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81. 당신 같은 피래미들이 난리굿을 벌이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명수는 섬찟하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더구나 여기는 황량한 중환자실의 한쪽 구석이다.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른다.
안명수는 일어서서 뒤로 돌아섰다. 중년의 남자가 명함을 들이민다. <과천 동부 경찰서 형사 조형국> 이라고 적혀있다.
형사?
정수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형사가 찾아 온 거지?
그렇다고 해도 중환자실에 까지.
뭐가 그리 급한데?
안명수는 딱히 이유는 떠오르지 않지만 오늘의 컨셉을 딱딱녀로 잡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마치 얼음이 깨지듯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안명수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런데 안명수는 엄마를 혼자 여기에 남겨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엄마를 데리고 같이 나갈 수도 없고 .. 엄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다. 이 때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면회시간이 지금 20분 남았거든요. 밖에 나가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희도 늦은 시간이라서 .."
"이것 보세요. 내가 지금 사건의 현행범도 용의자도 아니잖아요? 조형사님 수사에 협조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응하겠다는데 왜 이러세요? 이건 뭐. .. 임의동행을 하시겠다면 저의 동의나 승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 나라 경찰의 호구입니까?"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
"형사소송법에 의한 것이건 경찰의 직무수행법에 관한 것이건 따지지 않고 국가 권력의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나는 분명히 말씀 드렸어요. 그런데 이 병원의 면회시간 때문에 우리에게 2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못하겠다면 강제처분 하십시오. 내 생각도 달라집니다."
"아. 예에.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형사는 굽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소근거렸다.
"저 남자 뭔데?"
"형사래."
"아니, 형사가 왜 너를 보재?"
"엄마 딸 안명수가 좀 잘 생겼수? 이 나라에서는 잘 생긴 것도 죄야."
"아니, 얘가 오늘 하루 종일 왜 이래? 너 뭐 잘못 먹었니? 아니면 힘 드는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엄마가 문제야. 나도 문제고. .. 나, 한서방이랑 결혼하는 것 ..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
"명수야. 내가 잘못 했다고 말 했잖아. 제발 그러지 말아라. 응? .. 나도 오늘 미안하고 죄송해서 얼굴을 못 들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것 안보이냐?"
"먼 소리여? .. 말만 잘 하는 구만. .. 이따가 한서방 깨어나서, 문제의 엄마와 나를 보면 어쩔 것 같아?"
"글쎄."
"내 생각에는 또 기절할 것 같아."
"너를 보고 기절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왜 나를 보고 기절해?"
"한서방이 왜 나를 보고 기절해?"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예쁜 우리 명수를 보고 기절 안 하면, 그건 남편감으로는 여엉 아니지. 골치 아픈 남자야. 그런데 왜 나를 보고 기절해?"
"한서방 깨어나면, 엄마가 얼마나 시끄럽게 호들갑을 떨을 지, 난 벌써 눈에 훤히 보인다."
"얘가, 지금 .."
"쉿. 조용히 해. 내 말 잘 들어. 시간 다 됐으니까 우리 나갈꺼거든. 엄마는 먼저 서울로 가. 나는 조형사부터 만나고 나중에 갈테니까."
"명수 네가 형사를 왜 만나는데?"
"보면 몰라? 교통사고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겠어?"
"도대체 언넘이 우리 잘난 사위를 들이박았길래 .."
"박기만 했나? 도망갔대잖아."
"그런 뺑소니 사건 때문에 형사도 뜨냐?"
"그러니까 내가 만나보겠다고."
안명수는 엄마를 밤길에 보낸다는 것이 미안했다. 만일 엄마가 안명수네 집에서 자게 된다면 문제는 더 커질지도 모른다. 엄마 혼자 내일 면회시간에 이 병원에 와서 정수를 만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일일사위는 오늘 밤 자정으로 끝이 아닌가? 일단 안명수는 엄마를 서울로 보내는 것이 엄청 중요하고도 급했다. 여기에 조형사까지 나타나서 일은 더 쉽게 해결되는 것 같다. <머피의 법칙>은? 그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안명수의 오늘이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녀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명수의 엄마는 한정수의 얼굴을 한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안명수는 그의 뺨과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두 여인은 중환자실을 나섰다.
그런데 조형사가 없다. 그가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는 기다릴 시간이나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 안명수는 엄마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와서 주차장으로 갔다. 엄마가 안명수에게 물었다.
"어쩔래?"
그 때 또 안명수의 뒤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실례합니다."
"실례는 조금 있다가 하시구요."
안명수는 엄마를 안았다.
"엄마, 조만간에 우리 또 보자."
"그래. 내 딸 명수, 잘 있어."
엄마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안명수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엄마가 간 곳을 바라본다.
"허어엄~. .."
"말씀하시죠?"
"한정수씨와 어떤 사이신지. .."
"왜 물으시죠? 사생활 침해 아닌가요?"
"보호자라고 하셔서 저는 그냥."
"이보세요, 조형사님. 나는 지금 형사님의 그 알량한 호기심 때문에 이 밤길에 엄마를 서울로 보낸 것이 아니거든요."
"아, 예에. 문제는 사고 현장에서 한정수씨가 몰던 차가 안명수라는 여성의 차라는 점입니다."
"내가 안명수입니다. 민증이라도 깔까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한정수가 내 차를 몰고 나가서 뺑소니라도 했다는 말씀이세요? 한정수가 가해자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당신 지금 내 앞에 왜 와있는데? 가해자를 조사해야 해? 아니면 피해자를 조사해야 해?"
"당연히 가해자를. .."
"이봐요. 조형사님. 당신 내가 안명수라는 것을 알았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알겠죠?"
"예, 압니다. LBS 예능국 PD 라는 .."
"그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죠?"
"그건 모르는데.."
"가세요. 나한테 뭘 알고 싶으면, 내가 전에 무엇을 했는가 알고, 다시 오세요."
"예?"
"벼얼. .. 당신 같은 피래미들이 난리굿을 벌이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안명수는 주차장을 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형사는 닭을 쫒던 개가 된 셈이다.
다음날 안명수는 정수가 걱정된다. 오늘부터 학교 수업에 들어가야 할텐데. 혹시 이번 학기에도 휴학을 해야 하나? 혹시 휴학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박PD가 정수에 대해서 열심히 물었지만, 안명수는 정수가 열심히 자고 있더라는 대답만 해주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은 의사가 한 말과 너무도 비슷했다.
"잘 자면, 빨리 회복할꺼야. 그의 몸은 회복에 모든 에너지를 기울이고 있거든."
안명수는 퇴근을 그의 면회시간에 맞췄다. 퇴근 시간의 도로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귀성길을 방불케했다. 안명수는 면회시간 7시보다 20분 늦게 도착했다.
그녀가 자동문 앞에서 벨을 누르자 분홍색녀가 나타났다 30번 침대 한정수 면회라고 말하자 그녀는
"한 분 밖에 안오셨네요. 들어오세요."
라고 말했다. 도대체 그 한 분이라는 사람은 누구지?
안명수가 한정수의 침대에 가서 그 장면을 봤을 때, 정말 그녀에게서 하늘은 멀어져 간 느낌이다. 천상천하에 안명수가 유아독존인 것 같다.
"네가 워낙 바쁘잖아. 그래서 어쩌겠니? 한서방 어쩌겠어? 그러니 나라도 ..."
먼저 온 면회객은 안명수의 엄마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가관이 아니다. 한정수는 침대에 앉아있고, 엄마는 그 침대에 걸터앉아서, 둘이 두 손을 마주잡고 정이 뚝뚝 덜어지는 눈길을 주고 받고 있다. 안명수의 그 큰 젖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다. 이건 아니지.
"한서방이 TV 화면에서보다 훨씬 더 잘생겼네."
"장모님, 감사합니다."
"뭐야아. 엄마는 또 왜 여기 있어? 야아! 한정수! 너 지금 우리 엄마랑 무슨 밀당짓이야?"
"어머머, 명수 왔니?"
"자기, 어서 와. 오늘도 피곤하지?"
안명수는 거짓인 척 하면서 진심으로 그를 안고 키스했다. 엄마의 반응은 그 즉시 리얼타임이다.
"이것들이 이젠 아예 대놓고. .."
"누가 엄마더러 오랬어? 왜 와놓고 난리래?"
"네가 바쁜데, 한서방을 어떻게 여기 혼자 둬?"
"야, 한정수, 오늘도 울엄마가 네 장모냐?"
"여보, 한번 장모는 영원한 장모 몰라? 하하하."
웃겨.
저게 여보래.
저걸 어째야 해?
"엄마, 어쩌려고 이래?"
"말 안했어? 연하남 관리가 어렵다고. 네가 바쁘니까 내가 도와주잖아?"
"누가 엄마보고 그런 것에 신경 쓰래?"
"한서방은 좋다구만 하는데?"
"좋아. 그럼, 엄마가 한서방 디꾸 살어."
"저거. 저거. 말하는 것 좀 봐. 한서방, 저거 신경쓰지 마요. 오늘 일하면서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나봐."
"장모님, 그건 제가 더 잘 알죠. 하하하"
이런 상황을 보고 사람들은 총체적인 난국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난국을 어떻게 수습하지?
"명수야. 내가 오늘 네 방에 숨겨놓은 빨래 다 해치우고, 세탁소에 맡기고 다 했어. 어쩌면 그렇게 드럽고 지저분하게 살 수가 있어?
"어엄마아!"
"한서방? 한서방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마. 내가 다 알아서 해줄께. 한서방은 내 사위도 되잖아. 그리고 네 세탁도 내가 오늘 한서방한테 다 물어보고 했다. 세탁물은 랏데백화점에 아이돌 세탁소에서 와서 가져갔고, 나중에 배달도 해주겠대. 돈은 나중에 내래서 안냈다."
"엄마, 누가 엄마보고 그런 일 하랬어?"
"한서방이 그러더라. 네가 워낙 바빠서 너는 그런 것을 도저히 다 못한다고. 걱정 마. 나도 이제 할 일도 없으니까, 내가 자주 와서 그런 일은 다 해줄께."
"장모님, 그럼 저도 우리 여보를 더 열심히 사랑해줘야겠네요."
"자네가 그래만 준다면야 나도 얼마 정도는 속죄를 하는 거지. 고맙네, 한서방."
이런 것이 바로 점입가경인가?
아니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