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78. 장모님 오시는데 태평하지 않을 이유가 뭐 있어요? =========================================================================
드디어 3월이다. 아직 겨울날씨가 풀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한다. 정수는 이번 학기에 복학을 하고,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한다고 약간 긴장하고 있다.
일요일 아침.
오늘은 안명수의 엄마가 안명수를 만나러 오는 날이다.
안명수와 정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떨었다. 두 사람은 양쪽 집의 청소를 모두 끝냈다. 두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시작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트로 장보러 갔다.
정수가 카트를 밀고 안명수는 그에게 팔짱을 낀다. 이렇게 진열대 앞을 지나는 것도 안명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다. 전에 정수랑 여기 왔을 때에는 늦은 시간에 급하게 들이닥쳐서 후다닥 골라서 서둘러 나간 적은 여러 번 있다. 오늘처럼 이렇게 여유있게 걷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아직 아침을 먹지 않은 안명수는 정수의 팔을 잡아 끌고 우선 식품 코너로 간다. 우선 시식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식이 좋은 점은 그날 시식 코너에 펼쳐져 있는 있는 세 가지 네 가지를 모두 골고루 맛 본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양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한 조각 더 먹어도 되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는다.
둘 다 챙이 유난히 큰 야구 모자를 눌러썼지만, 가끔씩 챙 아래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친다. 잠시 동안이나마 두 사람은 슬그머니 손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볼까봐 얼른 놓는다. 세탁소에서 일한 덕분에 정수를 알아보는 사람은 제법 많이 있다. 그들은 아는 척을 한다.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다 보면 카트는 어느 새 수북하다. 정수의 걱정은 이 정도의 양이면 두 사람의 냉장고를 모두 채우고도 남을 것 같다. 안명수가 저것으로 요리를 해서 먹느냐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집에 아무도 없고, 밤이 되면 두 사람은 자주 치킨이나 피자로 때운다. 그러면 나중에는 냉장고 안에서도 상해버린 것들을 골라내서 버려야 한다. 이 버리는 일은 주로 정수가 맡는다. 그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계산대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 안명수의 휴대전화기에서 벨이 울린다.
"출발할껀데."
"지금?"
"가서 점심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서둘러야지."
"엄마, 이따가 우리 둘이 서울로 가서 만나면 안될까? 빵빵하게 저녁 사줄께 "
"내가 또 속을 줄 아니?"
"아냐. 정말 우리 둘 다 지금 엄청 바쁘거든. 이따가 오후 다섯시쯤 해서, 우리 인사동에서 만나자. 응?"
"명수야. 우리 같이 점심 먹고, 이따가 오후 다섯시쯤 해서 인사동에도 같이 나가자. 응?"
"하아~. .. 알았어. 그럼 딱 두시간만 있다가 출발하면 안될까?"
"야아아. 나도 지금 엄청 배고프거든요. 딱 한시간!"
"한시간 반!"
"요것이? .. 좋아, 그럼 30분!"
"알았어, 엄마. 딱 한시간, 콜."
"계집애."
안명수의 머리 속에서 시간이 계산된다. 지금이 11시. 한시간 후이면 12 시. 12시에 출발하면 늦어도 두시 반이면 도착한다. 일요일이라 도로가 막힐 일도 없다.
그녀는 정수의 냉장고와 자기 냉장고에 사온 물건들을 나누어서 넣는다. 정수의 텔로 건너가서 정수의 옷장을 검사한다.
짙은 회색 바탕에 체크무늬가 살짝 들어가 있는 슈트? 정수에게 너무 고리타분해 보인다. 차라리 깔끔하게 검정색으로 꺼낸다. 그리고 흰 색의 와이셔츠. 거기에 맞춰서 검은 색의 반코트.
안명수는 이 옷을 꺼내서 들고, 정수를 데리고 차로 내려간다. 그에게 차의 키를 건네주면서 외숙모네 집으로 보낸다.
"깨끗이 씻고,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내가 전화하면 나타나."
"알았어요."
안명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간다. 그리고 그녀도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선다.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거나 여성애를 강조하는 레즈비언이 아니다. 결혼을 반대하는 독신주의자도 아니다. 안명수도 외로운 밤이면 남자와 같이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다.
안명수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 나이 앞에 3자를 달면 값이 추락한다면서, 이해 안에 꼭 해치운다면서 엄마가 조급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지금 막 벌여놓은 이 일은 어쩌라고?
엄마에게 시간이 문제라고 얘기를 수백 번도 더했다. 지금은 아직 아니라고 말해왔다.
"엄마, 나 시집 갈 거야. 나도 가고 싶다구요. 그런데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그럼 도대체 네가 말하는 그 때가 언제야? 너 관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때가 올 것 같아?"
"엄마, 이거 완전 악담인 것 알아?"
"그럼, 내가 이 나이에 그것도 모를 것 같니? 네가 정신을 안 차리는데, 내가 악담, 덕담 가리게 생겼어?"
기자로서 여기 저기 발품을 팔아서 취재를 한 후에, 쓰고 싶은 말을 써서 기사라고 올리면, <보도 불가> 라는 도장이 꾹 찍혀서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것은 이제 정말 싫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세탁소에서 연하남을 알게 되고, 그 연하남 덕분에 대학 선배인 박PD와 각별한 인연이 생기고, 이제 막 예능국의 PD 로 일어섰는데. 지금 시집을 간다는 것은 지금껏 힘들여 쌓아 올린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무너뜨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엄마가 선보라고 들이 댄 사진들이 몇 장 있었다. 검사, 의사, 회사의 웬만한 자리에 오른 남자, 대학 교수라는 남자들과 결혼해서 집안에 특어박혀 있어봤자 별 볼일 없다. 집에서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면, 남편은 업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여기 저기 술집을 기웃거리고, 이 여자 저 여자의 젖가슴이나 주물럭대다가, 그녀가 마음에 안 들면 집에 오고, 그렇지 않고 간만에 대어라도 낚은 날이면 호텔 방에 쳐박힐 것이다. 이것은 기자 생활 하면서 수없이 보아온 그들의 바깥 생활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남편이라는 남자가 퇴근과 함께 집으로 꼬박꼬박 돌아온다면, 그는 가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미 그 바닥에서는 더 이상 발전성이 없는 퇴물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기에는 안명수는 몰라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또 그녀의 성격도 문제이다. 그녀는 한번 일에 빠지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 일에만 파묻혀버리는 것이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못 한다. 이런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는 박PD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고, 그를 배후로 열심히 자라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성격과 일에 대한 집착으로 누군가와 가정을 꾸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아직 그녀에게는 연하남 한정수가 유일한 꿈이다. 정수가 점점 자라면서 자기도 뜨고 있다. 정수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자라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정수의 수명이 길어야 안명수 자신의 장래도 그만큼 안전해 보인다.
예능국에 있으면서 그녀는 연예인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진짜 잘생기고 잘빠진 남자들 엄청 많다. 그런데 실력이 괜찮은 연예인들이란 하는 짓들을 보면 전부 외계인 같다. 툭하면 스캔들에 휘말리고.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좀 못생기고, 안빠졌으면 어때?
그냥 정수랑 결혼을 해버려?
지금 당장이 아니고, 나중에라도 ...
정수도 지금 한참 자라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 결혼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다.
또 정수라면 안명수가 하는 일을 모두 다 이해하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런데, 이 연하남은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리다. 사람들이 안명수에게 뭐라고 할까? 완전 도둑질했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아무리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결혼에는 나이가 있을 것 같다.
안명수는 샤워를 마친 후에 화장대로 와서 거울을 본다.
알굴은 아직 봐줄만 하다.
피부에도 잡티 하나 없다.
엄마로부터 우성 유전자만 와서인지 좋은 것만 물려받았다.
젖가슴은 약간 큰 편이지만, 전체적인 체구에 비한다면 그리 큰 것도 아니다.
화장도 한다. 평소와는 달리 엄마를 의식해서 조금 많이 한다. 안그러면 잔소리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던 남자도 도망을 간다고. 아직은 오는 남자도 없는데. 하늘을 봐야 별을 본다고, 남자가 안명수를 봐야 쫓아오고 말고를 할 것이 아닌가?
옷을 꺼내온다.
정수가 슈트 차림으로 깔끔하게 나타나기로 했으므로 그녀는 거기에 맞춰서 흰 블라우스 그리고 검은 스커트를 꺼낸다. 그녀의 굴곡진 몸매가 확연하게 살아난다. 흰 블라우스 안에 검은 브래지어를 했는데 확실하게 비친다. 볼록 솟은 젖가슴은 정수 말에 의하면 옷 위에서라도 움켜쥐고싶은 정도라고 했다. 치마도 제법 타이트하고, 볼록 솟은 엉덩이가 제법 육감적이다. 또 그래서인지 스커트는 옆트임이다. 살색 팬티스타킹으로 중무장을 한다. 약간 드러나는 허벅지가 야한 면도 있지만 정수랑 있을 것이므로 신경쓰지 않는다. 여기에 밝은 밤색의 가디건을 걸친다. 나중에 그 위에 짙은 녹색의 반코트만 걸치면 된다.
그러면 끝이다. 그녀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스스로 감탄한다. 그래. 너는 아직은 안명수야.
그러나 밖으로 외출 할 때에는 야구 모자는 꼭 써야 한다. 약간 눌러서.
이제 엄마만 오면 된다.
그런데 정수가 궁금해진다. 그로부터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안명수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준비는 다 했어?"
"바탕이 잘생긴 내가 무슨 준비를 따로 해야 해요? 그냥 샤워하고 옷 입고 나가면 되지."
"참나. .. 그럼 샤워는 했니?"
"이제 하려구요."
"너한테는 천하가 태평하구나."
"장모님 오시는데 태평하지 않을 이유가 뭐 있어요?"
"알았으니까 빨리 해. 도착하실 시간 다 돼가요."
저 여유. 저 느긋함.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까?
진심으로 부럽다.
인생은 원래 저렇게 즐기면서 살아야 하는데. ...
그녀는 아까 내려둔 커피를 가져온다. 맛이 쓰다. 갈증이 모두 사라진다. 제발 앞으로 인생에서는 이런 쓴 맛을 남기는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
그녀는 집안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명수의 전화기에서 벨을 울린다. 엄마다.
"내가 올라가? 아니면 네가 내려올래?"
"어이없다. 내가 사는 집 구경도 안하고 그냥 간다고?"
"두루말이 휴지도 안사왔는데."
"그럼 당연히 입장 금지다. 하하하."
"그럼 그냥 가?"
"엄마, 6층이야. 602. 문 열어 놓을께."
안명수는 정수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나타나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번호를 띄워 올리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신호는 가는데 그가 받지 않는다.
끊고, 다시 건다.
갑자기 초조해지면서 온몸이 떨리고 손에 땀이 난다.
우리 엄마가 오는데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정수가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벨 소리가 난다. 그리고 엄마의 발소리가 난다.
또각, 또각, ...
그런데 이 연하남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