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70 69. 그녀의 심술에 이미 시동은 걸린 것 같다. (70/116)

00070  69. 그녀의 심술에 이미 시동은 걸린 것 같다.  =========================================================================

정수와 윤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두려운 기분이 든다. 어제 벌여놓은 일들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TV 를 켜고 뉴스 채널들을 몇 군데 돌려보지만, 아침이어서 그런지 예능 뉴스는 아직 없다.

정수는 답답하여 윤희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들어가본다. 포털사이트에 혹시 뭐라고 나와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윤희도 커피를 들고 와서 모니터를 같이 들여다본다. 어제 오프닝 한 뮤직쇼 <따뜻한 12월>에 대한 기사들과 사진 그리고 동영상들은 이미 올라와있다.

그런데 정수나 윤희에 대하여 특별하게 꼬집은 내용의 기사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평범하게 6하원칙으로 쓴 기사들이다. 안명수에 대한 기사는 내용도 화려하다. 윤현도와 같이 또는 혼자 진행하는 장면이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여러 개 눈에 띈다. 이쪽 기사들은 하나가 쓰면 우루루 베껴 쓰니까 다 그렇고 그런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컴퓨터를 끈다. 윤희에 대한 비난이나 악플들이 없는 것을 보고 윤희가 일단은 안심한다.

"하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조용했으면 좋겠다."

"이건 너무 조용한 것 아냐? 우리한테는 무관심이라 이건가?"

"아직은 이르지 않나? 아무래도 오후가 돼봐야 알 것 같은데."

"아침 10시가 넘었는데 뭐가 일러?"

어쨌든 두 사람에게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윤희는 정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해가 저물면서 얻은 커다란 행운인가? 이 남자와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같이 일어나고 또 같이 커피를 마실 것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요즈음에는 그에게서 노래를 받아서 그와 함께 연습도 한다. 이 시간이 지나가지 말고 이대로 멈추어있을 수는 없는가?

정수는 안명수로부터 그녀가 이미 출근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박PD도 나왔다고 한다. 뒤풀이로 늦게까지 달린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 같다. 강철같은 사람들이다. 그도 윤희도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그들은 윤희의 집을 나선다. 푸른 하늘 아래 매섭게 차가운 겨울날의 아침 공기가 하루의 시작을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느낌이다. 기분이 좋아서일까? 윤희는 그를 차에 태워서 안명수에게 갔다. 길이 막혀도 전혀 짜증스럽지 않다. 겁 없이 껴들어오는 차들에게 거침없이 퍼붓던 욕도 오늘은 나오지 않는다. 이들의 입에서는 웃음 소리나 노래 소리가 계속 나온다. 

안명수의 방문이 활짝 열려있다. 그녀는 옅은 초록색 바지와 짙은 하늘색으로 둘러싼 인어 같다. 아직 겨울인데도 그녀의 몸 만큼은 봄이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샴푸나 화장품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안명수가 봄날의 한 포기의 풀처럼, 활짝 핀 한 송이 꽃처럼 향기롭다.

"잠은 잘 잤어?"

"시체처럼 잔 것 같아요."

"잠이 아니라 죽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랬겠지. 긴장과 피로가 풀리니까. 이럴 때 몸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언니도 조심하세요. 아침에 인터넷 뉴스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맞아. 누나는 이제 퀸이 아니라 완전 여신이던데?"

"얘들 아침부터 또 왜이래? 아침 안먹었지?"

"이제야 대화가 통하네. 하하"

"기다려 봐. 연락 오기로 한 것 때문에, 나나 PD님 지금 신경을 엄청 곤두세우고 있거든."

오프닝이 지나갔는데도 안명수는 여전히 일거리를 달고 사는 것 같다. 그녀는 불우 이웃 돕기 성금 문제로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박PD로부터 호출이다. 세사람은 그의 방으로 간다. 그는 그의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의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

"정수 ... 너는 어떻하지?"

"예?"

"내일 뮤직쇼에 나오라는데, 뮤지컬이랑 시간이 겹치잖아?"

"뮤지컬은 오늘이고, 매일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공연에는 나갈 수 있습니다."

"1월말에 현도 미국 순회공연에 따라가나?"

"가고는 싶은데, 뮤지컬이 2월 말까지입니다."

"윤희는 지금 당장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전부 몇 곡이나 돼?"

"10곡이 아직 안됩니다."

"우선 30곡을 만들어내야 해요."

"예? 30곡요? 이해 안으로 어렵겠는데요."

"선배님, 그 정도는 윤희가 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곡을 쓰는 것도 어렵지 않나요?"

"어렵지. 도저히 불가능해. 그런데 우리가 언제 쉬운 일이나 가능한 일을 했던 적이 있어?"

"해보겠습니다."

"연습실은 있나?"

"아직 .."

"선배님, 얘네들 옷장 속에서 연습하던데요. 하하하"

"흐으으음. ... 현도 연습실 비는 시간에 쓸 수 있는지 알아봐줘."

윤희에게 이것은 황제의 명령이나 다름없다. 30곡이라면 앨범을 낼 수 있는 분량이다. 혹시 그가 앨범제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시골 집에 가서 쉬고 있을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이들은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으로는 늦었고, 점심으로는 이르니까 이것은 아점이다. 식사 중에 윤희의 휴대전화기기 진동음을 낸다.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윤희의 얼굴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한다. 박PD와 안명수는 다른 얘기를 하느라고 눈치를 채지 못하지만, 정수는 알아차리고 긴장한다. 윤희가 숟가락을 놓고 조용히 일어서서 식당을 나선다.

"여보세요."

"어제 보니까 너 참 잘나가더라. 언제는 죽으려고 약까지 먹었다더만. 하하하"

"누구시죠?"

"완전 재수없다, 너.  내 목소리도 잊었단 말이야?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니?"

"아, 예. 언니. 죄송요."

"그 무대에 나가느라고 누구누구랑 잤어?"

"그런 일 없거든요."

"없어? 이게 누구를 완전 바보로 아나? 그럼 뜽금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 뮤직쇼에서 널더러 출연하라고 연락이 왔다?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신데렐라니?"

"......"

"야아아!.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그래도 사람이면 의리가 있어야지. 같이 고생한 게 얼만데,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한테도 알려서 같이 나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으시겠다?"

"언니, 그런 것 전혀 아닌데요."

"이 바닥이 어떤지 알만한 애가 왜이래? 아무튼 우리가 아직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마."

"예. 알았어요."

"어쭈? 그게 다야?"

"예. 아직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야아아! 누구랑 자야 그 무대에 나가느냐고 물었잖아. 꼭 이걸 내가 직접 너한테 말해야 해?"

"그런 일 없다니까요? 저 지금 들어가야 해서 죄송해요. 다음에 좋은 소식 생기면 꼭 연락 드릴께요."

간신히 통화는 끝났다. 윤희는 통화하는 동안 계속해서 화가 났다. 또 서럽기도 했다. 눈물이 왈칵  솟는다. 전에 윤희가 몸담고 있던 Girl시대의 악명 높은 왕언니이다. 밑에 애들을 시키지 않고, 왕언니가 직접 전화를 했다는 것은, 왕언니가 이 일이 자기네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녀의 심술이 하늘까지 치솟았다는 얘기다. 비록 전화 통화를 했지만, 직접 코 앞에서 악을 바락바락 쓰는 그녀의 모습이 윤희의 눈에 선하다. 한두번 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심술에 이미 시동은 걸린 것 같다.  앞으로 또 인터넷에 윤희에 대한 기사가 뜨면, 그녀들은 뭐라고 악풀질을 해놓을지 안 봐도 뻔하다. 이것은 앞으로 윤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생각을 하자 윤희의 가슴이 걱정 때문에 갑자기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어지럽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만성 어지러움증과 악성빈혈. 한동안 멈칫했었는데,  또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윤희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식사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 뭐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입맛이 쓰디쓰다. 

그녀는 머엉한 표정으로 맞은 편에 있는 정수를 바라본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거운데, 이들과 헤어지면 바깥 세상이고, 그 험난한 바깥 세상은 윤희를 편안하고 즐겁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머. 윤희 너 혹시 정수한테 꽃혔니? 애가 아주 넋을 놓고 정수만 쳐다보네. 밥도 못 먹어?"

"언니, 그게 아닌데요."

"무슨 전화였는데 그래? 누구야?"

"전에 있던 ..."

"Girl 시대야? 그 드러븐 왕싸가지들?"

안명수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화가 치솟는다. 윤희가 한없이 불쌍해 보인다. 저것들이 또 무슨 짓을 해서 윤희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을까? 

"오늘 당장 이동통신사에 가서 휴대전화기 전화번호를 바꿔. 그리고 그런 애들 전화번호는 모조리 스팸처리 해버려. 그리고 당장 이사하고."

"예."

"윤희 내 말 똑바로 들어. 처음에는 이런 일들이 없으면 이상해. 나중에는 더 큰 일들이 터지거든. 절대로 침착해야 해. 정수 너도 알겠지? 절대로 몸 함부로 굴리지 말고 조심하고."

안명수가 쏟아내는 이런 말들이 정수의 귀에 너무 이상하게 들린다. 말하는 것이 어쩜 그렇게 박PD의 어조와 똑같을까? 완전 붕어빵 어조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많이 닮아가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 안명수가 박PD를 닮아가겠지. 박PD도 안명수에게 한마디 하면서 거든다.

"걔네 기획사에 한 방 질러둬. 큼직한 걸로. 나랑 이런 일이 안생기게 하도록 약속했거든."

"예. 알겠습니다."

안명수는 정수와 윤희에게 이들이 내일 출연할 무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수는 윤희와 함께 안명수의 방을 나와서 방송국을 나섰다. 그런데 그는 뮤지컬 공연에 가야 하기 때문에, 윤희와 같이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동통신사에서 전화번호를 바꾸는 일은 해냈다. 그는 또 윤희에게 윤현도의 연습실을 보여주었다. 윤현도의 승낙은 이미 떨어져있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당장 이사할 집이다. 

"일단 이사할 집도 찾아봐야 할텐데."

"내 일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 저녁 공연이나 걱정하셔."

"알았다. 당장 내 코가 석자네..." 

"이따 마칠 때 데리러 갈까?"

"명수누나가 온다고 했으니까, 너는 연습이나 해."

윤희는 그를 보낸다. 그는 택시를 탔다. 김익환에게 가는 택시 뒷모습을 윤희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다. 또 혼자다. 그런데 여기는 윤현도의 연습실이다. 여기는 바깥 세상이 아니다. 저녁때 시간이 되면 윤현도가 들르겠다는 말도 했다. 윤희는 연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정수는 택시로 가고 있다. 박하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고 간 후에 그녀가 묻는다.

"어제 무대에서 한 그 뮤지컬 보러 가려고 하거든. 그런데, 표를 구하지 못하겠던데?"

"제가 VIP (초대 손님) 표를 알아봐 드릴께요. 언제 오실껀데요?"

"당장이라도 보고 싶죠."

"그럼 오늘 표로 알아볼께요. 혼자 오시는 것은 아니죠?"

"우리 비서실 멤버들이 모두 4명이야."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김익환에게 가서 VIP 입장권에 대해 물었다. 김익환이 한정수의 청을 거절할 리가 없다.

"오늘은 주말이 아니라서 표가 있을 텐데?"

"구할 수가 없다던데요?"

"이상하네. 그럼 어제 그 공연 때문에 오늘이 그런 거야?"

그는 김익환으로부터 표를 받아서 매표소에 전해주었다. 그는 박하나에게 전화를 해서 매표소에 표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한정수를 찾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표 값을 동생한테 주면 되나? 하하하."

"에이. 누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해요?"

"아냐. 공짜는 싫어. 더구나 동생이 구해준 표인데. 요새 너 하는 것 보니까 돈 많이 들겠더라. 계좌번호 줘봐. 당장 보내줄께요." 

통화를 끝낸 그는 오늘의 공연 준비를 위하여 무대 뒤에 있는 준비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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