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46. 라떼백화점의 중추절 행사 : 사인회와 자선음악회 =========================================================================
정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곁에서 안명수가 하는 말도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린다. 아까 받아서 마신 술이 이제야 몸 안에서 술기운을 나타내기 시작하는가 보다.
안명수가 정수의 양 손을 주무른다. 안명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려 했지만, 그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머엉한 상태이다. 안명수는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보고, 그의 뺨을 쓰다듬었으나,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아~. .. 윤선배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데, 그 사람이랑 하루 저녁 같이 있으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모양이래?"
아마도 오랜 시간을 긴장해 있다가 이제 그 긴장이 갑자기 풀리는 것이리라. 게다가 술까지 마셨으므로 약간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안명수는 탭을 꺼내서 아까 정수가 얘기한 사인회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할 동안에 다섯 시간 동안 사인을 할 경우에 한 시간에 30명에게 한다면 150명 정도이니까 여유있게 생각해도 300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후 한시에 시작해서 여섯시 까지 사인회를 하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이어서 저녁 여덟시 부터는 자선음악회를 한다. 그러면 하루 종일 걸리는 프로그램이다. 이 음악회에 한정수를 BY 멤버로 끼워주든가 말든가는 윤현도가 결정할 일이다. 그런데 윤현도의 성격에 그는 한정수를 눈에 띄도록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정수도 그 때 까지 그의 곡들을 모두 소화해서 같이 무대에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추석은 이제 겨우 2주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런 사인회에는 윤현도가 나서야 한다. 한정수가 그 자리에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 대신에 백화점에서는 이 일정에 동의를 해주어야 하고, 사인회와 음악회를 위해서 장소와 시설을 제공하여야 한다. 오전과 오후에 무대를 설치하고, 저녁에 콘서트를 하면 된다. 이론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안명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그런데 갑자기 연하남 마약은 코를 골기 시작한다. 후훗. 또 잠이야? 이걸 어쩌지? 너는 나랑 같이 있기만 하면 마음이 푸욱 놓이는 거니? 차에서도, 식당에서도 잠을 자면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고?
그래도 윤선배의 손을 잡은 너는 축복과 은총을 뒤집어 쓴 줄 알아야 해. 그는 분명 너를 높은 정상에 우뚝 서게 할거야. 그는 너로 하여금 거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하실 분이야. 그의 어깨에 얹힌 너는 강해야 해. 거기서 너는 저 멀리 이 세상 끝까지, 그리고 어쩌면 영원의 세계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그는 너로 하여금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내도록 너를 이끌어 올리실 분이야.
안명수는 정수가 평화스럽게 잠들어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마음 속으로 You raise me up 을 흥얼거려본다. 안명수의 마음이 갑자기 뭉클해져 온다. 아무튼 부러운 녀석이야.
안명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가져간다. 규칙적이고 고른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고개를 그에게로 돌려서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어본다. 그와의 접촉을 조용히 음미한다. 그도 지금 느낄까? 잠자는 그의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핥는다. 그리고 부드럽고 가볍게 그의 입술을 두세번 빨아들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잔잔하게 소리 없이 번진다. 혹시 그가 누구와 키스하는 꿈을 꾸는 것일까? 꿈 속에서 그와 키스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얄밉다. 안명수를 혼자 남겨두고 잠자는 것도, 안명수가 모를 누군가와 꿈속에서 키스하는 것도 얄밉다.
그녀는 치열 사이로 그의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그리고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이 얄마운 녀석아. 제발 아픔을 느껴다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라.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잠을 잔다. 더 세게 물면 그가 정말로 아파할 것 같다. 그가 아파하는 것은 안명수가 싫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풀어준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두 팔이 안명수의 등을 감싸 안는다. 그도 서서히 힘을 주어 당기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의 몸 위로 쓰러지듯 안겨버린다.
"자기야. 여기는 아직 옐로우야."
"누나가 먼저 나한테 키스했잖아요?"
"하아~. .. 너를 깨우려고."
"내 미모에 빠져든 것이 아니고?"
"그런 착각이 자기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당근이지. 그것도 엄청."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나가자. 여기는 이러는 곳이 아니야. 이러다가 누가 오기라도 하면 우린 이대로 끝장이야. 이 바닥에서 완전히 생매장 당하는 거야."
두 사람은 부드럽게 키스한 후에 방을 나왔다.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홀에는 아까 들어올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저들이 심야에 이렇게 모여서 먹고 마셔대는데도 살이 찌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내일 오전에 헬쓰장에서 땀을 빼기 때문일 것 같다. 윤현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방으로 갔든지, 그러지 않으면 여기를 나갔겠지.
안명수는 계산대로 갔으나 계산은 이미 윤현도의 손에서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방송국으로 가서, 안명수의 차에 바꿔 탔다. 그리고 과천을 향해 출발했다.
* * * * * * * * * *
다음날 그녀는 박철호 PD 에게 가서 그의 앞에 간 밤에 구상해두었던 사인회와 자선음악회에 대한 시나리오를 펼쳤다.
"안기자. 왜 이래? M7 오디션 전에 한정수를 건드리면 좋을 것 하나도 없다니까."
"저도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요. 이건 다르지 않을까요? 장소가 바로 그가 일하는 백화점이잖아요."
"그렇다고 그를 무대에 같이 세우면 안되지. 예를 들면 중간쯤에 리더인 윤도현이 멘트를 하면 어때? 예를 들면 ..."
"이렇게요? : 이 백화점에 있는 세탁소가 있고, 거기에 아이돌 지망생이 알바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다는 소문을 윤현도는 들었다. 어차피 자선음악회니까 BY 는 그들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정수에게 하사하려고 한다. 관객들이 동의하면서 허락한다. .. 이 정도면 될까요?"
"그 정도로 대충 윤곽만 잡아주면 윤현도가 알아서 컴뮤니케이션 처리를 할거야. 그럼 거기서 한정수는 어떤 노래를 부르지?"
"윤현도 계열의 노래는 아직 안되겠고, 정수 노래도 아직은 발표한 곡이 아니라서 너무 낯설고. ... 차라리 외국 민요라면 어떨까요? 이런거요. 분위기로 봐서는 맞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노래를 정수가 어떤 퍼포먼스로 불러?"
"음 .. 무대를 어둡게 하고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고, 조명이 서서히 들어가면서 그는 이 노래를 부르고, 산에 세우는 부분에서 일어선다든지. .."
"어쭈? 안기자도 이젠 제법이네? 하하하. .. 그런데 말이지. ... 무릎 꿇고 안아있게 하는 것은 좀 과장이고. ..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윤현도랑은 색깔이 맞지도 않는데. ... 차라리 서서 고개 숙이고 그냥 신에게 기도하는 모습이 어때?"
"저야 뭐 .. 역시 안되네요."
"그건 아직 안기자가 무대 경험이 없으니까 그래요. 또 이 음악회는 우리가 중계방송 할 상황도 아니잖아? 그런데 곡은 잘 골랐네. 그 친구 감성적인 표정에 이 노래는 정말 딱이야. 그날 엉엉 우는 사람들 엄청 많겠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중계방송은 하지 않더라도 예능 뉴스로는 띄워볼 만 하지 않나요? 그러려면 녹화 해둘 필요는 있을 것 같은데 ..."
"혹시 그 예능뉴스라는 것에다가 한정수를 내세울 생각은 아니겠지?"
"아주 잠시만요. 5초 정도. .."
"너네 둘이 사귀냐? 안기자는 한정수 없이는 무대도 뉴스도 만들 수 없는 거냐? 내가 걔 건드리면 안된다고 말 안 했어?"
"알았어요. 뺄께요. 그럼 BY 일정으로만 편집하죠."
"정말 조심해야 해요. 그런데 사인회 할 때 정수는 뭐하지?"
"윤현도에게 간간이 음료수를 서빙 한다든지. 뭐 이렇게. .."
"둘이는 서로 모르는 걸로 하려고?"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그런데 ... 정수가 처음 서빙하러 들어가서, 처음으로 윤현도를 보는 순간에 놀라서 자빠지도록 하면 어떨까요?"
"요새 그런 것이 먹혀 들어가? 윤현도는 스크린에 간간이 자주 뜨거든. 구신 도개비도 아닌데 왜 놀래서 자빠져? 그거는 개콘에나 나올 법한 얘기야."
"음 ... "
"차라리 서빙도 집어치워요. 사인회에는 일체 나타나지 말라고 해.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에다가 포커스를 맞추면 충분히 깜짝 이벤트가 될 것 같다. 그 전에 얘를 미리 내놓으면 스토리가 김이 새버려서 진짜로 엄청 이상해져요."
안명수가 하룻밤 동안에 어설프게 짜맞춘 시나리오는 박 PD 의 손에서 검토와 수정이 들어갔다. 그 작업이 모두 끝나자 안명수는 완성본을 윤현도와 그의 매니저인 강영훈에게 동시에 이메일로 보냈다. 윤현도는 찬성했고, 강영훈은 즉시 백화점과 작업에 들어갔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둘러야 했다. 강영훈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이틀 전을 D-Day 로 하자고 말했다. 이 사실은 그날 저녁에 안명수가 바로 세영의 세탁소로 가서 직접 전했다. 안명수는 세영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사장님, 이번 행사에는 한정수가 절대로 눈에 띄지 않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안그러면 정수나 저에게 큰일 나요. 아시겠죠? 한정수가 BY 랑 같이 음악한다는 것도 아직은 철저하게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정말로 윤현도가 여기로 오도록 해주시는 거죠?"
"제가 하나요? 이건 어디까지나 윤선배가 하는 일이죠."
"와앙~. .. 윤현도가 온단다! 이거 믿어도 되는 거야?"
흥분한 세영은 안명수랑 경애를 남겨두고 세탁소를 뛰쳐나간다. 두 사람은 세영의 뒤태를 보고 배를 잡고 웃는다.
세영은 추석을 앞두고 빡씨게 일해야 하는데 미리 회식을 하자는 말을 매장의 점주들에게 전해서 그들을 불러냈다. 세영은 그 자리를 백화점 측은 아예 관계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점주들만의 단합대회 같은 성격을 갖도록 꾸몄다.
그 자리에서 세영은 그들에게 윤현도의 사인회와 자선음악회에 대한 계획을 알리고 미리 준비를 해두도록 말을 흘려주었다. 세영의 말을 듣고 그들은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고 했으나, 나중에 점주들의 입은 귀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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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화점의 영업부와 마케팅부에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총무과장은 기절하기 직전이다. 원래 BY 를 부르려면 몇달 전에 예약을 해두어야 할 정도로 일정을 잡기도 어렵고, 비용도 엄청 비싸다. 백화점으로서는 그들을 불러서 초청공연을 연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제발로 와서 행사를 해주겠다니.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어떻게 활용한다?
그런데 마케팅 부장은 뭔가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낀다. 이 계획 어딘가에 한정수가 숨어있는 것 이 틀림없다. 그런데 한정수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투명인간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세탁소에서 BY 에게 어떻게든지 손을 썼다는 말이 되지만 앞뒤가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케팅 부장은 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그는 강영훈과 함께 행사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를 홍보하고, 백화점 뒤 쪽에 있는 공원에서 무대를 설치하고 음악회가 열리도록 준비를 했다.
안명수는 사인회를 하는 날 한정수를 아예 방송국으로 불러서 잡아둘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세영의 세탁소에는 노이지 마케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있을 줄 알고 가보니까 없다면서 약간 소란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그거야 세영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 대신에 세영에게 경고는 했다.
작은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이 해에도 추석은 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갑은 얄팍하다. 그래도 서로 정을 나누는 사람들과 감사하면서 작은 선물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은 백화점에 온다.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가격표를 보고 나면 한숨만 내쉬고 발길을 돌린다. 이러는 어느 날 윤현도와 BY가 온다는 내용의 커다란 현수막이 벽에 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