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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3 52. 우리에게 노력은 기본이야. 그건 아무도 묻지 않아.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 문제야. (53/116)

00053  52. 우리에게 노력은 기본이야. 그건 아무도 묻지 않아.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 문제야.  =========================================================================

아파트를 전세로 얻는 문제는 세영의 손에 넘어갔으나, 중추절 연휴 때에 이 나라는 거의 스톱상태이므로 기다려야 했다. 윤현도에게서 와야 하는 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세를 얻는 문제는 윤현도의 소속사에서 숙소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떠맡기로 했다. 

자선음악회 실황을 담은 테이프는 편집실로 넘어가고, 안명수는 편집하는 일을 같이 하면서 자막을 넣었다. 또 그녀는 자료실에서 고아원이나 양로원의 실상을 보도하는 자료들을 찾아서 중간에 끼워 넣었다.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서 감사와 사랑을 나누지만, 우리 주변에 한번만 눈을 돌린다면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을 돕자. 작은 성금이라도 기부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윤현도의 CD 를 사달라. 이런 내용으로 만들었다.

안명수가 만든 이 메시지는 여행중인 박철호 PD 에게 보내졌으며, 그도 동의했다. 그래서 추석날 아침 10시에 방송하기로 했다. TV 방송사들은 이 시간에 주로 외국 영화를 내보내는데, 대부분이 재탕이나 삼탕이 많다. LBS 에서는 과감하게 방향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신선하게 아이디어를 낸 것은 박철호 PD였지만 날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작업을 한 것은 안명수였다. 

아마도 중추절 연휴가 끝나고 나면 박PD는 여기저기로 많이 불려 다녀야 할 것 같다. 하필이면 이 자선음악회는 윤현도의 음악회이고 또 그의 음악회를 이렇게 두 시간 짜리의 분량으로 방송해도 좋을지는, 윤현도의 정치적인 색채와 연관성에서 놓고 본다면, 안명수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과천시와 랏데백화점 그리고 다른 기업들이 협찬을 하고 있으므로 무난할 것이라는 것이 박PD의 생각이다. 

안명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편집을 끝냈다. 그녀가 작업을 하는 동안에 정수는 안명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편집하는 과정을 실체 눈으로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추석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보통 이 때에는 그는 포항에 있어야 하고 성묘를 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프로그램 방송을 준비하는 이 순간에 정수는 안명수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누나는 고향에 안가세요?"

"나는 고향이 서울이야.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라서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지 않아요. 산소를 돌보는 것은 신체 건장한 남정님네들이 맡아요. 벌써 다 끝냈을껄?"

외숙모 세영도 고향이 서울이다. 그래도 외숙모는 추석날 아침에 집에 잠시 갔다가 온다고 했다. 경애와 정수는 이번 추석은 서울에서 보내기로 했다. 외숙모 대신에 경애가 세탁소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안명수는 집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편집이 끝나자 바로 방송제작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PD는 론칭타임으로 이 해 크리스마스 때를 노리는 것 같다. 시나리오 작성, 진행할 앵커 선정, 대화 자료 수집 등등.. 일은 산더미처럼 많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추석날 아침 10시이다. 방송이 모두 끝나면 12시일 것이고, 정수는 11시 10분 쯤에 약 20분 정도 나온다. 안명수는 정수 한 사람의 시간으로는 많은 것 같아서 잘라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편집실의 의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안명수는 실황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 

편집 과정에서는 이번 음악회에서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장면 몇 개를 골라내서 정지화면도 제작했다. 성금을 보낼 수 있는 계좌번호를 안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화면도 한 개는 한정수의 솔로 컷을, 다른 하나는 윤현도와 정수의 듀엣 컷으로 만들었다. 다른 가수들이나 개그맨들의 장면도 한 개씩 포함시켰다. 분명 나중에 박 PD 로부터 한소리 들을 것이다.

저 철딱서니 없는 연하남은 자기를 위해서 안명수가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배려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또 이 방송이 끝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안명수는 아직 모른다. 박 PD 만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드디어 추석날. 자선음악회 녹화테잎이 전파를 타는 날이다.  안명수는 정수를 데리고 아침에 방송국으로 갔다. 집에서 TV 를 보고 있을 정도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커피잔을 손에 쥐고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다. 정수는 프로그램에 푹 빠져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안명수는 전화기로 신경이 온통 쓰인다.

드디어 박PD 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다렸던 것은 아니지만, 올 것이 드디어 온 것이다. 

"안기자, 이번에 한정수를 그렇게까지 띄웠어야 해? 연휴 지나서 나 옷 벗을까?"

"선배님, 화면에 나타난 한정수의 얼굴 표정을 보면, 보는 사람이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에 지갑을 열 것 같아서 그랬는데요."

"지금 그 말을 누구한테 하는 거야?  우리가 저들의 지갑을 열게 할 방법은, 이번에는 단 한가지거든.  음악으로 저들을 감동시키는 거야. 저들의 눈물샘을 건드리는 것은 정말 치사하고 야비한 방법이거든. 나는 아직 그런 방식으로는 일도 하지 않았고, 인생을 살지도 않았어."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한테 죄송해 한다고 일이 흘러가는 것을 바꿀 수 있나? 그런데 이거 재방송이 언제지?"

"내일 오후 두시입니다."

"시간 참 지랄같네."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지금 단단히 화가 나 있다. 안명수의 귀에는 아직도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그녀는 겁이 덜컥 난다.

그런데 성금 기부 접수를 받는 전화기에서 안명수에게 와보라는 전화가 왔다. 안명수는 정수를 데리고 달리다시피 하여 그리로 갔다. 만일 기부해온 성금만 웬만큼 되면 모든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은 생각만큼 그렇게 높지는 않다. 접수 받는 여직원이 안명수에게 물었다.

"한정수씨 매니저랑 소속 기획사를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해요?"

"그런 전화가 많은가요?"

"서서히 늘고 있는 중입니다."

"일단은 연휴 끝나면 다시 전화하라고 해주세요."

"한정수씨 개인 스폰소링은 받나요?"

"아닙니다. 스폰소링은 기업에게서만 받습니다."

역시 박PD 의 생각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 같다.  혹시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안명수는 자신이 언제 그를 따라갈까 하는 생각으로 자시 우울해진다.

안명수는 정수를 데리고 방송국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으로 갔다. 그 곳은  지금 공연 중이 아니다. 그런데도 안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누나는 연극 볼꺼야?"

"조용히 할래? 나, 지금 엄청 신경과민이거든요."

"미안요."

"철딱서니 없는 머시마야.  내가 추석날 연극 구경이나 올 정도로 할 일이 그렇게도 없을 것 같으니? 너는 언제나 PD 님 처럼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에 까지 왔다갔다 할래?"

"글쎄요."

그 소극장에서는 다음에 공연할 뮤지컬 <탐 앤 제리>를 준비하는 중이다.  안명수는 연출 감독인 김익환 감독을 불러냈다. 

"정수씨, 인사드리세요. 연출을 담당하시는 김익환 감독님이셔."

"한정수입니다. 안녕하시니까?"

"그래. 박철호 PD 님한테서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들어가서 노래 한번 들어보자."

"오늘 방송 못보셨나요?"

"보긴 봤는데요.  안기자님도 아시겠지만  TV 를 통해서 보는 거랑 여기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는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감독님 말씀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저는 벌써 떨립니다."

"자네가 만일 크로스오버라면 유리할텐데."

"많이는 못해도 아주 조금만요." 

김익환 감독은 정수의 손에 악보를 들려주었다. 정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악보를 읽고있다. 그래. 너도 악보를 읽을 때 만큼은 4차원 정도는 되는거 맞지? 우리 다 마찬가지야. 뭔가를 이루려면 3차원의 현실 만으로는 엄청 부족해.  너나 나나 방향은 다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걷는 길은 같아. 우리라고 별 수 있겠니?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싸이코패쓰라는 말을 해도 조금도 기죽을 필요 없어. 우리의 4차원적인 촉이야 말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재산이야. 드디어 정수가 악보 해석을 끝냈다는 듯이 입을 연다.

"감독님, 그럼 악기는요?" 

"네 마음대로 해. 여기 피아노. 여기는 전자오르갠, 저쪽은 통키타."

"감사합니다."

정수는 피아노를 향하여 걸어간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을 건번에 얹고 손가락을 푼다. 드디어 그의 노래가 시작된다. 제리가 톰을 놀리는 장면, 그리고 톰이 제리 때문에 화가 나있으면서도, 아닌 척 하는 장면을 나타내는 노래이다. 약간은 개그같다. 원래 이 것은 어린이 프로그램이라서 어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수는 살판이 난 것 같다. 안명수의 눈에는 제버ㅏㅂ 완벽한 것 같다. 물론 그녀는 뮤지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의 노래를 듣고있던 김익환 감독이 말했다.

"여기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몇 안돼. 그래도 다들 음악에 미쳐서 살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야. 자네는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어린 새싹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자네가 제리 역을 맡게 될 것 같아. 자네 나이가 가장 어리거든. 할 수 있겠지?"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자네도 참 너무 한심스런 말을 하네. 지금 이제 와서 노력한다면 어쩔껀데? 그거는 너희 같은 아마추어들 얘기야. 노력을 하고 안하고는 자네 개인적인 문제야.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지금까지 해온 공연해서는 모두 성공을 했거든.  앞으로도 그럴 꺼야. 우리에게 노력은 아무도 묻지 않아. 그것은 기본이야. 우리는 성공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를 물어.  우리는 CD 파는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는 공연예술가야.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거야. 성공하려고 덤벼드는 우리에게 노력이나 하면서 방해할거라면 아예 나오지 말아."

"누나, 저 이거 안하면 안되겠죠?"

"왜? 감독님이 무섭니?"

"많이요. 그것도 그건데, 제가 노래하는 스타일이랑,  이 곡들이랑 맞지 않아서 고민 생겨요. 이 곡은 어린이용 이잖아요?"

"한정수라고 했나? 자네가 만일 어떤 노래를 어린이 앞에서 불렀는데, 그 노래가 그 어린이 마음에 들었다면, 자네 실력은 엄청 좋은 거야. 어린이는 봐주거나 이해해주고 이런 것이 전혀 없어.  인정사정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어요. 반응도 완전 리얼타임이야. 좋으면 당장 그 즉시 푸욱 빠져들고, 싫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완전 쌩까요. 실력 없는 사람들은 어린이를 관객으로 하는 무대에서는 항상 실패해. 그건 동서고금의 진리야."

정수가 한방을 완전 대빵 큰 걸로 먹었다. 저 정도면 정수에게는 거의 KO 펀치이다. 안명수의 속이 후련해온다. 진짜 고소하다. 연하남아, 너 어쩔래? 너 이번에 진짜 임자 만난 것 같다. 박PD 님 진짜  짱이다. 얘한테 누가 필요한가를 정확하게 파악하신거야. 

다음주 월요일 연습부터 깉이 하기로 약속하고 김익환 감독은 정수에게 악보를 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한정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도대체 저 연하남은 지금 무엇을 고민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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