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38. 서로를 떠나지 말고, 서로에게 잊혀지지 말자. =========================================================================
안명수는 박PD 가 시킨대로 아직 방송국에 있는 작곡가 박창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PD는 지금 식사 중에 급한 연락을 받고 나갔으며, 오늘 저녁에는 더 이상 방송국에 돌아오지 못하므로, 박PD가 다음 주에 촬영장에서 만나자고 전하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투덜거리는 그의 말을 한동안 들어주고 나서 통화를 끝냈다.
그 다음에 안명수가 전화한 곳은 BY 의 매니저 강영훈이다. BY 라고 하면 인기나 실력 면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5인조 록그룹이다. 이 BY 의 리더이자 보컬을 윤현도가 맡고있다.
안명수는 강영훈에게 전화를 했으나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를 기다린다는 문자메시지를 그에게 보냈다. 정수는 숨을 깊게 내쉬면서 와인 한모금을 마신다.
"스테이크나 아니면 샐러드라도 더 먹을래?"
"배도 고프고, 먹고도 싶은데, 지금 이 상황에서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아요."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명수는 자기 차에 정수를 태워서 과천 자기 집으로 향했다. 안명수는 그에게 뭔가 말을 시키지만, 정수로부터 오는 대답은 영 시원치않다. 정수는 뭔가를 열심히 생각 중이다. 안명수는 그가 염려된다. 그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판단을 잘 못 내려서 또 무슨 실수라도 할 것만 같다.
"무슨 생각 해?"
"별 일 아녀요."
"웃겨. 별 일 아닌 것을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푸욱 빠져있냐?"
안명수는 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늘 하던 대로 그는 TV 채널을 돌리고, 그녀는 샤워를 한다. 안명수가 물줄기 밑에 서서 오늘 하루의 일을 생각해본다.
그녀의 방송 시나리오는 결과로 놓고 본다면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뚜껑을 열어본다면 그것은 안명수의 성공이 아니고 박철호 PD 의 성공이다. 안명수는 그녀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부터 각 장면의 영상까지 그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다 뜯어고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안명수는 이번 기회에 박PD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다음에는 그의 도움이 없이 자기 힘만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언제쯤이면 자신도 박철호 PD 처럼 해낼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는 PD 이고 자신은 기자이다. 서로 가는 길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건 자신이 해결해야할 과제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안명수는 자기가 한정수을 박 PD에게 소개한 결과가 돼버렸고, 박 PD 는 그를 좋게 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 일을 놓고 보면, 박 PD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정수의 POWER 스위치를 ON 으로 넣고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점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 흐름을 타야한다는 쪽으로 촉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정수가 매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지금 연예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런데 정수는 왜 기획사와 손을 잡지 않는 것일까? 혹시 말로만 듣던 노예계약이라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일까? 박PD는 안명수에게 현실적인 것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고 질책에 가까운 말을 했다. BY 가 소속해 있는 한별기회사에 강영훈에게 정수를 소개해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명수는 샤워를 마치고 정수와 함께 와인 잔을 기울였다.
"마약 너 엄청 나쁘거든."
"나는 누나한테 그런 소리 들어도 싸요."
"왜그러냐고 뎀벼야 스토리가 되는데?"
"하하하. 이제 눈치 챘어요. 나에게 왜 나쁘다고 하시는데요?"
"샤워를 하고 나면 상큼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지금 그렇지 않으세요?"
"하기 전보다 더 찝찝해."
안명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누나 동생 하면서 인정상 그에게 도움을 주는 척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기도 따라서 뜬다는 전제하에서, 이렇게 그녀의 엄격한 계산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기왕 여기가지 온 것. 앞으로 시나리오 하나를 더 써? 이 남자의 에이전트를 직접 해버려? 정수의 주변에서 뭔가 하나를 더 만들어? 더 이상 우려먹을 무엇인가가 있기는 할까?
그런데 BY 의 에이전트 강영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수는 또 혈압이 치솟는 것 같다.
"오늘 박철호 PD 님이 BY 그룹에 키보드로 한정수가 어떠냐면서 강추하신다고 전하라는데요."
"안기자님, 그 한정수라는 애가 지금 몇살이죠?"
"스무살 정도?"
"윤현도네는 지금 40대인데... 같이 음악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요?"
"저도 그 점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
"박 PD 님이 그걸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실 리는 없잖아요?"
"음악은 돨 것 같은데 무대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일단 내일 제 사무실로 보내주실래요?"
"그야말로 엄청 빡씬 오디션이겠네요."
"저녁 7시니까 늦지 않게 오고, 곡 세개 정도를 준비해와서 저를 찾으라고 하세요."
통화를 끝낸 안명수가 정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한별 기획사에 있는 강영훈의 사무실을 정수가 알 리가 없다.
"하아~. 내일 내가 데리고 가야겠네."
"그럼 M7 오디션에는 나갈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
"PD 님이 그러셨어. 왜 M7쪽으로만 생각하느냐고. 그쪽도 어차피 마지막 결승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말도 사실은 완전히 빈 말 만은 아니거든요."
"갑자기 허탈해지네요. 그동안 헛삽질을 했다는 .."
"네가 이 길을 이만큼 왔으니까, 이렇게 예쁜 누나도 알게되고, 또 박철호 PD 님을 만난 일도 생각해봐. 완전히 뻘짓만 한 것은 아니지."
"박 PD님 말씀은 생각을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하라는 말씀이야. 그렇다고 준비해온 M7 오디션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내세요."
"알았어요."
"오늘 그 식당에 자주 오라는 말은 무슨 뜻인줄 알기나 해?"
"글쎄요?"
"어머머. 얘 완전 바보아냐?"
"모르면 바보란 말이야?"
"하늘같이 고마우신 이 누나한테 자주 밥사드리란 말이야. 알겠어? .. 하하"
이 향긋한 여인이 오늘도 역시 귀여움을 한껏 발산한다. 웃을 때에 입술 사이로 약간 드러나는 하얀 치열도 가지런한 것이 정말 예쁘다. 귀에서부터 목선을 따라서 가슴까지 흐르는 안명수의 옆라인은 정말 환상이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이 여인은 역시 마음까지도 아름답다. 안명수의 이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요즈음 정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다. 이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곡을 쓰면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질 것 같다.
가수는 노래부르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덤벼들었던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었던가로 오늘 저녁 내내 고민했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다가올 것인가에 대해서 두려움마저 엄습해오기도 한다.
"누나."
"응?"
정수는 이렇게 그녀를 불러놓고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한다. 안명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 귀여운 표정이 아까부터 자꾸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가 과감하게도 자기 오른 팔을 뻗었다. 그의 팔은 그녀의 어깨를 두른다. 마치 명수가 그의 팔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몸이 정수에게로 기대온다.
이것은 향수 냄새가 흩어지면서 풍기는 냄새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 안명수 그녀의 향기이다. 그녀가 나풀거리면서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녀로부터 향기의 파동이 솔솔 그의 코를 자극한다.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깨에 살포시 얹히자, 그의 마음이 강하게 진동한다. 그의 숨결이 따라서 심하게 떨린다. 그의 떨리는 숨결이 그녀의 머리로 쏟아진다. 그녀의 마음도 따라서 떨린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간다. 두 사람의 입술은 붉다. 두 사람의 붉은 입술이 포개진다. 안명수의 몸이 움찔한다. 두 사람의 숨이 멎는다. 말랑거리는 명수의 입술 때문에 정수의 입에서는 그만 신음이 나와버린다.
명수는 얼른 입술을 떼고, 두 팔로 그의 몸을 안아버린다. 정수도 그녀의 몸을 당겨서 안는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된다. 명수의 젖가슴은 그의 가슴을 눌러온다. 그녀의 멀굴은 다시 그의 어깨로 향한다. 명수가 정수를 부르는 목소리도 떨린다.
"마약아."
"응?"
"우리는 앞으로 같이 해내야할 일이 많아."
"나한테 누나가 있어서 고마워."
"우리 ... 이런 식으로 얽히는 것은 싫은데."
"미안해."
"하아~..."
명수는 한 팔로 그의 목을 감아서 당긴다. 더운 두 뺨이 마주 닿는다. 정수는 명수의 등을, 또 명수는 정수의 머리를 당긴다. 두 사람의 얼둘이 돌아가면서 입술은 다시 닿는다. 이번에는 정수가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인다. 그녀도 그의 입술을 빨아들인다.
"하아~. .. 어떻해."
안명수는 입술을 떼고 다시 두 뺨을 마주댄다. 거친 숨만 색색거린다. 정수의 몸을 덩겨 안아서 둘의 몸은 더 가까이 밀착된다. 명수가 그를 당기면 당길수록, 안으면 안을수록,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명수의 마음은 그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더 갈급해진다. 온 몸이 떨려온다.
"자기야."
"응?"
"참으려니까 괴롭지?"
"누나, 걱정마세요. 저는 참을 수 있어요."
"자기 나이에 그게 돼?"
"누나니까 돼요. 안돼도 참을께요."
안명수도 정수의 나이를 거쳐왔다. 명수가 정수의 속마음을 왜 모를까? 그렇지만 명수는 은근히 정수가 조금 더 적극적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나. .. 무서워."
"왜?"
"너를 잃어버릴까봐 두렵다."
"걱정하지마. .. 나는 누나를 떠나지 않아. .. 떠날 수 없어."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너를 잃어버릴 것 같아."
"누나. ..."
정수는 안명수가 왜 걱정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안명수의 말대로 안명수가 그를 잃으면 그도 안명수를 잃게된다. 그러나 그에게 안명수는 결코 잃어서는 안될 사람이다.
"우리, .. 서로를 떠나지 말고, 서로에게 잊혀지지 말자."
"그런 소리 하지마. 나는 누나를 떠나지도 못하고 잊지도 못해."
안명수는 그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내일 곡 세개정도 준비 잘 해."
"잘자요."
정수는 아쉬운 마음으로 명수의 집을 나서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서는 경애와 세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수를 보고 세영이 말했다.
"나 .. 정수 때문에 세탁소 문 닫아야 할까봐."
"왜? .. 무슨 일 있었어요?"
"세탁소에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왜 너만 찾냐?"
"오늘 그랬어요?"
"내가 너를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
세영은 마치 그에게 뭔가를 항의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