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62 61. 누구에게나 영감이 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62/116)

00062  61. 누구에게나 영감이 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

안명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머리 끝까지 난다. 이유는 정수 때문이다. 저 능구렁이 같은 연하남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뚜껑이 열릴 지경이다.

정윤희의 중간보고를 하기 위해서 안명수는 열심히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런데 안명수에게 정수가 와서 하는 말이 자기 스폰 들어온 것이 남아있으니까 정윤희에게 1000만원 정도를 무이자로 빌려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다. 스폰으로 들어오는 후원금은 해당 인물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남에게 빌려주는 돈이 아니라는 말이다. 안명수는 이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둘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간 후에 안명수의 전화기로 어떤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는 삼한증권 이사실에서 일하는 비서실장 박하나이며, 한정수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삼한 증권이 나서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안명수는 일단 감사하며, 곧 시간을 내서 방문하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삼한증권에 갈 시간을 잡기 위해서 일정을 밀고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수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또 노크도 없이. 저게 요새는 제방 드나들듯 한다. 누나, 누나 하고 또 연하남이라고 봐줬더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감히 예능국의 퀸 앞에서 말이다.

"누나, 혹시 하나 누나에게서 전화오지 않았어요?"

"십분 전에 통화했는데, 왜? 어떻게 알았어?"

"그 누나가 자기 상무님을 구슬러서 제 스폰을 맡겠다고 하길래 누나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거든요." 

"누나? 너 이리 와봐."

정수가 겁 없이 안명수에게 가까이 온다.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서? 아닐껄. 가까이 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방송국이고, 또 명분이 없어서 주변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저 연하남은 지난 밤에도 침대에서 안명수를 뜨겁게 달구고, 기어코 절정에까지 끌어올린 위인이기도 하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건 쫌 아니다. 

그가 다가오는 것과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한 안명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사정없이 그의 등판을 쳤다. 짝 소리가 엄청 크게 난다. 평상시 같았으면 이 소리가 안명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오늘은 아주 고소하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다.

"아얏! 누나, 아파요."

"박하나라는 여자가 왜 한정수의 누나인지 오천만 대한민국 국민이 납득하도록 설명하지 못하면 또 갈긴다!"

"그거야 나랑 하나 누나랑 누나 동생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죠.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는데요."

"네 문제가 뭔 줄 모르니? 넌 애가 겁이 없다는 거야. 넌 누나들이랑 침대에 가잖아!"

"그럼 내가 하나 누나랑도 섹스했다는 말이세요?"

"지금 아니라고 발뺌 할거니? 그럼 나 삼한증권에 안갈거다."

"누나."

"했다, 안했다. 둘 중에 맞는 답 하나를 고르시오."

"순 억지네."

"둘 중에 없는 걸 골랐으므로."

안명수의 손이 들려올라가는 걸 이 연하남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잽싸게 튀어버린다. 그는 멀찌감치 가서 서있다. 마치 인생일대의 위기를 모면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하며,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다. 그러니까 안명수는 더 약이 오르는 거다. 미안해 하거나, 죄송하다거나 이런 것이 일체 없다. 슬슬 왕싸가지에 왕재수 노릇을 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당장 이리 오지 못해?"

"가면 때릴거면서?"

"맞을 짓을 했을 때 맞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고불변의 진리야."

"그럼 딱 한번만 예외로 해주세요."

"너는 지금 잠자리 해주고 스폰 물어오냐? PD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난 궁금하네." 

"난 전혀 궁금하지 않거든요."

"이상하네. 왜 궁금하지 않다는 거지?"

"미리 알고 있으니까." 

진짜 얄밉다. 콱 꼬집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그는 가까이 오지를 않는다. 그 때 박PD 가 안명수 방으로 들어섰다. 정수가 허리를 굽신하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안명수는 작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PD 님 제가 말씀 드릴께요. 삼한 증권이 저를 스폰 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잘됐군. 이번 소극장 공연할 때 무대장치에 신경을 좀 더 쓸 수 있겠네. 김감독이 그런 쪽으로는 좀 가난하거든."

"선배님, 그런데 그 연락을 한 사람은 .."

"PD 님 그것도 제가 말씀 드릴께요. 이사실에 있는 비서실장인데 박하나라는 분입니다."

"그래? 예쁘니?"

"엄청요. PD님 소개시켜드려요? 하하하"

"나야 좋지. 그런데 아마 우리 마누라가 반대할껄."

"모르시도록 하면. .."

"난 그런 유치한 일을 마누라 모르게는 안해. 하면 승낙 받고 하는 거지. 그건 그렇고, 오늘 윤희 중간보고 어떻게 할꺼야?"

"지금 오고 있으니까 도착하는 대로 녹음실에서."

"녹음실? 왜 하필 거기서? 거기서 뭘 할껀데?"

"노래 시켜야죠?"

"그럼 스튜디오가 낫지 않나? 무대도 있고. 어차피 걸그룹 출신인데."

"알겠습니다. 그럼 스튜디오 빈 곳을 찾겠습니다. 한 시간 후에 시작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증권회사에는 끝나고 나서 바로 가보도록 하라구. 김감독 좋아하겠네."

그는 나가버린다. 정수도 그를 따라 나선다. 저 왕싸가지, 왕재수는 이렇게 미꾸라지처럼 소나기를 비켜갔다. 안명수는 아까보다 더 열 받는다. 일이 손에 잡히니 않아서 안절부절을 하다가 식어빠진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쓰다. 입안이 온통 쓴 맛으로 가득하다. 연하남 때문에 씁쓸했던 기분이 이제는 확실하게 쓰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이 아니오라 박PD가 이상하다. 왠지 그가  긴장한 모습이다. 윤희의 중간보고 때문일까? 그가 지금 불안해하는 것일까? 자신이 뽑아서 휘두른 칼을 믿지 못한단 말인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의심하고 있나?

누구에게나 영감이라는 것이 온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열정 때문에 이 영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안명수의 눈에 비치는 박철호 PD의 모습은, 그는 선택이나 결정을 순간적으로 깔끔하게 거의 본능적으로 해치우는 것 같다. 이것은 영감에 의한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이 받아들인 영감을 의심하는 것이 확실하다. 불길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정윤희는 자기가 가진 곡을 연습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일주일간 어딘가에서 파묻혀 연습한다고 했다. 그러는 윤희를 안명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이것이 안명수의 실수인 것 같다. 안명수가 윤희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안명수는 박PD에게 확신이나 안심을 줄 만한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자신 있게 한 시간이라고 말해놓은 것이 엄청 후회스럽다. 그렇지만 오전에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안명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윤희가 왔다. 윤희는 자기 덩치만큼 큼직한 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저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윤희는 외투를 벗었다. 윤희의 비쥬얼이 눈길을 끈다. 윤희는 무릎까지 오는 검정 부츠를 신고 있다. 또 물이 하나도 빠지지 않은 짙은 청색의 반바지를 입고 있다. 반바지는 부츠에서 끝난다. 다리는 허벅지가 약간 가는 것 같다. 위에는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어서 제법 단정한 모습이다. 비쥬얼은 색깔로만 본다면 약간 답답하다. 그런데 젖가슴과 엉덩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풍만하다. 그래서 시원스런 느낌이다. 안명수의 마음이 복잡하다.

정수도 들어왔다. 정수는 윤희에게 가더니 오늘 부를 노래의 악보를 보여달라고 했다. 지까짓게 뭔데 저러는 거지? 순진한 윤희는 고분고분하게 보여준다. 정수가 악보를 한참 들여다 보더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윤희도 표정이 굳는다. 둘 다 왜 저러는 거야?

"이상해?"

"시즌이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잖아? 구정이 아니거든. 그런데도 이 곡은 완전 우리 전통민요네." 

"말했잖아. 내가 원래 그 쪽이라고."

"네가 잘하는 것에 누가 관심 있대? 우리는 저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들려줘야 하는 거잖아?"

어쭈? 서당개 3년에 라면을 끓여?  그 동안 제법 배웠다 이거야? 그런데 정수의 고민이 깊어가는 것 같다. 곡에 관한 한 안명수는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차라리 정수가 저렇게 나서주니까 안명수에게는 든든한 마음이 든다.

정수는 윤희에게 말했다.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데, 여기서는 윤희 개성이 너무 뚜렷하게 튀는 것 같다. 연말연시에 이 사회 분위기는 이런 돌출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떻해?" 

"PD님 기대가 너무 커서 내가 나서는 거야. 나를 오해하지 말아줘."

"아냐. 아닌 걸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줘서 난 지금 너무 고마워."

둘의 고민스러워하는 표정이 사뭇 진지해져 간다. 정수가 윤희에게 자기 악보 하나를 꺼내서 보여준다.

"혹시 이거 소화할 수 있겠어?"

"어떻해? 30분도 안남았는데."

안명수의 머리가 갑자기 캄캄해진다. 박PD 가 스튜디오를 예약해두라는 말은 무대공연을 보겠다는 말이고 분명 카메라 테스트일 것이다. 그러려면 스타일링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곡을 들고 저러면? 시간이 없다. 그야말로 어떻해?

"단순해서 어렵지는 않아. 리듬은 기본이 민요풍이 아니거든. 그런 것을 민요풍으로 여기랑 여기랑 두 군데만을 변형했으니까 .. 어떨 것 같아?" 

"아이디어 진짜 죽인다. 그런데 없는 시간을 어디서 어떻하지? 나 오늘 완전 망한거니?"

"누나, 여기서 조용히 한번 불러봐도 되죠?"

그는 동의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안명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다. 어떨지 두고 보기로 한다. 둘이는 소리를 죽이듯 하면서 음정을 잡고 노래를 한다. 정수가 코치를 한다. 윤희가 감탄스러워한다.

"그런데, 이 곡 누가 썼어?"

"나도 그런 쪽이 생각나서 ..."

"그래? 그럼 넌 나한테는 작곡가 선생님이시네. 하하하"

"안무는 어쩌지?"

"나 장구 가져왔거든."

"그럼 장구춤을?"

"오리지널 말고, 이렇게 이 곡처럼 소프트하게. 쿵, 쿵, 쿵더러러러러. 오른 손을 떨면서."

"말로 하지 말고 직접 해봐."

윤희가 가방을 연다. 조그맣고 귀여운 장구가 나왔다.  또 윤희는 갑자기 윗옷을 훌렁훌렁 벗어버린다. 한복을 입으려나? 그러려면 팬티만 남가고 다 벗을 참인가? 남자인 정수가 있는데 전혀 이상해하지 않는다. 도대체 저 둘이는 어디까지 갔다는 말이야? 또 화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나설 때가 아니다. 안명수가 물었다.

"갑자기 옷은 왜 벗어?"

"위에 옷을 이걸로 입으려구요."

그녀는 색동저고리를 꺼냈다. 그런데, 소매를 많이 얇게 고쳤다. 또 길이도 청바지 바로 위 허리까지 쭈우욱 내려온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 제법 야사시하게 보이기도 한다. 저것이 개량한복인가? 한복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복인지 아닌지 진짜 헷갈린다.

윤희가 그 옷을 입고 장구를 멘다. 그녀의 몸놀림이 시작된다. 마치 안명수의 작업실이 무대인 듯 윤희는 이리저리 오가면서 장구를 치기도 하고 돌리거나 휘두르기도 한다. 정수가 손뼉으로 템포를 넣어준다. 정말 우아하다. 그러면서도 여자인 안명수가 봐도 정말 섹시하기도 하다. 저런 정도라면 박PD도 오케이 하지 않을까?

이것도 일종의 오디션인데, 무슨 오디션 준비를 20분도 안걸려서 해치우지? 그런데 박PD 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희 중간보고 오후에 하자. 나 지금 사장님 모시고 국립극장에 갔다 와야 해. 정말 미안해."

이런 것을 보고 하늘이 돕는다고 하나? 

안명수가 박PD 의 말을 전하면서 일단 점심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윤희가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데, 정수는 아까도 그랬지만, 윤희가 옷을 벗고 브래지어 차림인데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예의가 없다. 보다 못해 안명수가 한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려준다. 어디까지나 윤희를 위해서이다. 왕싸가지 왕재수 때문이 아니다.

"언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벌써 만지고, 빨고, 할거 다했는데 뭐 어때요? 하하"

"아무리 그래도 기본 예의는 지켜야지."

"언니, 엄청 보수적이시네. 누가 데려갈 지 참 ..."

"윤희가 그런 걱정까지 해주니까 난 걱정할 일이 없어졌네?"

윤희, 쟤.  말하는 것이 진짜 거침없고 또 어이없다. 요새 애들이 저런가?  안명수는 정수와 윤희를 데리고 직원식당으로 간다. 밥 먹으러 간다고 하니까 얘네들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스무살 짜리 애들 맞나? 안명수는 자신이 20살 때, 대학 1학년 때를 생각해본다. 그 때 자기는 윤희처럼 저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