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39. 선물을 샀으면 정성껏 예쁘게 포장을 하잖아? =========================================================================
세영이 말하는 것을 경애가 옆에서 돕는다.
"우루루 몰려드는 사람들이 자꾸 너를 찾는거야. TV 에서는 분명 여기서 알바한다고 했는데, 왜 없느냐면서, 뻥친거였느냐고 외숙모한테 따지는 사람들이 많았어."
"누나,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해?"
"요새 오디션 준비 때문에 매일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만 나온다고, 외숙모가 급한대로 때워넘기기는 했는데, ..."
"경애야, 차라리 그럼 입구에 안내 팻말을 세워놓을까? <오늘은 마약이 아르바이트 하는 날>, <오늘은 마약이 나오지 않는 날> 뭐 이렇게. .. 하하"
"외숙모, 그럼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하여간에 골치아파졌어. 그러니까 정수 네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것 같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나오도록 해. 어디까지나 팬관리 차원에서 말이야."
"외숙모, 알았어요."
세영의 아이돌 세탁소를 찾는 사람들은 더 많아진다. 그들은 옷보따리를 들고 와서 두리번거리면서 정수를 찾는다. 정수가 없다고 하면 대부분이 허탈한 표정을 짓지만, 정수가 다음 오디션을 준비하느라고 엄청 바쁘다는 말을 해주면 그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어디가나 항상 있는 똑똑이 진상 고객들은 세탁소에도 있다. 그들은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전수를 보러왔는데 억울하다면서 세영에게 항의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세영은 그들을 달래면서 진정시켜야했다.
"지난 번에 실패한 이후로 이를 갈고 있어요. 이제 전국 예선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요새는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것 보다는 오디션 준비로 엄청 바빠요. 마약이 지금은 제 직원이지만, 저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네요. 고객님께서도 응원좀 해주세요."
"아니, 응원을 해주려고 해도 있어야 해주죠. 이렇게 찾아와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구신 도깨비를 어떻게 응원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정수가 근무하는 날이나 또는 배달이 가능한 날을 알리기 위해서, 세영은 자기가 말한 대로 당장 입구에 세울 팻말을 준비했다. 세탁소에서 자칫 잘못하면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미리 막아야 했다.
정수는 그 날은 하루 종일 BY 밴드의 강영훈 매니저를 만날 준비를 한다. 집에서 스스로 키보드 연주를 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연습했다. 또 지금까지 자신이 틈틈이 녹음한 곡을 들었다. 정수가 헤드셋을 끼고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것에 마치 집착하다시피하는 것을 경애는 옆에서 지켜본다. 경애는 정수가 갑자기 이렇게 열을 올려서 연습하는 이유를 아직은 모른다. 정수는 경애나 BY 밴드에 대해서 세영이나 경애에게 아직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만일 생각대로 되지 안될 경우에 그녀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이다.
안명수 기자는 방송국에서 박철호 PD 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떠오르는 다른 아이디어가 있는데, 이번에도 그것을 꼭 시나리오로 쓰고 싶기 때문에 그와 의논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 그는 하루 종일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는 또 어딘가에서 몇차원의 세계를 방황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집에서 정수를 기다리기 위해서 일찍 퇴근했다.
저녁 5시가 되자 경애가 정수를 안명수의 집 앞에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차에서 내리는 그를 볼 때 경애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가 요즈음 안명수와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건물 입구에서 안명수의 집 벨을 누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경애는 머리를 흔들었다.
물고기가 장래를 위해서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기는 한데,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 쳐박혀서 연습만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그녀에게 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지금 안명수를 큰 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아니면 둘 사이에 썸타기가 서서히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이 불안함은 왜 그리고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정수가 안명수의 현관 앞에 와서 벨을 눌렀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서는 정수를 꼬옥 안았다. 그런데 오늘은 두 사람 다 안고 안기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다.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데?"
"누나, 미안해요."
안명수는 그에게 음료수를 권하고 외출 준비를 마저 끝내려고 서두른다. 그런데 박PD 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다. 그녀가 그 전화를 받자마자 박PD는 대뜸 화를 낸다.
"아직 일과 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안기자는 지금 도대체 어디 쳐박혀 있는거야?"
"마약이랑 BY 연습실에 가려고 하는데요. .. 강영훈씨랑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강영훈 그친구가 왜 나서는거야? 그래서, 걔가 오디션이라도 하겠대?"
"글쎄요. 곡 3개 정도 갖고 7시까지 늦지않게 오라고 하던데요."
"알았어. 그럼 가 봐요. 내가 윤현도한테 지금 전화 넣어줄께."
"선배님, 고맙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나서 그를 차에 태우고 바로 출발했다. 안명수가 강영훈을 만나겠다고 말했는데, 박PD는 왜 윤현도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것인지를 안명수는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수는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디션 전에 이렇게 긴장과 흥분에 온몸과 정신이 휩싸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평정을 되찾으려고 마음은 먹어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뭔가가 엄청 불안하다.
그들이 강영훈의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그 자리에는 윤현도도 같이 있다. 안명수와 윤현도는 잘 아는 사이이다. 그가 매주 일요일 밤 늦게 방송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박PD와 함께 작업할 때 몇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윤선배님께서 어쩐 일로 직접 나오셨어요?"
"박PD가 가보라고 하던에요. 하하하"
정수는 하늘같은 윤현도라는 존재 앞에서 그만 기가 죽어버린다. 그 앞에서 불안이나 긴장 따위가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다. 박PD 에게서처럼 그에게서도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와는 감히 얼굴을 마주볼 수도 없다.
윤현도가 정수에게 말을 몇마디 하는데, 윤현도의 목소리는 참으로 따뜻했다. 어제 옐로우에서 박PD에게 쓴소리를 들은 이후로 오늘 하루 종일 정수는 연습에 치중하기는 했다. 그런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도 하루 종일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윤현도에게 인사를 하고, 또 윤현도가 던지는 몇마디의 칭찬하는 말을 듣자 서서히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다.
강영훈은 그를 피아노 앞으로 불러냈고,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가 눈을 질끈 감은 것은 오로지 자신과 그리고 노래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안명수도, 강영훈도 그리고 윤현도까지도. 마치 하늘과 땅 사이에 피아노 한대가 놓여있고, 거기에 자기 혼자만 앉아있는 것처럼.
그의 열손가락이 피아노의 건반을 따라 현란하게 춤추기 시작한다. 그는 하루 종일 연습한 곡 중에서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있는 안명수에게는 두 눈이 젖을 정도로 애잔한 목소리이다. 가슴을 후벼파듯이 그의 노래가 밀려 들어온다. 그가 부르고 있는 사랑한다는 그 노래가 마치 자신을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해본다.
그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갈 무렵 윤현도는 갑자기 크게 손뼉을 쳐버렸다. 그것은 정수에게 이제 그만 중단하라는 의미이다. 모두들 윤현도를 바라본다. 정수에게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다. 또 실패인가? 이제 정수는 눈을 뜨고 윤현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일 실패로 결정이 난 것이라면 무엇을 더 고민한단 말인가? 정수에게는 M7 의 오디션이라는 마지막 카드 한장이 아직은 남아있다.
"자네는 지금 청중 없는 노래를 부를 셈인가? 나나 강선생님, 그리고 안기자를 개무시할 생각이야? 왜 눈을 감는거야? 한명이든 몇천명이든 청중은 청중이야. 그들이 지금 원하는 것은 바로 너의 노래를 듣는 것이야."
"저에게 더 집중하려는 생각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너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지.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감정이나 마음을 바로 정수 네가 어루만져주고 쓰다듬기를 원해.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너는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해. 그러려면 교감이라는 것이 생겨야죠.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과 무슨 수로 교감을 할해? 눈이 마음의 창 아닌가? 너는 아직은 무명이기 때문에 눈을 맞춰야죠. 또 그래야 가슴이 맞춰져요. 가슴에서 가슴으로 노래가 가야 한다고. 그런데 눈을 감아버리면 어쩌자는거니?"
"시정하겠습니다."
"<내 사랑을 받아줘>라는 부분을 노래할 때에는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질질 짜면 안되죠. 너와 사랑하는 너의 그여인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구걸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감해서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 제가 아직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
"그러니까 노래가 방황하죠. 한시 바삐 사랑을 시작하세요. 사랑을 해보지 않고, 뻔뻔하게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면, 실패라는 티켓을 이미 확실하게 예약한 거나 마찬가지야. 사랑의 실패나 이별을 체험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런 것을 노래하고 몸짓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꼴볼견일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파트너가 없으면 내가 안기자님께라도 부탁해드릴까? 하하하"
"아니... 그러실 필요는 .."
"내 말은 농담이 아니었어. 만일 안기자님 말고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면 다행이군. 그리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려는 것은 좋지 않아. 인간이 가진 솔직한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 사악하고 추악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결코 아름답지 않아요. 선물을 샀으면 정성껏 예쁘게 포장을 하잖아요? 자네의 감정도 음악이라는 것을 통해서 절제라는 포장지로 더 아름답게 포장을 하는 거야. 일단은 포장에 정신이 팔리도록 말이야. 우리는 음악을 해야지, 감정에 휩쓸리면 우리의 수명은 얼마 못가요."
정수는 다음 곡을 노래하고, 윤현도는 또 맹공격을 퍼부었다. 윤현도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정수는 그가 마치 자신의 옷을 모두 벗기는 것 같았다. 적나라하게도 정수에게 숨겨져 있던 자신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정수에게 이렇게 속시원하게 가슴이 뻥 뚤리는 비평을 해 준 사람이 없었다.
정수는 그가 준비한 마지막 세번째 노래를 끝까지 모두 불렀다. 윤현도는 정수에게 손뼉을 쳐주면서 그를 불러들였다.
"안기자님, 박PD 이 사람 정말 귀신이야, 귀신. 도대체 어디서 이런 꼬맹이를 찾아낸거야?"
"그럼, 윤선배님 마음에 드신다는 말씀이세요?"
"들기만 해요? 오늘부터는 나도 이친구의 팬인걸요. 하하하."
"한정수가 한시름 덜었겠구나. 하하하"
"한시름 덜다뇨? 저는 지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당장 내 연습실에 나오도록 해요. 일주일에 두세번씩은 피나게 연습해야해요. 발성부터 확 뜯어고치는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는 지금 노래를 기교 한가지로 부르려는 몸부림이 너무 강하단 말이야. 또 키보드는 무대에서 혼자 연주하는 독주가 아니고, 다른 멤버들이랑 같이 연주를 해야하니까 호흡이나 생각도 다 같이 맞아야 하고 ..."
윤현도가 하는 이 말을 들은 정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서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얼마동안 같이 연습을 해보면 그 때 가서 자네도 알게 될거야. 자네가 탄 배가 자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맞는 배인지. 감사는 그 때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요. 일단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윤현도는 정수의 손을 굳게 잡고 악수를 했다. 그의 눈에서 나오는 강력한 광선은 정수의 머리를 완전히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는 것 같다. 정수의 손을 잡은 윤현도의 손으로부터는 윤현도로부터 엄청난 에너지가 전달되어온다.
윤현도 안기자와 강영훈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강영훈이 안명수에게 말했다.
"일단은 내일 방송국에서 박PD님을 뵙고 난 후에 제가 더 자세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안명수가 정수를 놀렸다.
"너, 이제부터 그 손 씻지마."
"엥? 손을 씻지말라고?"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에서 그가 어느 정도인가는 너도 알고 있지? 그런 사람이랑 악수를 했는데 어떻게 손을 씻어? 하하하"
정수는 마치 몇년 동안 쉬지않고 일한 것처럼 에너지를 탈진하다시피했다. 안명수의 차안에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안명수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잠이든 그를 조용히 바라본다. 정말 평화스럽게 잔다.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것 같다. 이럴 때는 마치 어린 애 같다.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걸까?
정수가 만일 윤현도의 그림자 속에 들어있으면,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진 비바람을 웬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바람막이로만 사용하지 말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텐데, 너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거든. 윤현도가 과거에 했던 고생이나 경험을 너는 모를 것이다. 너는 언제 그만큼 클래?
그녀는 윤현도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냈다.
'파트너가 없으면 내가 안기자님깨라도 부탁해드릴까?'
사랑? 그게 뭔데?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당장 이 애송이랑 확 시작해버려?
안명수는 세상 모르고 곤하게 자고있는 그를 흔들어서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