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53. 박PD 의 심판 %26 저 연하남은 도대체 언제부터, 왜 껴들었는지 .. =========================================================================
드디어 연휴가 끝났다. 박PD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안명수에게 소름이 돋는다. 새벽에 잠도 안오고, 밥맛도 없다. 두려움 때문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정수를 차에 태우고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커피잔을 손에 들고 정수를 바라본다. 정수는 뮤지컬 악보를 보면서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입이 귀에 걸린 것 같다.
내 인생에 저 연하남이 도대체 언제부터, 왜 껴들었지? 세탁소에 맡긴 옷이나 배달했으면 됐는데, 어쩌다가 그 마약에 중독되는 사건이 일어난 거야? 그렇지만 나에게는 하려고 하는 일이 있고, 그 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 질 때 까지는 정수랑 같이 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는데.
그녀가 일에 파묻히다 보면 즐긴다는 생각은 싸악 가셔버린다. 자신이 마치 일하는 기계처럼 변해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안명수는 이런 인간들을 혐오해왔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 인생을 오직 일하는 것으로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요즈음은 자신이 그렇게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초록이 동색이라는데, 도대체 누가 <초> 이고, 누가 <록> 인 것일까? 저 연하남과는 절대 아닌 것 같다.
조용하던 방안에 안명수의 전화기가 전화왔다고 컬러링을 울린다. 너무 시끄럽다. 박철호 PD 이다. 벌써 출근했나? 전화를 받자마자 당장 오란다. 안명수는 지금까지 메모해 둔 것을 들고 그의 방으로 가려고 자기 방을 나섰다. 그녀는 재빨리 돌아온다. 그를 꿰어 차는 것을 깜빡 한 것이다. 불호령이 일어날 뻔 했다.
그를 데리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 새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는 없다. 기다림은 불안함을 가져왔다. 시간이 점점 지나갈수록 불안감은 더 증폭된다. 크게 잘못한 것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녀는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다. 메모한 것을 들춰본다. 자기가 쓴 메모이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의 전화기로 박 PD 가 다시 전화를 한다.
"왜 안오는거야?"
"지금 선배님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식당으로 오라고 했는데? 내 방이 안명수 식당이야? 하하하"
그들은 직원식당으로 갔다. 생각해보니까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밥도 못 먹고 돌아다녔는데, 아침을 먹지 않아서 배가 허리에 붙어있다면서 그는 분명 식당에서 잠깐 보자는 말을 했다. 그 말을 깜빡 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앞자리에 앉았다.
"마약. 아침밥은 먹었겠지?"
"아니오."
"왜 밥도 못얻어먹고 다니는거야?"
"안기자님이 바쁘다면서 .."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앞에 나가서 두 사람을 위해서 빵과 커피를 챙겨온다. 안명수의 눈에는 오늘 아침에 이러는 그가 엄청 신기해보인다. 지금까지 몇 년을 같이 일하면서 그가 안명수를 위해서 식판을 들고 음식을 가져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착각인가? 마약 때문일까? 그는 여자인 안명수보다 애처로워보이는 마약에게 더 마음을 쓰고 있음은 분명하다.
"밥은 이다가 점심때 먹고, 이걸로 우선 아침을 때워."
"감사합니다."
"잘 참고 열심히 해."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느 새 둘은 퍼즐 조각이 들어맞듯이 죽이 척척 들어맞는다. 빵 조각을 씹는데 마치 모래를 씹는 기분이다. 이것은 분명 질투이다. 그런데 웬 질투? 저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닌데 ...
"안명수. 이번 꺼 편집은 정말 잘 했던데?"
"감사합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칭찬 들으니까 기분 좋지?"
"당연하신 말씀을 .."
"그런데 칭찬은 그게 다야. 어쩌냐?"
"예?"
"우리는 공영방송이거든. 그런데 두 시간 중에서 정수에게만 22분을 할애한 이유가 뭐야?"
"신인이라서 .."
"그날 나왔던 개그맨이랑, 여성 듀엣이 항의했어."
"이러언."
"그래도 괜찮아. 상관없어. 뭐 어때?"
"예?"
"성금이 꽤 된대. 위에서는 잘했다고 칭찬이야."
"재방송 때 약간 들어오는 것 같던데요."
"재방송 끝나고 더 많이 들어왔어. 지금도 계속 오고 있대."
안명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긴장이 약간 풀린다. 성금 액수가 안명수를 또 박철호 PD를 살린 것이다. 더러운 자본주의다.
"아파트는 어쩌고?"
"2년 전세로, 윤선배 기획사에서 하기로 .."
"어디다가 구하는데?"
"정수 외숙모님 사시는 아파트로 .."
"밥은 굶지 않겠네. 하하하"
안명수의 두번째 안심이다.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그가 잊었나 보다. 이렇게 사람은 가끔씩 잊어먹으면서 살아야 주위 사람들이 조금 편해진다. 특히 천재들에게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안명수는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PD 가 천재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떨어져 살으랬잖아?"
이러언. 그는 절대로 양반도 천재도 아니다. 안명수는 박PD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 때 정수가 나선다.
"외숙모님께서 교통사고 이후로 아직 건강하지 못해서요. 기왕이면 가까이에서 살면서 어쩌다 한번이라도 ..."
"알았어. 그럼 그건 이제 난 모른다. 너희 둘이 알아서 해. 김익환 감독 만났다며? 뭐라든?"
"뭐 .. 프로 아니면 오지 말라고 .."
"너 프로 아닌데 어쩔래?"
"열심히 해야죠."
"김익환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열심히 하겠다는 말인데."
"안 그래도 벌써 한방 먹었습니다. 하하하"
"거기서는 정말 잘 해야 해. 네가 망치면 김익환은 다음부터 내 말 절대 안 들을 꺼야."
"명심하겠습니다."
"세탁소 일은 계속하나?"
"요즈음에는 시간이 .."
"그럼 안되지. 너한테는 세탁소에서 알바한다는 기본이미지가 있잖아? 너, 그거 날리면 별로야. 하루에 두세시간이라도 꼭 나가."
"예. 알겠습니다."
저 둘이 꽤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부드럽게 대화가 끝없이 이어진다. 안명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다. 두 사람에게 저런 면도 있었나? 추석이 지나고 나니까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세탁소에서 알바하는 것을 지금까지 고려하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마스크 마케팅>인 것 같다. 정수의 신선함이라고 할까? 그걸 포기하게 되면 지금까지 시끄럽게 했었던 프로그램들이 모두 뻥이 된다. 역시 박철호는 타고난 PD 이다.
"안명수. 그럼 두달 후 뮤직쇼는?"
"론칭을 12월 22일 저녁에 합니다. 추울테니까 실내체육관에서 하기로 하죠. 그래서 크리스마스 자선음악회로 론칭 겸 오프닝을 합니다."
"그 돈은 어디서 끌을래? 오프닝은 2억 짜리는 되겠니?"
"제 계산으로는 2억 넘어요. 오프닝을 워낙 빵빵하게 할 생각이거든요. 그럼 협찬하겠다는 기업들 꽤 있을겁니다. 이번에 해보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이번 오프닝도 윤현도를 메인으로 하냐?"
"아니죠. 윤선배는 파이날 때 한번 나오도록 하고 그 대신에 기성 가수랑 신인을 2대 1 정도로 섞어보려고요. 또 스토리가 있는 가수들 우선으로 세우고."
"생각이 복잡한가보네. 그럼 이녀석은 언제 넣고?"
"윤선배가 어떻게 할지를 그때 가서 두고 봐야죠. 신인쪽으로 뺄지, 아니면 윤선배 팀에서 하게 될 지.."
"윤현도 해외투어 스타트가 어떻게 되나 봐서 제 때 맞춰서 인사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쇼는 한달에 한번 하냐?”
“예. 매달 후원할 단체들을 따로 선정해서 …”
"안명수."
"예?"
"그럼 진행은 누가하지?"
"그건 아나운서실의 협조가 필요한데요."
"네가 하면 어떨까?"
"예?"
"어차피 제작도 거의 다 네가 하니까. .. 안되나?"
"제가 하면 그 프로그램을 누가 보겠어요? 프로그램 말아먹을 일 있어요? 하하"
"뮤직쇼를 앵커보고 보나? 가수들 보고 보는거지."
"에이. 저는 마스크도, 몸매도 .. 안돼요. 아나운서 한명 픽업 해주세요."
"아냐. 도전해봐."
"선배님."
"왜?"
"제가 선배님 밑에서 일 배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야아. 나는 지금 너를 키우려고 이러는 중이야. 마음에 안들면 내가 왜 이짓까지 하면서 키우겠어? 왜 그러는데? 앵커가 마음에 안들어?"
"왠지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느낌이."
"다른 여자들은 그런 쇼 진행 하나 받으려고 벼라별 추잡한 짓까지 하는데, 넌 왜그래?"
"제가 정말로 할 수 있을까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
"내가 보기에는 안명수가 제일 잘 할 것 같아. 강남에 가서 코좀 세우고. 아랫배 지방 흡입 조금만 하고 .. 그정도면 되지 않을까? 견적도 얼마 안나오겠는데? 가슴이나 힙 사이즈는 드레스가 웬만큼은 카바하니까 코디들 손에서 해결 될꺼고."
"저는 보형물 없이도 되거든요. 그런데 선배님은 하필 왜 저를 ..?"
"너는 기자 하면서 발품을 엄청 팔았지? 듣고 본 것이 많아서 아는 것도 많겠고. 그럼 순발력도 좋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이 바닥 출신이 아니라서 마스크가 깨끗하잖아. 스캔들도 없을 꺼고."
"음 ..."
"생각해보고 빨리 결정해요. 한정수, 자네 오늘 일정은?"
"안기자님이 시키는 대로 ..."
"선배님, 저는 오전에는 협찬사 찾고, 오후에는 정수 뮤지컬 보내고, 저녁에는 시나리오 만들고 .. 제가 계속 옆에 꿰어차고 다닐겁니다."
"개인 스폰하겠다고 몇개 들어온 것 있지?"
"예."
"거봐라. 잘 지켜야 해. 망하는 지름길이야. 골프장, 해외 여행 이런 거 특히 조심하고. 도박이나 마약 일체 손대지 못 하게 하도록. 찌라시 쪽 애들이 냄새 못맡게 진짜 잘 해야 해. 거기 걸려들면 약도 없어. 쥐도 새도 모르게 끝장이야.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선배님, 잘 알겠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럼 나중에 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안명수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다. 뮤직쇼를 직접 제작해서 진행까지 하라니. 저 사람 오늘 왜 저래? 명절때 무슨 일이 있었나? 원래 추석 연휴가 지나면 이혼하러 가정법원에 많이 간다던데. 혹시 이혼했나? 저 잉꼬부부가 그랬을 리는 없고 ... 아무튼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 뿐만 아니다. 오늘은 명수가 하는 말에 그다지 태클을 걸지도 않는다. 지금 까지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안명수가 제법 좋아진 것인가? 아니면 그녀에 대한 박PD의 관심이 적어진 것일까?
안명수는 어리둥절하다. 엄청 헷갈린다. 지금 분명 자신이 뜨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 이거 원. 도대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안명수는 정수와 함께 이번 방송에서 협찬하겠다고 나선 기업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제일 먼저 오성그룹이다. 가는 길에 안명수가 정수에게 말했다.
"우리도 프로그램을 만들거든. 프로그램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져.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아야 해. PD 님이나 나는 지금 너를 좋은 사람으로 철썩같이 믿고 있거든. 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지?"
"누나. 열심히 노력할께요."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그래. 누가 뭐래도 우리는 프로야. 우리가 가야 하는 목표는 항상 성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