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14화
“엄마 오늘 참 이상하다. 왜 보람이네 집에 못 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육삼 빌딩은 유치원 다닐 때 두 번이나 같다 왔는 걸. 하지만 게임기는 지금까지 한 개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생일 선물로 게임기 사줘야 해.”
“또, 저 고집 나온다, 자 그만 나가자. 너 자꾸 아픈 아빠 아침부터 피곤하게 만들면, 점심 때 피자 안 사 줄 거야. 네 친구들도 초대 못하게 할거구.”
현숙은 억지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보람이네 집에 가서 놀다 잠이 들면 또 다시 찾아가야 한다. 김현세가 그냥 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엄만 순 거짓말쟁이. 학교 같다 와서, 친구들 초대하면 피자하고 치킨하고, 콜라 사준다고 승혜하고 약속했잖아. 하지만 게임기는 처음 말하는 거잖어. 그치 아빠?”
승혜는 되는 것 보다, 안되는 것이 더 많은 엄마 보다 아빠 쪽이 편하다는 생각에 기철을 쳐다보았다.
“좋아. 우리 공주님이 그렇게 원하신 다면 아빠가 퇴근할 때 게임기 사 올게. 됐지?”
“아빠 사랑해요. 엄마는 미워? 쩌번에도 아빠 월급 타면 게임기 사 준다고 해 놓고선……”
승혜는 기철의 다리를 껴 않으며 팔짝팔짝 뛰다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현숙을 흘겨보았다.
“게임기 가격이 얼만줄 이나 알아요. 못 줘도 십만 원 한 장은 줘야 할걸. 그렇다고 오랫동안 좋아 할 것 같아요. 며칠 안 가서 장난감 박스 안에 쳐 박히고 말걸. 그러니 그러지 말고 동화책이나 한 질 사주는 게 어때요?”
승혜가 기철에게 재롱부리는 모습을 쳐다보던 현숙은 문득 나는 이 가정의 구성원 이 아니고, 제 삼자 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차분한 음성으로 기철에게 말했다.
“김선생 딸이 오락하는 걸 보면 저도 얼마나 하고 싶겠어. 그러니 이 참에 한 개 사주지 뭐. 그리고 게임 종류가 많으니까, 친구들끼리 게임 프로를 교환도 해 가며 즐기면 되잖아.”
기철은 아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일을 핑계되어 조르는 승혜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일찍 퇴근하여 백화점에 들려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 가방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요……”
현숙은 열외자 가 되어 버린 기분으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결국은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난감 같은 것은 사주지 않는 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사랑하는 딸과 남편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승혜까지 학교에 간 후에 현숙은 한참 동안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오늘 오후부터 소나기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휴!
다른 때 같았으면 어김없이 승혜 손에 우산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세와 그 일이 있고 부터는 겉돌기만 하는 자신이 싫어서 우울한 얼굴로 텅 빈 집안에서 마음 놓고 한숨을 내 쉬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거죠?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김현세의 말이 생각났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액과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팬티를 껴입으려고 할 때, 김현세가 팽티도 입지 않고 한 말이 떠 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아……안돼!
현숙은 잊으려 애를 쓸수록 김현세에게 다가서고 있는 의식이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김현세의 생각을 지워 버리려면 바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집안 청소부터 하리라고 막 일서 서려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그 사람인가?
현숙은 무서웠다. 전화를 받게 되면 약간은 탁한 김현세의 목소리가 들려 올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그가 살고 있는 지하층을 노크하고 말 것 만 같아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발!
전화 벨 소리를 무시하면, 무시하려 할수록 더 요란스럽게 울어 돼는 법이다. 현숙은 걸레를 떨어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체 두 귀를 감았다.
현숙씨를 사랑합니다. 아!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 이 젖꼭지하며, 이 계곡은……싫어!
눈을 질끈 감은 체 귀를 막고 있으려니까 전화 벨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기억의 여신이 김현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현숙은 히스테리칼 하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안돼!
마침내 현숙은 무릎을 끓고 울었다. 텅 빈 집안에서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울면서 제발 김현세를 잊게 해 달라고 신께 기원을 했다. 신이 기도를 들어준 탓인가, 천둥소리처럼 울어 되던 전화 벨 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괴괴할 정도의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이를 사랑해. 승혜도 버릴 수가 없어.
현숙은 마치 남편과 딸로부터 버림이나 받은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한 손에 걸레를 든 체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도 삼층 짜리 다세대 건물 인 탓에 방안으로 햇볕이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붉은 벽돌 벽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앞으로 검은 비닐 봉지 하나가 포르르 날라 들었다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내려 않는 게 보였다. 비가 올 징조 였다. 비닐 봉지가 창문틀 밑으로 사라지면서 다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는 뿌연 먼지를 안고 차가운 골목을 황량스럽게 훑어갔다.
“좋아.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네가 만약 그 놈하고 결혼을 한 다면 더 이상 이 집에 발 들여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난 이십 삼 년 동안 남부럽지 않게 키워 온 딸을 가진 거 라곤 부랄 두쪽 밖에 없는 놈한테 시집보내긴 싫으니까.”
남편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던 아버지가 최후의 통첩을 하던 때도 이처럼 초여름이었다. 그러나 장소는 틀렸다. 거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로 잘 다듬어진 향나무가 보였고, 꽃이 지고 잎새만 무성한 목련 나무와, 담장에는 손톱만한 꽃망울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넝쿨 장미가 늘어져 있었다.
“엄마!”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난생 처음 으로 어머니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아버지처럼 찬바람이 불고 있지 않았으나, 철저한 방관자의 얼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보란 듯이 살아 주겠어요.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원하는 스물 세 살의 딸을 위해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라도 변호를 했었다면,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까지 독한 마음을 먹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 이었다.
아무리 가정에서 경제권이 없다지만 아버지의 독선과 횡포에 잘 길들여진 어머니라지 만, 딸의 미래가 걸려 있는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도 방관자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현세의 집 식탁에서 커피를 마실 때까지 만 해도 부모님들이 보란 듯이 열심히 살려고 최선을 다해 왔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했고, 딸을 기르는 어머니로 서 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다. 김현세의 식탁에서 커피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 왔었다.
정말 잘 살아 왔었는데……
현숙은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왜 김현세에게 빠져들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날,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김현세가 손을 잡으면서, 현숙씨를 보면은 난 세상을 멋지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라는 말을 듣기 전 만 해도 모든게 순조로웠다.
그러던 것이 손을 잡히고,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몰라도, 키스에서 페팅으로, 급기야는 그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만나면 안돼.
현숙은 거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열 시를 알릴 때서야 자신이 청소를 하다 자신도 모르게 또 김현세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일어섰다.
승혜 생일날 도대체 왜 이래야 되는 거지.
승혜가 학교 같다 오기 전에 생일상을 차려 놓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피자와 치킨만 있다고 생일상이 준비되는 것은 아니었다. 음료수도 있어야 하고, 후식으로 먹을 과자냐, 과일류나, 케이크도 있어야 한다.
승혜가 초등 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맞는 생일날 제 친구들에게 기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식탁을 짰다. 피자나 치킨은 제 시간에 맞춰서 배달을 시키고, 음료수와 과일은 종점 슈퍼에서 사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청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가구에서 윤이 나도록 청소를 하려고 했으나, 김현세 때문에 헛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다고 생각하고, 팔이 아프도록 빠른 시간 내에 대충대충 눈에 보이는 부분만 소를 했다. 걸레를 목욕탕에 갖다 두고 슈퍼에 가기 위해 집에서 입는 헐렁한 원피스를 벗으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