일어나고, 안명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가운을 걸친다. 정수는 욕실로, 안명수는 건너편에 있는 자기 텔로 숨어들어간다.
한시간 후, 7시
정수는 아침에 학교에 가는 준비를 끝내고 침대를 정리한다. 침대에는 지난 밤 두 사람이 격렬하게 뒹군 흔적이 얼룩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는 그냥 이불로 덮어놓고 거실로 나와서 백팩을 메고 안명수의 텔로 건너간다.
안명수도 출근 준비를 끝내가고 있다. 살색 스타킹에 초록색의 원피스차림이다. 여인의 몸매임을 나타내는 볼륨으로부터 굴곡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런데 안명수는 야구 모자를 잊지 않는다. 그녀는 외출 할 때에는 항상 무슨 옷을 입든지 꼭 야구모자를 쓴다. 그것은 정수도 마찬가지이다.
원피스에 야구모자 차림의 안명수의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정수는 엄청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안명수를 바라본다.
"누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옷이 꼭 파티에 가는 사람 같다. 그런 옷차림으로 어떻게 일을 해? 엄청 불편할 것 같은데."
"그래. .. 아무래도 안되겠지?"
안명수는 자기 몸을 전신 거울에 비춰보더니 인상을 찡그린다. 그녀는 재빨리 옷방으로 돌아갔다. 한참 후에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청바지에 줄무늬 남방 그리고 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그 대신에 방금 전에 입고 있던 원피스는 종이팩에 담아서 손에 들고 있다.
"이제 늘 보던 누나의 모습이다."
"나도 이래야 전혀 어색하지 않아."
명수는 운전을 하고, 정수는 그 옆자리에 앉아서 서울로 향한다.
"똑같은 사람인데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저렇게 달라 보일 수가 있다니. .."
"아까랑 영 딴판이지? 내가 옷에 날개를 달아주거든. 하하"
"누나는 잘 나가다가.."
"또, 뭐가 불만이야?"
"아까 원피스일 때에는 꼭 봄의 여신 같더만, 지금은 조폭같다고. 하하"
"요게. 아침부터 누굴 약올려?"
"누나, 가슴 아파도 진실이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누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입고 설쳐댈 때 정말 누나 같아. 아까 저 원피스는 지금처럼 일하러 가는 누나한테는 안어울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래도 봄이니까 이미지 쇄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좀 .. 헤헤"
출근길은 퇴근길보다 훨씬 더 정체가 심하다. 짜증이 난다. <가다 서다>가 끝없이 반복된다. 안명수는 투정을 부린다.
"이러다가 고혈압이 올 것 같아."
"우리, 서울로 이사할까?"
"인천 방송국 때문에 나는 안 돼요."
"누나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지?"
"한 개라야 하면 날개가 있든가."
"그럼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데?"
"언제는 날보고 천사라며?"
"흐으음. .. 맞아. 누나는 천사야. 원피스 입었을 때에 .."
"지금은?"
"지금은 조폭천사."
그래도 둘이 티격태격을 몇번 하다 보면 어느새 서울이다. 안명수에게는 이런 답답한 출근길에 정수가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녀가 짜증이나 투정을 마음껏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 받아준다. 만일 그가 없다면, 이런 것들을 그대로 안고 방송국으로 가야한다. 그럼 하루 일은 곤란하게 시작되고, 하루는 서서히 꼬여 들어간다.
안명수는 정수를 학교 정문 앞에 내려놓는다.
"오전 수업이라고 했지? 방송국으로 늦지 말고 일찍 와."
"알았어요."
정수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녹음실에 가야 했다. 그는 과제로 제출할 곡을 녹음한다. 그 때 윤희도 녹음을 같이 할 계획이다. 그러려면 녹음실에 미리 신청을 해 두어야 한다. 그는 서둘러서 빨리 끝내고 안명수에게 갈 생각이다.
그는 본관에서 옆 건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다. 본관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샛길로 들어설 생각이다. 그는 한 손에 플라스틱 뚜껑이 닫긴 미디엄 종이컵을 들고 있다. 그 속에는 방금 뽑아서 엄청 뜨거운 어메리카노가 들어있다.
주차장을 지나면서 머리 속으로는 아침에 안명수가 왜 녹색 원피스를 입었다가, 나중에는 종이팩에 담아서 들고 왔을까를 생각한다. 지난 밤에 그녀의 몸에서 느꼈던 짜릿함도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런데 길을 가면서까지 이런 음란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한심스럽다고 생각한다.
팍!
"앗!"
"어?"
충돌한 어깨. 하마터면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누군가가 화상을 입을 뻔 했다. 뚜껑도 뚜껑이지만 정수가 쉬지 않고 요가를 연습한 때문에 반사신경이 제법 발달한 것 같다.
그런데 여자다.
그것도 예쁘다.
그게 아니지. 엄청 예쁘다.
신입생인가?
그런데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우선은 장난기가 팡팡 쏟아진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얼굴은 순식간에 싹 바뀌어버린다.
심술이 덕지덕지한 볼, 섹시한 눈매, 표독스러워진 표정, ..
영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다.
아마도 정수가 그녀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미리보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정수에게 말했다.
"사과!"
"배"
정수는 순식간에 응수했다. 같이 부딪쳤는데, 왜 정수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거지?
사과를 하려면 같이 해야지.
"썰렁이거든요!."
"알아요."
"사과하세요."
"왜요?"
"그 쪽이 <쾅!>하고 부딪쳤잖아요?"
"그 쪽도 멍때리고 오다가 저랑 부딪친 것이 아닌가요?"
"전혀 아니거든요!"
그녀는 너무도 당당했고,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정수를 쳐다본다. 제법 매력적이다. 남자들이 끌려갈 것 같다. 그런데 우선은 정수가 엄청 헷갈려 한다. 지금 이 아이가 이러는 것이 장난일까? 아니면 그녀의 진심일까?
정수는 공연히 말만 오고 가면서 시간을 허비할 것 같아서 이 상황을 무시하기로 했다.
"좋아요. 그 쪽이 가만히 서있는데 내가 가서 부딪친 것도 아니고, 둘이 마주 오다가 박은 건데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사과하고 끝내면 되지 않아요? 왜 나만 사과를 해야 하죠?"
정수는 차분하게 또박또박 얘기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불만스러워져 간다. 아마도 진심인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한숨을 길게 내쉰다.
"하아."
아마도 자기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수는 자신의 짜증이 말투에 섞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한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잘했고, 자기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고, 또 자기가 참는다는 기세다. 정수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으나, 일이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장난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가세요!"
"네?"
"가시라구요!"
"가라고 안해도 나는 가거든요."
그는 그녀를 스치면서 지나서 자기 길을 간다. 그런데 그가 곁눈질로 보니까,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딱딱거리는 것이 없어지고 다시 장난기가 보인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까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 그는 알 수 없는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고개짓을 절레절레 했다.
그가 주차장을 벗어나서 샛길로 들어서려는데, 그의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한정수씨!"
약간 어른스러운 목소리이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방금 그 여자애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 또 누구지? 여선배? 여교수? 그런데 그녀는 나이가 그렇게 많을 것 같지 않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색의 아반떼에서 어떤 여자가 내린다. 여성스러운 마스크와 목소리 만큼이나 시원스런 얼굴과 윤곽이 선명한 몸매이다. 계절이 봄이라서 그런지, 겨우내 여인들의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몸매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이야기좀 했으면 하는데요."
"누구시죠?"
"차에 타시죠? 방금 미라 일도 그렇고.. 얘기하면서 다 말씀 드릴께요."
"방금 그 여자가 미라입니까?"
"예. 미라 성격이 좀 ... 죄송해요. 제가 사과드릴께요. 일단 제 차에 타세요."
"누구신지,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차에 타죠?"
"저 생긴 것을 보세요. 제가 악당 같아요? 하하"
"바쁜데. .."
"저도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점심시간이죠? 오늘 점심은 제가 살 테니까, 저랑 미라랑 같이 점심 먹어요."
"점심식사는 이미 선약이 있는데요."
"오늘 하루만 어떻게 안돼요?"
"오늘 그 약속을 안지키면 큰일 납니다. 바쁘시지 않으면 내일이 어떨까요?"
"방금 미라 때문에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건 그냥 해프닝 정도로 ..."
"그럼 내일 점심은 저랑 먹는 걸로 약속하는 거죠?"
"그러죠. 무슨 일인지 알면 좋겠는데."
"싫어요. 오늘 점심 같이 먹지 못하니까 엄청 미워서 알 안해줄래요."
"참나. .."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이리로 올께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미라도 같이 와도 되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황당한 두 여자들.
진짜 어이없다.
갑자기 태클을 거는 미라라는 당당한 여자애나, 미라보다는 나이가 든 그녀. 엄마와 딸은 아닌 것 같고. 언니와 동생으로 보기에는 둘이 너무도 딴판이다. 이들 두 여인은 어떤 관계일까?
아마도 미라는 이미 그 검은 아반떼에 타고 있는 것 같다. 그녀도 차에 타고, 검은 아반떼는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정수는 그 차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는 궁금증을 하루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옆 건물의 녹음실로 간다.
녹음실에서 일을 마치고 그는 택시를 타고 안명수에게로 간다. 지금은 저 여인들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안명수의 음악방송 <토요 카페>가 내일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도 출연한다. 오늘 녹화는 야외에서 하지 않고, 다행히도 스튜디오에서 한다.
* * * * * * * * * *
안명수의 아빠가 안명수 앞으로 주문했던 하얀 소나타가 나왔다. 아빠는 차가 나오면 같이 만나자는 말을 했다. 그런데 안명수나 정수는 <토요 카페>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나는 것은 그 다음 날인 일요일로 미루기로 했다.
일요일 저녁에 명수는 정수를 데리고 안명수의 집에 간다. 안명수가 그 동안 사용한 엄마의 차를 반납하고 새 차도 구경했다. 식탁에는 엄마가 손수 장만한 음식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정수는 아빠와 함께 소주도 마셨다. 그 날의 주 메뉴는 갈비찜이다.
"손수 하시느라고 수고하셨지요?"
"수고는 뭘. .. 한서방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까 고맙네."
"엄마, 오늘 이 갈비찜을 왜 했어?"
"갈비찜은 우리 명수가 어렸을 때부터 맛있게 먹는 음식 아니니? 너 오는 날 내가 갈비찜 안하는 것 봤어? 오늘도 네가 오니까 갈비찜이 당연한 것 아냐?"
"하하. 난 또 한서방 먹이려고 했는 줄 알고."
"명수 너도, 한서방도 이젠 다 내 자식이다. 내가 누구는 먹고 누구는 안먹어도 좋다는 심뽀로 음식을 만들겠니?"
"그래. 역시 우리 엄마야."
"장모님, 오늘은 운전 안하셔도 되니까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뭐야아? 그럼 나만 오늘 술을 못 마신다는 거야?"
"여보가 술을 드시겠다면 내가 마시면 안되지. 둘 중에 하나는 운전을 해야 하니까."
"우리 오늘 그냥 여기서 자자. 자기야, 내 잔에도 술 따라."
정수는 네개의 잔에 소주를 따른다. 그렇지만 정수는 건배만 하고 잔을 다시 식탁으로 내려놓는다. 이것을 본 장인의 불만이 나온다.
"자네랑은 지난 번에도 같이 못 마셨는데, 오늘도 또 못 마시나?"
"죄송합니다. 내일이 월요일이라서 여기서 자면 안될 것 같아서요."
"하아. 내가 안마실께, 자기가 마셔라. 아빠 저러다가 우시겠다. 하하"
"내가 오늘 흑기사 할게."
정수는 명수의 잔까지 같이 비운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 두잔 뿐이었다. 안명수의 엄마가 말했디 때문이다.
"자네 고만 마시게. 여기서 집에까지 가는 동안에 명수는 저 차 운전을 하고, 자네는 그 옆에서 코골고 잠이나 자면 우리 명수가 얼마나 심심하겠어? 제발 우리 명수 살면서 심심하게는 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엄마가 괜한 걱정을 하시네. 난 요새 자기랑 살면서 심심한 것이 아니라 귀찮을 정도거든요."
"그런 또 무슨 소리야? 우리 한서방이 왜 너를 귀찮게 해?"
"엄마가 그랬잖아. 연하남이라고. 저게 어리광이 얼마나 심한지."
"한서방, 자네는 우리 명수한테 무슨 어리광을 부리나?"
"저는 별로 .. 오히려 여보가 많이 부리는데요. 어리광아, 짜증에 신경질에 .."
"그럼 그렇지. 한서방이 그럴 사람이 아냐."
"엄마! .. 그럼 나는 그럴 사람이야? 도대체 누가 이 집 자식이야? 나야? 아니면 한서방이야?"
"사랑하는 딸이랑 사위, 너희 둘 다 우리 집 자식들이지. .. 봐라. 명수, 정수. 너희 둘은 <수>자 돌림이잖니? 하하"
"엄마, 알았으니까 고만 해요. 말을 꺼낸 내 잘못이네."
과천과 혜화동은 멀고도 가까운 거리이다. 안명수와 정수는 일찌감치 혜화동을 출발했다. 그런데 정수는 차 안에서 잠든 것 같다.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는 아예 코까지 곤다.
정수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린다. 자던 정수가 갑자기 잠에서 깨더니 마치 전혀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전화를 받는다. 아마도 엄마가 전화를 한 것 같다.
마지막에 둘이 하는 말은
"자네 졸지 말게."
"장모님, 저 졸지 않습니다."
"명수가 졸면서도 운전을 하거든. 자네가 졸면 명수도 따라서 졸을꺼야. 하하"
통화가 끝나고 나서 안명수가 물었다.
"왜 졸아놓고 안졸았다고 거짓말을 해?"
"나? 난 안졸았어. 자면서 코를 골기는 했을껄."
저걸 엄마한테 고자질을 할 수도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