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26. VIP 고객 박하나 : 돈에는 검은 돈과 흰 돈이 있어. =========================================================================
드디어욕실에서 나던 물 소리가 끝났다.
어떤 모습으로 그녀가 나올까?
목욕가운?
수건으로 가릴까?
그냥 손으로만 대충 가릴까?
물론 정수가 진심 원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마지막이다. 그의 나이도 피끓는 20살이 아닌가? 그런데 박하나도 과연 그의 생각과 같을 지는 의문이다. 그럴 확률이야 엄청 희박할 것이다. 그래도 그는 혼자서 기대를 하고, 또 도박을 하고, 기뻐하거나 낙담할 것이다. 마치 롯또를 하듯이. 다 알면서. 그래도 한번 더 .. 혹시 알아? 알긴 .. 개뿔. 개가 뿔 있냐?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딸깍> 하고 났다. 그는 얼굴은 TV 화면을 향하고는 있지만 그의 눈길이 가는 곳은 욕실 문 쪽이었다. 손을 들어서 이마를 긁는 척도 해본다.
그런데 박하나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정수는 마음 깊이 실망한다. 아마도 상처를 받은 듯. 그것도 엄청 크게. 이렇게 되면 기다림은 보람도 없고, 별 의미를 갖지도 못한다.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박하나는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독심술이라도 사용하는지, 그에게 웃음을 내뿜고, 가운을 찰랑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무엇일까?
저 웃음의 의미는 ....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다. 그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면서 약올리는 그녀가 얄밉다.
이제 그는 TV화면을 꺼버렸다. 그에게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다. 많이는 말고, 약간만.
벨이 울리자 정수가 테이블에 있는 박하나의 지갑을 들고 문으로 갔다. 돈을 꺼내서 주고 치킨을 받아서 손에 들었다. 바깥 세상과는 담을 쌓겠다는 듯 박하나의 방으로부터는 헤어드라이어 소리만 들려온다. 그가 소파에 있는 테이블에 세팅을 해야했다.
드디어 박하나가 나왔다. 그런데 목욕가운이 아니라 반바지에 라운드티이다. 한마디로 짧고 깊다. 더 말해서 무엇하랴.
두 사람은 얇은 비닐 랩 장갑을 손에 끼고 젖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서 조각난 닭고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뼈가 없는 순실치킨이어서 먹기에는 좋았다.
"너네 사장님, 지난 번 소송 때문에 기분 나쁘다고 안해?"
"별로요."
"못쓰게 돼서 버려야 할 바지를 왜 달랜대?"
"글쎄요."
"나 몇살 같아?"
"나랑 동갑 같아요."
"뻥쟁이네."
"진심."
"바보거나."
"왜요?"
"네다섯살 아래위로 보는 것은 몰라도 열살 넘게 붙이고 떼면 어떻해?"
"여자 나이는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고무줄?"
"그럴 수도."
"여자 나이는 물어서도 안되고 알아서도 안돼"
"알았어요."
그녀는 그와 함께 와인으로 목을 축인다. 분위기가 제법 화기애애해 졌다. 음란마귀보다는 닭이 우선이다.
"밤 10 시에 치킨, 피자 이런 배달 음식 .. 안좋은데."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니까요."
"있긴 있어."
"뭔데요?"
"후훗! .. 안먹고 그냥 자는 것."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 헤헤!"
"그래. 혼자 살면 저녁 먹는 것이 정말 큰 문제야."
그렇지만 정수는 세영과 같이 저녁을 꼬박꼬박 먹는 편이다. 그가 기름에 번들거리는 박하나의 입술을 본다. 아름답고 또 키스하고 싶은 그런 입술이 전혀 아니다. 정말 볼상사납다. 그렇다고 정수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마약아."
"예?"
"너 여기로 매일 배달 오게 할까?"
"그건 좀 아닌 듯."
"마약이랑 같이 먹으니까 엄청 좋아."
"아루리 그렇다고 .. 매일 배달 음식만 드시게요?"
"가끔 나가서 먹기도 .."
"그럼 나가서 먹는 날만 배달하면 안될까요?"
"나쁘다. 그럼 매일 나가서 먹으면 되지."
"흐으음. .."
어느새 닭고기가 가득 들어있었던 종이팩이 비었다. 인간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박하나의 재빠른 몸놀림 덕분에 소파 앞에 놓인 탁자는 깨끗해졌다. 두사람은 양치도 했다. 촛대에 양초가 꼽히고, 촛불이 밝혀졌다. 거실의 조명은 아주 희미해졌다.
은은한 불빛을 내는 촛불앞에서 마시는 선명하게 빨간 색의 포도주. 정수는 감탄하는 수 밖에 없다. 빨간 색이 아름답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빨간 색의 옷을 입은 여자가 아름다워 보이기는 정말 어렵다. 오히려 요염하고, 자극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밤에 은은한 불빛에서 와인을 마시는 젊은 남녀의 음흉한 마음을 정수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마신다. 그러면서 자신은 음흉하지 않다고 자신한다.
"마약은 어쩌다가 음악을 하게 됐어?"
"그냥 .. 뭐. ..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요?"
"중2병 하고는 상관 없나?"
"저요. .. 중 2 때는 완전 모범학생이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지금은 엄청 타락했니?"
"세탁소에서 어떻게 타락해요? 참나~"
"저녁에 이렇게 여자 고객들한테 배달가고 ..."
"그럼, 저 가게 얼마 안가서 문 닫겠죠?"
"흠 ..."
"왜요?"
"아냐. .. 마약아!"
"예."
"내가 누나하면 안될까?"
"공짜로는 안되는데 ..."
"뭐가 필요해 .. 혹시 돈이면 돼?"
"이러언. 여기서 왜 돈 얘기가 나오죠?
좋아요. 돈이라고 해요. 얼마 내실래요? 하하하"
"글쎄? 한 2억 정도면 되겠어?"
"에이~. 제 농담을 농담으로 받으시는 거죠?"
"나, 돈은 많아."
"혹시 롯또에 당첨되셨어요?"
"그런 거 안해도 돼."
"어디서 났는데요? .. 유산? .. 이혼 위자료?"
"씨잉~ .. 별 드러븐 거는 다나오네."
"미안해요. 이에는 이, 눈네는 눈, 농담에는 농담. 하하"
"나 농담 전혀 안했는데? .. 마약한테는 누나가 뭐하는 여자 같아?"
"대학교 교수님? 아니면 회사의 높은 임원?"
"비슷하게 가깝게 가기는 갔네."
"그럼 학교 선생님? 아니면 회사의 과장 정도?"
"그런 쪽은 전혀 아니고. .. 높은 임원의 비서."
"여비서?"
"응, 증권회사에 다녀. 나는 상무이사를 모시고 있고."
"그럼 일도 엄청 힘들겠다."
정수는 그녀와 하는 이야기에 마음이 솔깃해진다. 그런데 동생하자고 하면서 엉뚱하게도 2억이라는 돈을 내겠다고 했다.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동생이라는 것도 요새는 돈주고 사는 시대인가?
2억 정도를 순순히 내놓겠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라면, 롯또를 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돈이 있다면 이 여자는 도대체 돈을 알마만큼 가진 여자일까?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렇게 돈이 많은 여자가 기껏 22만원짜리 바지 한개 때문에 법정 소소을 하다니. ...
정수가 박하나라는 이 여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풀수 없는 수수께끼라고나 할까?
"마약아. .. 음. .. 돈이라는 것은 말이지. ..."
"예."
"너, 비밀 지켜줄래?"
"약속할께요."
"정말?"
"진심."
"무덤까지?"
"무덤까지."
"손가락!"
"손가락!"
"하아~ .. 내가 마약한테 이런 말까지 하다니."
"부담되시면 안해도 돼요."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힘들어."
"엄청난 비밀인가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면서 이 난리인가? 정수의 궁금증이 더 쏠린다.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다. 그녀가 말할까 말까를 몇번을 망설이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비밀을 지켜야 할 정도의 일이라면 정수에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돈은 말이지. 물론 세탁소를 해서 벌 수도 있어."
"그렇죠."
"문제는 .. 그렇게는 많은 돈을 벌기가 어렵다고, 알겠니?"
"무슨 말씀이시죠?"
"이 세상에는 <검은 돈>과 <흰 돈>이 있어."
"왜죠?"
"<흰 돈>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또 일해서 벌 수도 있는데 ..
그 돈은 우리 나리에 있는 전부를 닥닥 긁어모아서 다 합해도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야."
"예에에."
"돈이란 대부분이 <검은 돈>이야.
이 돈은 엄청 많은데도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 눈에는 안보이거든.
이 <검은 돈>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야.
이 사람들은 <검은 돈> 을 주무르는 <검은 손> 을 가진 사람이야.
이 사람들이 이 <검은 돈>을 아무도 모르게 전혀 다른 곳에 쌓아두고 있어.
그들이 바로 이 <검은 돈>으로 하는 거래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해.
너, 혹시 <비자금> 이라는 말 들어봤니?"
"예."
"바로 이 <비자금> 이라는 돈뭉치도 검은 돈의 일종이야."
"그건 그렇겠네요."
"뉴스에 가끔 뜨지? 누가 해쳐먹은 돈이 몇백억 어쩌고 하잖니?"
"맞아요."
"월급쟁이는 한평생 저축해도 몇억 벌기 어려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에 그렇게 큰 돈을 손에 넣을까?"
"글쎄요."
"국가에서 하는 정책 자금을 빼돌려오기,
회사의 돈을 횡령해서 빼돌리든가,
투기나 도박을 하든가 .. 알겠니?
이런 돈들이 몇백억 짜리 돈뭉치들이야.
이런 돈뭉치들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게 여기 저기를 마구 돌아다녀.
그 돈을 잡는 사람들이 바로 <검은 돈>을 주무르는 <검은 손>을 가진 사람들이야."
"누나 말을 듣고 보니까 엄청 비참해지네."
"그런 돈은 우리가 한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구경도 못할 돈이야.
개울물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면 강물이 된다잖니?
돈은 그렇게 돈끼리 서로 붙어서, 돈끼리 몰려서 큰 돈뭉치를 만들어서 다니는거야.
거기서 이탈해 나온 얼마 안되는 돈이 <흰 돈> 이야.
이 <흰 돈> 을 벌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아웅다웅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부자가 된다는 .."
"마약아, 그건 학교 교과서에나 있지. 요새 누가 저축하니?"
"일해서 번 돈 저축 안해요?"
"평생 저축해보세요. 그래서 얼마나 되겠어?
그치만 부동산 투기를 4, 5년만 해봐. 그런 돈은 순식간에 벌어요.
큰 돈은 저축으로 모을 수 있는 돈이 절대 아니야.
일해서 벌 수도 없고.
너 혹시 우리나라 공직자들이 재산신고를 해야 하는 것 알지?"
"예"
"그 사람들은 일년에 몇억씩 벌고 쓰고 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게 그 사람들의 월급만으로 될 일이야?"
"그럼 누나에게는 그 <검은 돈>이 보인다고?"
"나는 그 <검은 돈> 을 모으고, 나르고, 쌓아두고, 거래해. 심부름만 하는 거야."
"그래서 돈이 많다고 하셨어요?"
"아파트만 해도 그래. 평생 일해서 저축해봐. 그래서 어느 세월에 아파트를 사겠니?"
"그건 ..."
"명심해. 네가 큰 돈을 빨리 벌려면, 너도 어쩔 수 없이 검은 돈에 접근하게 돼 있어."
"저는 흰 돈으로 만족 ..."
"젊어서는 야망을 약간만 가져봐도 돼."
"그래도 그쪽은 여어엉 ..."
"오늘부터 내가 진짜로 마약 누나 할꺼니까, 내일 아침에 마약 계좌로 1000만원 넣어줄께."
"예?"
"<공짜 동생>한테 선물을 해야 하는데, 나는 내일부터 열흘간 미국에 출장 가요."
"그런다고 선물로 1000만원을?"
"마약이 내 동생이면, 내가 그 정도 선물도 못 해? .. 당장 마약 계좌번호 날려."
"알았어요."
"정수에게 차를 한대 사 줄 수도 있는데, 그건 나중 얘기고. 일단 우리 1000만원으로 시작해보자."
박하나는 여간해서는 잘 웃지도 않는다. 냉철함과 고집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한 것은 물론이다. 그것을 정수는 그녀의 눈빛에서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정수는 박하나를 <철벽녀>라고 단정짓는다.
장난일까?
진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