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01 P R O L O G U E : 상처 %26 힐링 (1/116)

\00001  P R O L O G U E : 상처 %26 힐링  =========================================================================

한정수와 김경애가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선 것이 벌써 9시가 넘었다.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기로 하고, 길가에 있는 호프집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홀에는 손님들도 별로 없고, 조명도 밝지 않다. 음악마저도 조용히 흐른다. 피아노 연주곡이다. 연주하는 스타일로 보아서 앙드레 가뇽(Andre Gagnon) 영감님 같다. 그 어르신이 젊었을 때 연주한 곡들. 지겨울만큼 조용하다. 정수는 숨을 죽이고 진지하게 듣고있다. 건반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두들기는 그 분의 섬세함이 마치 영혼을 다독이려는 것 같다. 다음 곡으로 조지 윈스턴(George Winston) 어르신께서 대머리를 반짝이면서 연주하던 캐논도 나온다.

정수와 경애는 지금까지 살면서 큰 일을 몇번 겪었다. 그런데 이번에 있었던 사건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오늘처럼 이들이 힐링을 필요로 한 날이 또 있었나? 이런 날 저녁에 호프집에서 이런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어제가 브로큰 데이였다면, 오늘은 그야말로 힐링데이가 되려나?

주문한 병맥주와 과일 안주가 나왔다. 두개의 유리잔에 정수가 맥주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경애는 그러는 정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들은 맥주잔을 들어서 건배했다.

"우리 .. 또 열심히 하자!"

"응."

"기 죽지 말고 .. 힘 내자."

"알았다고 했거든."

정수를 바라보는 경애의 눈망울에서는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수가 힘들게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어서 문 앞에까지 다가섰지만,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정수에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고 그의 탈락이 확실해지자, 절망의 빛이 역력한 그의 뺨을 흐르던 그의 눈물을 그녀는 애처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경애가 볼때 정수의 덩치는 듬직하지만 그의 마음은 너무 여리고 곱다. 저 어린 것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클까? 

정수도 경애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의 표정이나 눈길은 조용하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서는 만가지 생각이 오가고 있다. 경애는 아까부터 자주 고개를 돌려 조용히 창밖을 보고있다. 그런데 어두운 밤거리에는 이따금씩 오가는 사람들 말고는 별로 볼 것도 없다. 정수 생각에 경애는 지금 아마도 무엇인가를 보고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혹시 그녀가 정수를 외면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마음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데, 지금 경애의 생각은 어떨까?

김경애는 지금 24살이지만, 그 나이에 청바지와 흰색 반팔 남방으로 아직도 여고시절의 청순한 모습인 것 같다. 그가 늘 보는 경애여서 그런지 경애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경애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모아서 묶고, 챙이 큼직한 야구 모자를 약간 눌러서 쓰고 있다. 정수의 시선은 경애의 슬픈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서, 산처럼 솟아있는 경애의 젖가슴으로 이어진다. 평소와는 달리 오늘은 경애가 이렇게 서글퍼보인다. 이럴 때에는 그녀의 섹시한 면이 클로즈업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모자의 챙이 만드는 그늘 때문에 경애의 얼굴이 약간 어둡다. 정수는 경애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는있다. 

한정수.

그리고 김경애. 

벌써 15년 가까이 한정수는 김경애를 누나라고 부른다. 또 경애는 한정수를 자기 친동생으로 여기고 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예 친남매라고 생각해버린다. 정수에게 경애는 누구보다 소박하고 예쁜 누나이다. 경애에게 정수는 자랑스러운 남동생이다.

착한 경애는 동생 정수에게 기대를 크게 걸고있다. 경애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정수를 믿어주고, 밀어주고 또 응원해  온 정수의 든든한 후원자이다. 

이번에 정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는 소속한 기획사도 없이 혼자 힘으로 한 노력파이다. 그런데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정수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후회나 실망스러운 것이 없다. 

정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간 한가지 뿐이다. 착하디 착한 누나가 지금까지 정수에게 걸어왔던 그 모든 기대가 이번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정수는 감히 얼굴을 들고 누나를 볼 수가 없다.

이 번에 정수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누나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아있을까? 누나 경애를 생각하면 정수의 가슴이 메어진다.

"첫 숟가락에 배부르려고 하면 안된대잖아."

" ...... "

"정수 네가 여기까지 온 것만도 어디니?"

" ...... "

"이번에 정말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 우리 정수는 앞으로 잘 해낼거야. .. 나는 믿어."

" ...... "

지금 정수가 누나에게 사과하고 또 누나의 마음을 위로하여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누나가 정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누나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정수는 가슴이 울컥하면서 울고 싶다. 그렇지만 참아야 한다. 오히려 누나가 더 울고 싶을 것이다. 만일 지금 정수가 울어버린다면, 누나야말로 걷잡을 수 없게 울어댈 것이다.

오늘은 누나가 맥주를 평소보다 많이 마시는 것 같다. 정수는 누나가 걱정스러웠지만, 오늘 만큼은 누나가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도록 그냥 두기로 했다. 정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비록 잠정적이겠지만 정수는 어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만들었고,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동안 누나가 겪었을 고충을 그가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누나가 얼마나 힘들었으며, 또 누나의 가슴에 앙금처럼 쌓인 일들이 어디 한두가지일까? 그 깊은 속마음을 정수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정수를 보고만 있으려니 경애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할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정수는 술을 마실 수 없다. 또 오늘은 술맛도 없다. 술이 술이 아니고 물같다. 정수가 자신만 생각했더라면, 그는 호프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애는 정수가 채워준 잔을 비우고, 정수는 누나가 비운 잔을 채운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경애의 젖어드는 두 눈이 반짝인다.

밤이 어둡다. 호프집의 조명도 밝지 않고 약간 어두운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서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생각하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신다. 어떤 일들은 희미하게, 또 어떤 일들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들이 지나온 세월 속에 있는 많은 일들이 경애뿐 아니라 정수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한다.

그들은 호프집을 나와서 모텔로 돌아간다. 8월의 여름 밤은 낮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가로등의 불빛을 받으며 걷는 경애의 몸이 약간 휘청거린다. 경애는 똑바로 걷지 못한다. 정수는 경애의 허리에 팔을 둘러서 부축한다. 이미 여인으로 성숙해버린 경애의 몸과 체온이 정수의 팔로 전해져온다. 

경애의 몸이 정수에게로 기대온다. 정수의 몸을 경애의 젖가슴이 뭉클하면서 눌러온다. 경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걷는다. 정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걸었다. 그러나 정수의 속은 절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다. 경애가 웅얼거린다.

"아이이~. 씨잉. 나 하나도 안취했거든."

"알았어. 그래도 이렇게 하고 가."

"그럼 그럴까? 우리 정수가 이렇게 커서 내가 기댈 수도 있네. 하아~"

"그래. 마음 놓고 기대."

"아아아~. 정말 기분 드럽게 좋다. 너는?"

"누나가 그렇게 좋으면, 내 기분도 드럽게 좋아."

그러나 정수가 한 이 말은 거짓말이다. 아마도 경애가 한 말도 역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텔 옆에 있는 편의점에까지 왔다. 그는 누나를 편의점 입구에 있는 원탁에 앉게 하고, 캔맥주와 오징어 안주를 사서 들고 나왔다. 누나를 생각해서 아이스크림도 잊지 않았다. 그는 누나 옆에 앉아서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누나가 시원하다면서 엄청 좋아한다. 누나가 마치 여고생같다.

그는 모텔 방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누나를 부축했다. 누나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날 듯 하다. 

"하아~. .. 정수야. 정말 미안해."

"내가 누나한테 미안하지. 착하고 예쁜 누나가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어? .. 내가 착하고 예쁜거야?"

"바보야. 몰랐어?"

"나, .. 착하고 예쁜 것이 전부야?"

"나한테 누나는 천사야."

"하아~ .. "

그들은 어느새 302호실 방문 앞에 서있다. 이제 오늘도 하루가 막을 내린 것이다. 

방에 들어온 정수는 누나를 침대에 앉혀놓고, 소파에 앉아서 TV를 켰다. 이리 저리 채널을 바꾸다가 음악 채널 에서 멈추었다. 언젠가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재방송한다. 정수는 그 프로그램을 전에 봤지만 또 보기로 했다. 참가자들은 노래를 하고, 또 심사위원들은 돌아가면서 심사평을 한다. 그들은 칭찬도 하고, 또 쓴 소리도 한다. 참가자들은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그 말들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전광판에 점수가 나온다. 여기에 문자메시지를 통해서 TV 시청자들이 주는 점수와 홀에 있는 관중들이 주는 점수가 가산되어 최종 순위가 경정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짜고치는 고스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참가자들의 열정과 실력만큼은 숨길 수 없다. 열정없는 실력이나 또 실력없는 열정은 탈락이다. 그렇지만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정수가 이런 오디션을 경험하고 나서 이 프로그램을 보니까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고 또 새롭게 눈에 보이는 것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누나는 덥다면서 욕실로 갔다. 곁눈질로 보니까 누나는 욕실 문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욕실 안으로 사라진다. 정수는 비틀거리는 누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방금 잠시 동안 본 것이 누나의 벗은 몸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 작품 후기 ============================

이 글에 나오는 사람이나 사건 등은 모두 제가 생각해 낸 것이고,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돈이 필요해서 도로 공사장에 일하러 다닌다고 말씀드렸는데.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요새는 날이 더워서 더 힘드는데, 일 끝나고 돌아오면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쓰던 글을 계속해서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없이 글을 쓰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미 연재중인 글들을 완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또 다른 글을 시작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전에 써서 USB 에 들어있었거든요. 제가 다시 읽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을 봐서 올리는 중입니다. 복습하는 기분입니다. 열공하는 마음으로 쓰겠습니다.

수정했습니다. 이제 한정수와 김경애는 친남매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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