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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4 23. 패왕색녀의 고민과 박철호 PD (24/116)

00024  23. 패왕색녀의 고민과 박철호 PD  =========================================================================

안명수는 정수와 한 약속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그녀 나름대로 진짜 야심찬 프로젝트를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안명수가 아직은 베테랑급 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명수는 취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송이나 신문에 내보낼 권한은 없다. 더구나 방송공사 LBS 에서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고민하던 안명수에게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만일 LBS 웹싸이트에 기사를 띄우고, 동시에 프로그램으로 방영을 해버리면 문제는 간단해질 것이다. 그러면 국내 일간지들은 너도나도 보도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웹사이트에 내는 기사는 설득력이 아직은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호소력은 젊은 층으로 쏠려야 하므로 별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고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혼자 해대느라고 머리통이 터질 것만 같다. 그렇지만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무엇하나 시작하기가 쉽지않다.

그녀가 드디어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해내기 위해서 안명수는 역부족이라는 사실. 결론치고는 참으로 씁쓸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 사실도 6하원칙에 맞기 때문에 명수는 받아들여야 한다. 슬프다.

그런데 그녀의 대학 선배 박철호가 LBS 에서 PD 로 일한다. 안명수는 박철호 PD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자기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만은 볼 수 없다. 왜 처음에 이 생각을 못했지?

안명수는 모든 고민을 접고 우선 취재에 착수했다. 둑은 더이상 막을 수 없다. 무너진 둑을 타고 안명수의 열정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먼저 포항에 내려가서 정수의 누나 김경애를 만났다. 정수에 대한 안명수의 야심을 털어놓고 취재에 응해달라고 부탁했다.

김경애가 생각할 때에 안명수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쩌면 한정수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천에서 용아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인맥이 없으면 소용없는 세상. 한정수가 악바리처럼 노력했다고 치자. 내년에 오디션에 또 나가서, 그 때는 반드시 입상한다는 보장이 없다. 또, 입상 했다면? 그 이후에는 정수를 위해서 이 세상이 핑크빛으로 바뀌기라도 한단 말인가?

안명수는 한정수에게 신이 내린 인물이 아닐까?

김경애에게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저 딱한 아이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져야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안명수는 역경에 처한 후배들을 운운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사실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눈을 감아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늘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갑자기 뜻하지 않게 고민에 처한 경애는 안명수와 함께 과메기를 안주로 해서 소주도 마셨다. 왜 이렇게 소주가 물처럼 잘 넘어가는지. 안명수는 타고난 술꾼같다.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다음날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통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겉으로는 안그런 척하고 미모를 뽐내벼 정수가 다니던 학교, 또 정수가 다니던 음악학원 들을 돌아다녔다. 더위는 또 왜 이렇게 극성인지. 이래저래 고난의 행군이다. 

생각해보면 술이 문제였고, 술은 고민 때문에 시작했고, 이 고민은 안명수가 불을 질러서 생겼으며, 이 모든 문제의 원인 한가운데에는 얄미럽게도 마약이 버젓이 버티고 있다. 진짜 괘씸하다. 

"그런데 이 음악학원은 연예인이나 연기자를 양성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냥 취미로 ..."

"보니까 그렇네요."

"그럼 맨 처음에 이 사건을 일으킨 그 <길거리 스카웃>을 한 기획사사 운영한다는 학원요."

"아, 거기 가서 정수가 어땠는지는, 오디션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이 있을 겁니다."

안명수와 김경애는 서울에 있는 그 연기학원으로 갔다. 

이 학원이 기획사와 연결이 된 것은 맞는데 ...

명수가 캐보니까 이 허황된 관계라는 것은 사돈의 팔촌의 16촌과 36촌 관계에 있는 허무맹랑한 관계다. 한마디로 돈을 삼키는 블랙홀인 셈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이 학원이 완전한 사기 집단인 것은 아니다.

안명수가 하는 설명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정수 엄마가 그 당시에 고개를 저었다는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경애는 갑자기 정수 엄마가 존경스러워진다.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직감 하나로만 그 위대한 결론을 내렸으니까. 그 결론에 따라서 정수의 인생이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될 뻔 했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인생은 연륜이다. 

안명수는 그 학원의 원장에게서 한정수 오디션 결과를 달라고 했다. 

"7, 8년 전의 기록인데요?"

"그 정도는 보관하시지 않나요?"

"있어도 상태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어요."

그들이 제시한 결과는 그 당시 심시위원들이 한정수를 평가한 기록이었다. <모델> 과목에서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카메라를 잘 받으므로 점수가 좋다. <배우> 과목에서는 연기에 몰입도가 높지 않아서 점수는 좋지 않았다. <가수> 과목으로는 음악성 부족과 곡 해석 능력의 부족으로 <부적합>으로 판정이 나와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수를 키워보겟다면서 맡겨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델로 나갈 뻔 했다. 경애는 정수가 모델로 나갔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 참 .. 한정수가 지금 하지 말라는 것에 덤비고 있네요."

"하라는 것을 한다고해서 다 성공하나요?"

경애는 정수 모르게 포항으로 내려가면서, 안명수에게 정수에게 이 사실을 아직은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안명수는 마치 다큐멘테리를 쓰는 작가처럼 프로그램을 위해서 일일이 전부 기록했다. 또 장면들을 설정하고 나레이션과 극화까지 동원했다. 애당초에 그녀는 기사를 쓰겠다고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전체 시간을 20분 정도로 예상하고 방송 미친듯이 방송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마약아.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발 떠 다오.

그럼 나도 따라서 뜬다.'

안명수는 박철호PD 를 만났다. 장소는 강남에 있는 한양로얄호텔 18층 스카이라운지이다. 이 자리에 나온 안명수는 신념에 차 있었다. 원래가 그렇다. 신념에 찬 여인은 아름답다. 박PD가 볼 때 안명수도 아름답다.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을 떼기란 더욱 어렵다. 어깨에서 멈춘, 웨이브한 풍성한 머리, 빛을 발산하는 듯한 신비로워보이는 깊은 눈, 붉은 색으로 가까워가는 분홍색의 입술, 풀만한 볼륨의 굴곡을 나타내는 트렌디한 패션. 안명수가 모델이나 여배우를 하지 않고 여기자를 하는 이유가 뭘까? 이 광활한 세상 곳곳에 숨겨져 있고 또 위장되어 있는 일들을 까발리기란 쉽지 않을텐데 ...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안명수가 본 박PD. 

그는 텁수룩한 머리로 30대 후반 어딘가에 서 있을 거친 세월 속의 남자이다. 그가 자신을 차가운 눈매로 바라보면, 그것 만으로도 이미 주눅이 들고 또 간담도 서늘해진다. 

누구나 제삼자가 봤을 때 지금 테이블에 마주앉은 이 두 사람의 앙상블은 도저히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생각할거다. 

그는 이 세상을 양분해서 본다. 프로그램으로 만들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조심하지 않으면 명수는 그에게서 오늘 끝없는 추락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끝없는 그리고 중단없는 경계태세가 유지되어야 한다.

"선배님, 돌직구로 말씀 드릴게요."

"엄청 궁금하네."

박PD가 본 것은 안명수가 쓴 너무도 어설퍼서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방송 시나리오 원고였다.  그것도 손으로 써서 칼라 펜으로 군데군데 동그라미, 별표 등등을 쳐두었다. 마치 고등학생들이 수능 시험을 공부하는데 쓰는 공책같다.

박PD는 약간 눈을 찌푸렸다. 안명수는 긴장한다. 지금 뭔가가 그의 심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은근히 항의하고있다.

"이걸 ... 왜 썼어?"

"밤에 잠이 안와서요."

"차라리 낮에 열심히 일을 해. 실없이 이런 일로 바쁜 사람 불러내지 말고."

박PD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안명수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알고있다. 여자가 바로 이 싯점에서 주로 몸을 던진다. 만일 오늘 밤을 호텔에서 같이 보내면 내일은 틀림없이 그가 안명수를 부르게 돼 있다. 그러나 안명수의 자존심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신발아, 수박아,  너같은 노땅구리랑 내가 호텔에 왜 가냐?

나는 아직 풋풋한 내꺼 마약 따로 챙겨뒀거든.

내가 너같은 돼지같은 신발쉬퀴랑 호텔에 가느니,

차라리 엄마랑 황당무계한 맞선자리에 간다.'

이 말은 입밖에 내보낼 수가 없으므로 안명수는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했다. 그래서 안명수의 가슴 속을 짜증과 분노가 가득히 채웠다. 또 안명수의 눈물샘을 빠져나온 눈물은 이미 눈망울과 눈썹으로 번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콧물 대신에 더운 콧바람이 나왔다. 그리고 입으로는 열풍을 섞어가면서 박PD에게 말했다. 신경을 바짝 써서 단어 하나에까지 신경을 바짝 써야 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배우고 싶은데요."

"수업료 내. .. 그런데 안기자, 왜 울어?"

"수업료는 선배님 다니신 대학에 벌써 냈어요."

"그럼 알아야지."

"그래도, 대학에서 배워도 모르면, 후배를 끌어주는 입장에서 선배가 가르쳐 주시면?"

"나는 혼자야. 언제 일하고, 언제 후배 가르치고 또 언제 윗사람 눈치보고 ..."

"선배님."

"요새 젊은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먹으려고 해?"

"저 앉아만 있다가 온 것 아니거든요. 포항 여기, 여기 다 갔다왔어요. 보세요."

박PD는안명수가 제시하는 자료집을 열어서 스크랩 해 둔 것들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선배..."

"쉿~!"

박PD는 자기만의 5차원, 6차원의 세계까지 넘나들면서 머리 속에서 그만의 생각을 한다. 그것이 바로 PD들의 특권이다. 이거 못하면 PD 못해먹는다. 그래서 PD 들은 주로 외계인급들이 많다. 

"안기자."

"예, 선배님."

"기자 때려치우고, 차라리 방송작가 해요."

"왜요? 아직 많이 부족 ..."

"오늘은 갑자기 만나서,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시간이 없다."

"그럼 어쩌죠?"

"이번 주에 프로그램 확정이 끝나면 다음 주에 시간 될거야."

"그럼 미스 윤한테 시간을 잡아 달라고 해요?"

"바보, 안기자랑 3박 4일 정도를 들여서 이 프로그램 구성을 샅샅이 다시 해야해."

"예에에에?"

"알아 들었으면 월요일에 출근하는 대로 내 방으로 와. 그리고 시나리오 원고랑 자료는 워드작업 해서 USB 에 담아와. 지금 나한테 손으로 정성을 다해서 연애편지 써온거야?"

바빠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으로 들어온 그는, 갈 때에도 바쁘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하니 가버렸다. 그가 먹으려던 스테이크, 그가 마시려던 와인 모두 손도 대지 않았다. 진심으로 아깝다. 그녀는 촌스럽게도 싸달라고 했다. 갑자기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목숨을 잃어가는 어린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또 그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던 <만년 소녀의 화장빨> 오드리 헵펀님도 떠올랐다.

그래도 그는 냉수 한 컵 만큼은 마시고 나갔다. 아마도 속은 차려야겠다는 결심이 대단했었나보다.  이 넓은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잘나가는 건 아니다. 박PD역시 잘나가는 <이상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이상한 사람들>과는 <이상한 대화>를 해야 성공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안명수는 그와 이상한 대화를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안명수는 오늘도 실패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 바쁜 와중에서도 나갈 때에는, 저녁식사로 나온 스테이크, 샐러드, 와인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깔끔하게 계산하고 갔다. 안명수는 그냥 몸을 일으켜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와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는 말인데 ...

꼬투리 잡힐 만한 말이 오간 것도 전혀 없는데 ...

그럼 이상한 것은 방송 시나리오였나? 

이것이 성공의 키였나?

혹시 이 미팅 .. 성공한거야?

아!

선배님,

아까 그 호텔 생각 ... 죄송요.

내뱉지 않고 가슴 속에 깊숙하게 묻어 둔 말 .. 이제 꺼내서 버렸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고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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